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체면 따질 때가 아니다. 내 목숨을 지킬 사람이 한명 뿐인데 앓기라도 했다가는 그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샐리에게는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에들턴은 상경해 기사가 되기 전까지 귀족과 마주할 일이 전혀 없었는지 사양할 줄을 몰랐다. 점점 후덥지근한 공기가 몰려오는 가운데 마부가 말을 멈춰세웠다.
"리클렌 영애.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편한대로 해요."
앞서가던 에들턴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마차로 다가왔다. 제대로 살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옆에 있는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여차하면 대신 칼 맞으라고 하고 도망치라고 보낸 거니 잘 쓰겠습니다. 에들턴은 나무 밑에 말을 묶어놓고 정작 마차에는 못 들어와서 한참 머뭇거렸다. 발소리만 한참 들리다 만다.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샐리에게 살짝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에들턴 경.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요."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문은 못 열더니 올라타는 건 잘 한다. 샐리가 쪼르르 걸어와 내 옆에 앉자 문을 닫고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지나가는 비라고 해도 한시간은 기다러야 할 텐데, 풍문으로 들어온 에들턴은 말주변이 없어도 참 없는 사람이였다. 샐리가 귓가에 소근거리는 걸 어색하게 곁눈질하던 에들턴이 헛기침했다.
"실례지만, 리클렌 영애."
"네. 말씀하세요."
"리클렌 기사단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걸까. 하틴 기사단 사람들이 괴롭히나? 내가 도망치지 않게 잘 돌보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알버트 너... 그는 애꿎은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글쎄요. 저는 멀리서 훈련을 구경하거나, 호위를 받기만 해서 잘 모르겠네요. 하틴 기사단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알란타에서는 손에 꼽는건 확실하지요."
거짓말이다. 내가 아저씨들 훈련하는 사이에 뛰어들어서 알란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여성 기사가 될거라고 난리도 피웠었다. 그리고 내가 몸치라는 걸 알게되었지. 그날 이후로도 자주 숨어들어서 구경했다. 그것도 다 옛날 일이다. 열다섯 이후로는 프라우에 올라와 사교계에 몸담았으니까. 에들턴은 내 말을 듣고도 한참 대답이 없었다.
"기사단에서 무슨 일 있으셨는지요?"
"그런 건 아닙니다. "
"털어놓으셔도 괜찮아요. 어린 영애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답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겠지만 말이다. 그는 프라우와 멀리 떨어진 이 북부까지 와서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는 아시다시피 평민 출신이라... 지금은 어찌어찌 동기분들께서 도와주셔서 버티고 있습니다만, 언제까지나 수도에 있을 수는 없고 언젠가는 전출을 갈 테니까요. 그때도 제가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 들더군요."
"평민으로 기사가 되려는 마음을 먹었을 때 그 정도는 각오하셨어야지요."
"각오했습니다. 혈육 하나 남아있지 않아 어떤 협박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지만..."
뜸을 들인다. 대충 예상은 된다. 내 능력이 이정도 대우밖에 못 받고 사나, 자괴감이 든다. 차라리 무법지대라는 파트론이 이것보다는 낫겠다. 겠지.
"버틴다고 해도, 나중에 결혼하게 된다면 그들이 위험하겠지요. 국경 수비대 쪽은 인력난이 심해 차별이 덜하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으로 전출신청을 하는게 어떨까 싶은데 빈센트 경께 여쭤봐주실 수 있으신지요."
세상에. 미래의 소드 마스터... 당신은 정말 천사군요. 프란님의 화신인가요.
"그쪽은 그쪽대로 차별이 심하다고 해요. 아무래도 기사단에 들지 못한 자유기사들이 몰려가다보니, 그들끼리 파벌이 있다고 들었어요. 오라버니도 가문의 위세가 아니었다면 고생했을 거라며 진저리를 치셨지요."
"그렇습니까."
