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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재활

[13회] 2018년 2월

 그 말을 하는 줄리에타의 눈 밑이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새카맸다. 험한 동네에서 유일하게 날 즐겁게 해주는 이 가여운 딸랑이를 위로해야겠다.

 "대공비를 이해는 하지만 몹시 불쾌하네요. 에스메랄다 전하를 무시한다는 것, 잘 알겠어요. 하지만 줄리에타를 봐서 참죠."
 "정말... 미안해요."
 "뭐, 줄리에타는 아직 피뇨르 영애잖아요?"
 "고, 곧 차노트 대공비가 될 거니까요!"

 꿈도 야무지다. 대공도, 대공비도 아직 내려올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 내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는 조금 빨리 내려와 주는 편이 좋겠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들을 죽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 토라져서 입술을 삐죽이는 줄리에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가 차고 있던 팔찌를 손목에 채웠다.

 "어? 이건 빅토리아가 좋아하는..."
 "줄리엣의 웃음을 볼 수 있다면 팔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빅토리아! 루이스만 없다면 전 당신뿐이었을 거예요!"

 내 손을 꼭 잡고 글썽였다. 진심이 분명하다. 루이스는 나보다 먼저 줄리에타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는 걸 알까. 아무나 좋으니까 좀 들어와서 이 부담스러운 분위기를 어떻게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마침 밖에서 누가 노크를 했다.

 "아가씨. 소트 영애가 방문하셨어요."
 "어서 들어오시라고 해. 그리고 영애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줘."

 무슨 용건인지 활짝 웃으며 뛰어들어와 테이블 앞에 섰다. 대공비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줄리에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겨우 웃기 시작한 줄리에타가 다시 무서운 얼굴이 됐다.

 "고모님께서 지난번 실례 대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마지막 밤의 연회를 화려하게 준비하고 계세요. 방금 살짝 구경하고 왔는데, 정말 멋졌어요! 참. 고모님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하지 말라고 했으면 좀 하지 마라. 꼭 이런 애들 때문에 기밀이 샌다. 나는 좋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궁금하잖아요. 한가지 정도는 귀띔해 줄 수 있잖아요?"
 "하지만..."

 말 안 해줘도 된다. 별로 안 궁금하니까. 해봤자 올랑트의 재미없는 고별연회 정도 아니겠어. 좀 논다는 마리아도 프라우에서 제법 배워 그 정도다. 벽난로에 불이 활활 타고 있는데도 목이 싸늘하다. 오늘 밤도 살벌하겠다.

 "사고 때문에 대부분 영지로 돌아갔다고 알고 있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많은 분을 초대하는 연회는 아니라고 들었어요."
 "젊은 사람은 별로 없겠네."

 또 나는 따돌리고 소트 남작가 가신들끼리 모여서 한참 떠들겠지. 어때. 어차피 나를 대우해준 건 이 귀여운 줄리에타 뿐이다. 프라우에 돌아가면 혼나겠지만 에들턴 경이랑 딱 붙어서 있으면 목숨줄도 안전하고, 눈도 즐겁고.

 "메리... 영애는 있으니까요."

 아. 내일은 제발 불쌍한 고트 공자랑 같이 붙어있어 주면 좋겠다. 울상이 돼서 나한테 달려오면 차노트 대공에게도 미안하고, 애써 파트너 흉내를 내주는 에들턴 경한테도 미안하다. 매번 연회마다 부쩍 능숙해져서 귀여운 맛이 사라져가고 있는데, 하루라도 더 놀리고 싶단 말이야.

 "괜찮겠죠."

 흘러내린 보자기를 추슬렀다. 괜히 부드러운 재질이어서 쉽게 매듭이 풀린다. 옷핀 같은 것으로 아예 고정했으면 좋겠는데. 잠깐. 나 내일 연회에도 이거 뒤집어쓰고 다녀야 하나? 세상에. 집안 망신이 따로 없네.
 문가에 서 있던 클라렌스가 속닥거리더니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대공께서 방문해주십사 요청하셨어요."
 "그래. 안 그래도 슬슬 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내 목숨이 오늘 내일 하고 있는데 이 뻔뻔한 늙은이 같으니. 문이 살짝 열렸다. 너머에 살짝 비친 루이스의 얼굴에 줄리에타의 안색도 활짝 폈다.

 "여기 있었습니까, 줄리에타. 찾았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혹시 소트 영애가 찾던가요?"
 "아니요. 며칠간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마침 시간이 비어서."

 연애질을 하겠다는 이야기구나. 내가 비켜주마. 예쁜 클라렌스와 에들턴을 뒤에 달고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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