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애 덕분에 인력손실 없이 일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올리비아 로슈민은 예법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얼굴로 웃었다. 아홉살에 못 미더운 얼굴로 저택을 떠나간 예법선생의 얼굴이 겹쳐보인다. 내가 날뛴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아누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요새는 어떻게 지낼지 모르겠다. 건방져보이지는 않겠지. 마탑의 미움을 사고싶지는 않다. 돈이야 얼마든지 쏟아부을 수 있지만, 역시 황실의 일원과 척을 지는 것은 무섭다. 서류를 돌려줬지만 모자도 망토도 가져갈 생각이 없어보인다. 다른건 몰라도 이 학파장 망토만큼은 제발 가져가줬으면 좋겠다. 아마 로슈민령까지 내 소문이 퍼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연쇄 드레스 살인마에게 옷을 맡기다니.
"꿈은 좀 어떤가요?"
"요새는 통 꾼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마법이 잘 듣는 것 같아 다행이예요."
뿌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는 손을 휘저었다. 내 어깨에 둘려있던 망토가 날아가 크로노스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다른 망토가 날아와 내 어깨 위에 앉았다.
"준, 그 약은 작자가 언제 알아봤는지 발 빠르게 선물을 보내왔어요. 내 망토보다는 못하지만 훌륭한 물건이예요. 그 모자는 제 선물입니다."
이 마법사들이 왜 이럴까. 나는 마법에 재능이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없다는데 죽어도 안 믿는구나. 주는 선물을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정말 부담스럽다. 이렇게 되면 후원금으로 보답하는 수밖에 없는데. 대체 여기서 후원금을 얼마나 더 늘려야 하는걸까. 고통스러운 상상을 하는 와중에도 종이들이 눈앞에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런데도 집중이 잘 되는걸 보니 보통 모자는 아닌듯 싶다. 학파장이 선물할 정도면 예사 물건은 아니겠지만. 어떻게 입고다녀야할 지 황송한 새하얀 망토 자락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크로노스가 한눈을 파는 사이 몰래 빠져나왔다. 예의 찾아가며 나갈 타이밍을 찾느라 계속 있다가는 정말로 내가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착각을 할 것만 같다. 세뇌라는 것은 아주 무서운 것이다. 한 네번째쯤 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우선은 황송한 물건들을 방에 모셔다둘 겸 방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에들턴은 어쩐지 기뻐보였다. 길드 제품에 둘러싸여 혼자 초여름 상쾌한 날씨에 살고있는 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걱정한 모양이다. 내가 머무는 방 근처로 돌아가니 샐리가 창백한 얼굴로 문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가씨! 클라렌스가 돌아왔어요."
"그래? 메리가 내 부탁을 잊지 않은 모양이네. 이렇게 빨리 보내줄 수 있었으면서 게으름을 피웠어."
"그런데, 아이 상태가..."
문이 열리자 샐리는 입을 틀어막았다. 직접 문을 열고 나온 클라렌스는 피부도 예전보다 곱고, 머리결도 좋아졌지만 어쩐지 수척한 느낌에 눈빛도 거친 바다에서 홀로 조각배를 타고 살아돌아온 조난자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샐리를 쳐다보니 충격 가득한 눈빛으로 말없이 나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그 뒤에서 에들턴은 소문과는 다른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음, 클라라? 잘 지냈니?"
"아가씨라면 잘 지내셨겠죠. 따뜻한 차노트 령에서 공주님 대리로 떵떵거리면서..."
미친걸까. 대체 왜 저러지? 나의 귀엽고 조금 멍청하던 클라린스는 대체 어딜 간거야? 엄한 곳 돌아다니다 비명횡사 할까봐 안전한 곳에 잠시 모셔뒀더니 왜 이렇게 된 거야? 어쩌다 갑작스럽게 사춘기가 찾아온거야? 아니, 열셋이니 사춘기가 올 때가 맞기는 한데.
"샐리. 온실에 가서 피뇨르 영애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전해줘. 그리고 에들턴 경은 잠시만 복도에 있어주시겠어요?"
"네"
둘 다 나갔다. 그러니까 이제 말을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클라렌스는 손수 티푸드까지 챙겨와 앞에 내려놓고 차를 내려 마셨다. 꼭 인생을 다 산 노인이 술을 마시는 것 처럼 분위기가 이상하다.
"나는 까맣게 잊은 줄 알았어. 벌써 두달은 지난 것 같아."
"미안해. 나는 그곳에서 잘 지낼 줄 알았어. 메리가 못살게 굴었어?"