침울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불쌍하기도 하지. 본인이 태어나고 싶어서 평민으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능력까지 무시당하고. 어쩌겠나. 어디 돈 많고 능력 필요한 귀족 하나 낚아채 결혼이라도 하던가 해야지. 그런 영애가 누구 있던가. 많기는 한데 반란세력을 빼고 나니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 뿐이구나. 내실 튼튼한 왕당파중에 인재가 없어서 안달 난 자가 얼마나 있겠냐만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불쑥 올라왔다. 에들턴은 가라앉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다 머리를 쓸어넘겼다. 내 신분으로 어설프게 위로해봤자 약올리는 것 처럼 들릴테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애써 웃었다.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 죄송합니다, 영애."
고개를 젓고 커튼을 들춰 바깥을 쳐다봤다. 어느새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햇볕이 스며들었다.
"기사님, 이제 출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준비하죠."
에들턴은 말없이 마차에서 내려 말 위에 올라탔다.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샐리가 작게 한숨을 쉰다. 다행이도 차노트 성까지는 이제 서너시간 정도 남았다. 멀리 성탑의 끄트머리가 보인다. 그도 어느정도 마음이 정리가 됐는지 한결 편안한 얼굴로 마차에 다가왔다.
"도착하면 우선 머물 곳부터 마련하겠습니다."
"아뇨. 차노트 대공께서 해결해주실거라셨어요."
"그렇다면 곧장 성으로 가겠습니다."
"네."
에들턴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앞으로 말을 몰았다. 입 다문 채로 웃고만 있으면 누구도 평민인 줄 모를텐데. 어떤 사람은 평생을 연습해도 저렇게 웃지 못하는데 어쩜 저렇게 자연스러울까. 지금까지 아무도 후원하겠다 붙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누가 근처에서 훼방이라도 놓고 있는건가? 그렇다면 유력 후보는 돈 쓸 줄 모르는 노먼 뿐이구나.
늘어선 줄 앞에 멈춰서더니 그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빙긋 웃으며 정문으로 말을 몰았다. 등을 돌리고 힘차게 말을 모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 귀엽고 순진한 청년은 내가 챙겨야겠구나. 에스메랄다가 그래서 굳이 저 사람을 붙여서 보냈구나. 어쩔 수 없지. 내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 나라의 부국강병이 필요하다. 겸사겸사 파트론에 물도 먹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아가씨! 또 엉뚱한 생각 하고 계시죠?"
"아냐. 그냥 고민이 풀려서."
"정말이시죠?"
쓸데없이 눈치만 좋은 샐리를 밀어내고 창틀에 기댔다. 드디어 북부의 끝인 차노트 공작 직할령에 도착했다. 황가에서 뻗어나온 세 가문 중 하나 답게 웅장한 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주가 오갈 때나 열릴 것 같은 커다란 문이 열렸다. 한계선에서 경계를 서야 할 것 같은 기사들이 열을 맞춰 서 있다. 황녀도 아니고 심부름꾼인데 적당히 할 것이지. 하여튼 차노트는 적당히를 모른다.
에들턴은 살짝 당황한 듯 싶더니 말을 몰고 기사들의 앞으로 갔다. 그가 말에서 내리자 기사들이 뭐라 말을 전했다. 턱을 괴고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평민이라고 무시하면 혼낼 준비는 끝났다. 다행이도 그는 무사히 돌아왔다. 벅찬 듯 한 얼굴로 창가에 다가왔다.
"황녀 전하의 대리인이자 친구인 만큼 극진히 모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잘 됐네요. 그럼 들어가도록 해요."
제발 그런 대접 안 해도 되는데. 떠나는 그날까지 지루한 의전 하다 금쪽같은 시간은 다 흘려보내겠구나. 하지만 남남인 내가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쩌겠나. 기쁘게 받아들여야지. 내가 언제 이런 취급을 당해보겠나. 차노트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영주성으로 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 말은 죽어도 듣지 않을 차노트 둘에 날을 세우고 덤빌 대공비, 제 시댁은 신경도 안 쓰고 꼬리를 흔들 줄리에타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온다. 창가에 붙어 말을 몰고 있는 에들턴을 한번 쳐다봤다. 훨씬 진정이 된다.
선물이 들어있는 상자를 고이 샐리에게 안겨주고 에들턴을 앞세웠다. 형식을 따지기로 유명한 소트 출신이 집안을 꽉 쥐고 있으니 그에 맞춰 고전적인 디자인에 보석을 치렁치렁하게 단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가장 상석이 비워져있었다. 에스메랄다에게 하사받은 망토가 저 자리에 앉을 권한까지 내주었다. 당당하게 대공이 앉았을 자리에 앉아 모두를 훑었다. 순간 줄리에타와 눈이 마주쳐 애써 시선을 돌렸다.
"황녀 전하를 대신해 온 저를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께서도 기뻐하셨을 거예요."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에스메랄다가 꼭 읽어주라며, 꼭 자기 흉내를 내서 읽으라며 건네준 연설문을 펼쳐들었다.
"시조 오버다이어 황제 때부터 북방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하틴의 핏줄 차노트여. 지난 한 해도 제국을 위해 노력했음을 황제 폐하와 나 또한 잘 알고 있노라. 평년과 같이 내가 직접 그대들을 치하하고자 하였으나 정식으로 후계자에 오른 몸. 섣불리 자리를 옮길 수 없게 되었음을 고려해 나의 가장 커다란 우군이자 단 하나뿐인 친우를 그대에게 보내 예를 다하고자 한다. 부디 거절치 말고 받도록 하라."
교지를 잘 접어 대공가의 집사에게 건넸다. 그는 두 손을 받아들어 대공에게 전했다. 차노트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감동에 젖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교지만 쳐다보는 찰나에 냉랭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 먼곳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네."
"대공비 전하께서 걱정해주신 덕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멜린 차노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가 백작가의 혼처도 정해지지 않은 영애라 해도 황녀의 대리인인데 저렇게 고고하다니. 내 권력이 무섭지 않은 사람이 몇 있을테지만, 감히 황실에 끈을 댄 대공가에서 이런 푸대접을 받아 볼 줄이야. 상관없다. 내가 오늘 만나러 온 건 차노트의 실권자가 아닌 그냥 대공이니까. 에들턴이 헛기침을 하니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영애 앞에서 추태를 부렸군. 만찬까지 시간이 넉넉하니 방에서 잠시 쉬고 있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대공전하."
취소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 집무실에 돌아가 교지를 액자에 넣어 걸어놓고 나야 진정할테다. 권력을 거머쥔 대공비도 편안하지만은 않겠다. 저 자들을 어떻게 지금까지 휘어잡고 있었나. 그녀는 애써 화를 참으며 부채질했다.
"줄리에타. 그대에게 안내를 부탁하지요."
"네, 대공비 전하."
줄리에타를 따라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대공비의 신경질 섞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못들은 척 줄리에타에게 걸음을 맞춰 나란히 걸었다.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빅토리아!"
"저도요. 그간 잘 지냈어요?"
"물론이죠! 대공가 식구들과 사용인들은 모두 친절하거든요. 여기예요."
줄리에타가 멈춰서자 샐리가 문을 열었다. 문 밖에서 언뜻 봐도 볕이 잘 드는, 좋은 방이다. 에들턴은 차마 여자가 머물 방에까지 들어올 용기는 없었는지 문 앞에서 등을 돌리고 섰다. 우리가 들어가자 샐리는 조용히 밖에서 문을 닫았다.
"그런데, 차노트가 아닌 사람도 꽤 보이네요."
"대공비 전하의 친정 식구들이세요. 차노트는 북방을 지키느라 일손이 모자라서 도와주신다네요."
아무리 꽃밭을 거니는 정신이라고 해도 이 상황은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자신이 나중에 휘어잡아야 할 가문인데 엉뚱한 사람들이 유세를 부리고 다니는 게 거슬리지 않을 리가 없다.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소트 남작께서 대공비 전하를 많이 아끼시나봐요."