"그랬으면 다행이지. 나는 다시는 마법사들과 상종을 안 할거야. 그 사람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마들이야."
서슬퍼런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마 내가 아니고 메리를 생각하며 분노하고 있겠지. 불쌍한 클라렌스.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그곳에서 온갖 인체실험은 다 당한 모양이다. 당분간 괴롭히지 말고 맛있는 것 많이 먹이고 좋은 것만 보여주면서 잘 보살펴야겠다. 속이 상한다. 내 귀엽고 소중한 클라렌스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아내서 복수하고 말테다.
"그래도 다행인건, 그 인간들은 기초적인 생활력이 부족해서 제때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으면 알아서 멸종할거야. 그러니까 후원을 끊어줘."
그건 좀... 양쪽 제국의 실권자들이 거머쥐고 있는 길드가 내가 후원을 끊는다고 해서 무너질 것 같지는 않은데... 불쌍한 클라렌스. 온실에 가서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줄리에타의 차원이 다른 이야기도 들으면서 기운을 풀자. 손을 잡아끄니 순순히 따라온다. 에들턴은 분위기 파악이 끝났는지 조용히 문을 닫고 따라왔다. 온실에 들어서자마자 습기때문에 살짝 숨이 막힌다. 망토인지 모자인지 모를 고마운 것들을 내려놓고 온다는 게 깜짝 놀라서 그대로 하고 왔더니 금방 숨 쉬기가 편안해졌다. 안쪽을 들여다 보니 줄리에타는 대공비가 소트에서 데려온 시녀들에게 부채질을 시켜놓고 해맑게 웃고있다.
"빅토리아!"
"오랜만이예요 줄리에타. 그렇게 감쪽같이 날 속일 줄은 몰랐어요."
"미안해요. 루이스가 영애께 부담을 주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대공. 부탁하지도 않은 친절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줄리에타가 메리 소트를 어떻게 쳐냈는지에 대해 늘어놓는 영웅담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면서 옆에 부루퉁하니 서 있는 클라렌스의 입에 간식을 넣어줬다. 흐리멍텅하다가도 단 것이 입에 들어가면 활짝 피는 것이 재미있는지 줄리에타도 전투적으로 입에 넣어주기 시작했다.
"요새 루이스가 많이 피곤한 모양이예요. 빅토리아 건도 있고, 그 마법사도 있고..."
"저 때문에 고생이 많네요. 대공께서도 많이 바쁘시죠?"
"네. 대공비께서 도와주시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빅토리아는 내일이면 돌아가지요?"
"네. 전하께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아뢰야죠. 차노트가 얼마나 훌륭한지, 줄리에타가 이곳에서 얼만 중요한지도 빼놓지 않을테니 걱정 마요."
물론 말하면 피뇨르 남작이 울며 회장을 뛰쳐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 리클렌 백작님께서 달래러 가야 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거다.
줄리에타는 이제야 한시름 놓고 나와 산책이나 하려던 모양이었는지 슬퍼했지만 나는 행복하다. 슬픈것도 달콤한 것 앞에서는 무력했다. 쿠키를 집어먹으며 행복해했다. 물론 클라렌스의 입에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루이스가 에들턴 경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던데요."
"안돼요. 내 거예요. 못줘요."
"빅토리아. 에들턴 경은 제국 기사랍니다. 폐하의 것이잖아요."
흠흠. 에스메랄다가 시종처럼 부려먹으라고 주었으니 내 거다. 반드시 빼돌려서 제국의 동량으로 만들 것이다. 웃기만 하는 에들턴의 입에 마들렌을 집어넣었다.
마침 에들턴의 등 뒤로 뿌옇게 김이 서린 온실 유리벽 너머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노란색 옷으로 보아하니 소트의 사용인들이다. 사고 이후로 파란 옷을 입은 차노트의 사용인들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줄리에타도 보았는지 표정이 좋지 않다.
"대공비께서 무리하시네요."
"마지막 연회라며 크게 준비하신다는 것 같기는 한데... 저는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괜찮을 거다. 설마 독살이라도 하려고 들겠나. 멜린도 멍청한 사람은 아니니까. 줄리에타도 나와 대공비의 은근한 신경전을 눈치챘는지 입을 가렸다. 설마하니 마지막 날까지 공식석상이 아니면 얼굴 한 번 못 볼줄은 몰랐다.
"대공비께서 '너무 바빠 영애를 뵐 수 없는 점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전해달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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