"글쎄요... 머무는 동안 편지 한 통 오는 걸 못 봤는걸요."
"설마. 줄리에타가 잘못 아는 거겠죠."
"그렇다면 좋겠지만..."
넘처나는 열정을 주체 못 해서 늘 나를 괴롭히던 줄리에타가 시름에 빠져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피뇨르 남작이 아들보다 아끼는 딸이니 보채면 해결해주겠지만 예의상 어깨를 토닥였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요.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줄게요."
"빅토리아..."
감동도 잠시. 닫힌 창문에서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줄리에타가 쪼르르 달려가 겁도 없이 창문을 열었다. 이제는 짹짹이라고 불러도 창피하지 않을 만큼 익숙해진 서신 마법이 내게 날아왔다. 부담스러울 반짝거리는 줄리에타의 눈길을 피하며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 앉은 새를 귓가에 가져다 댔다.
<안녕 비키! 클라라 보내줘서 고마워! 영감님한테 보고하자마자 너한테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법 분석을 마쳤어. 곧 해주 마법도 개발될거야. 오늘도 위대하고 자애로우신 빅토리아 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수도에서 만나!>
짹짹이는 힘차게 푸드덕거리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죽을 운명은 아니었구나. 죽는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든 살려놨겠지만.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줄리에타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세상에! 빅토리아, 아는 마법사 있어요? 너무 멋지다. 나도 마법으로 편지 받아보고 싶어요!"
"글쎄... 남작께 부탁드려보는게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예요! 아버지께 목소리가 듣고싶다고 편지하면 보내주시겠죠?"
글쎄. 아마 바로 휴가를 내고 차노트로 달려올지도 모른다. 벌써 기분이 풀려 헤실거리는 줄리에타의 어깨를 두드렸다. 당신의 임무가 막중합니다. 직접 말할 수는 없지만, 평소 하던 대로 해 주세요. 노크소리와 함께 하녀들이 들어와 짐가방을 끌고 들어왔다. 눈을 반짝이며 줄리에타가 말했다.
"차노트 성과 어울리는 드레스로 갈아입어야겠어요!"
"좋은 생각이예요."
치노트는 옛 왕조의 여름 별장이었던 모랑트 성을 차지했다. 그만큼 고풍스럽고, 이제는 유행에 뒤쳐진 옛 양식이다. 유감스럽게도 황도 사교계에서 십년 가까이 버틴 내게 그런 드레스는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어디 가서 꿇리지 말라며 넣어주신, 대대로 물려받아 시집올 때 가져오신 장신구가 있으니 한숨 돌렸다. 내 처참한 드레스들을 보고 절망하던 줄리에타는 내 옷을 제 몸에 대 보더니 다시 희망찬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제 드레스가 딱 맞겠어요!"
"그런 민페를 끼칠 수는 없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빅토리아가 돌아갈 때 같이 가려고 했었거든요. 드레스는 넉넉해요."
그렇게 말하며 제 방으로 끌고가 정열적인 붉은 드레스를 꺼내왔다. 숨막힐 정도로 코르셋을 조여야 할테니 모야트 풍 식사는 다 틀렸다. 행복해하는 줄리에타와 그 시녀, 그리고 샐리를 쳐다보며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귀족 여성으로 태어나 하는 수 없이 무위도식하며 내게 이득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냐 하면, 바로 다른 가문 기사단의 훈련을 먼 발치에서나마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내 앞에서 강아지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줄리에타가 부담스럽지만, 그 시선을 피한다는 핑계로 차노트 기사단을 살필 수 있다.
"리클렌 영애. 소트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소트 영애? 어느 영애를 말하는거니?"
"셋째이신 메리 영애십니다."
그 말에 줄리에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평소처럼 화사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메리 소트라. 쥐고 있던 부채를 줄리에타에게 밀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들어오시라 하지 않고 뭘 하니?"
내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분명 줄리에타의 시녀는 방 안에 있는데. 문을 연 장본인은 메리 소트의 시녀였다. 메리 소트는 의자가 둘 밖에 없는 티 테이블 앞까지 걸어오고 나서야 인사했다.
"처음 뵈어요, 빅토리아 영애. 소트 남작가의 메리예요."
"네, 소트 영애.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초대받지 못했지만 꼭 영애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찾아왔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해도 괜찮을까요?"
실례가 되는 걸 알면 찾아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체면을 생각해 무턱대고 쫓아내지 못하는 걸 노리고 쳐들어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딱 일년만 일찍 이랬다면 마시던 차를 뿌리고 쫓아냈겠지만, 지금의 나는 프라우 최고의 레이디다.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웃었다.
"물론이죠."
내 대답에 소트는 줄리에타를 쳐다봤다. 눈길 한 번 안 주던 줄리에타가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쫓아내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풍문으로 들어온 소트의 행태를 떠올리니 착각만은 아닌 것 같다. 저 순하던 눈에 점점 독기가 차올랐다. 소트의 시녀는 상황을 타개해 볼 생각도 없는지 요지부동이니, 이런 상황이 너무 오랜만이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샐리가 너무 불쌍하다.
"거기 너. 무엇 하고 있어. 가서 의자를 가져오지 않고."
"... 예, 영애."
영 내키지 않아 하면서 종종걸음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지긋이 쳐다봤다. 가문이 가문이라고, 아랫것들도 예의를 모르는구나. 하루만 더 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은 내가 노는 걸 보고싶지 않은 모양이다. 샐리에게 살짝 고갯짓하자 티세트를 하나 더 내왔다.
"영애께서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 제 말동무가 되어줄 사람이라면 줄리에타가 있는데."
"고모님께서 루이스 오라버니가 성을 비우신 동안 피뇨르 영애가 외로울까 걱정하셨답니다. 그래서 먼 올랑트에 있던 저를 부르셨지요."
"대공비께서 걱정하시는 영애는 제가 아는 줄리에타가 아닌 모양입니다."
줄리에타는 혼자 남는다면 그날 기분에 따라 내 얼굴이나 차노트 경의 얼굴을 수놓으며 하루를 보낼 사람이다. 곁에 사람이 없다고 외로워 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가여운 줄리에타. 태연하게 부채를 부치며 대꾸했다.
"우리 공자님은 제가 혼자있는 걸 안타까워하니까요. 차라리 수도에 있는 걸 더 좋아할 거예요. 빅토리아가 저와 함께해주는 걸 알고 정말 좋아했어요."
"차노트 경이 그렇게 자상한 분인 줄은 몰랐네요."
"좋은 분이예요."
언제 화가 났는지 모를 만큼 행복한 얼굴이다. 좋겠네, 줄리에타는. 둘이 신경전을 하든 말든 고개를 돌려 바깥을 쳐다봤다. 블론드, 진저가 넘쳐나는 사람들 속에 콩알만한 까만 머리가 보였다. 에들턴인가. 그가 나를 볼 수 있을리는 없지만 손을 흔들었다. 에들턴은 검을 휘두르는 것도 잊고 멈춰서있다 차노트 기사단의 기사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확정되기는 했지만, 아직 정식 서임 전인 기사가 한눈을 팔다니. 그는 검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 잠깐, 내가 보인건가? 저쪽에서 여기가? 말도 안돼.
"그러고보니 이곳에 약혼한 사람은 저 뿐이네요. 빅토리아야, 리클렌 공자님들이 아쉬워하셔서 미뤄지는거라지만 소트 영애는 의외네요."
"아버님께서 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 혼처를 구해오신다 하셨으니, 저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요."
"헐뜯으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저 영애같은 아름다운 분이 아직이라는 게 놀라웠을 뿐이예요."
"오해하지 않았으니 걱정마세요. 아버님께서도 올랑트보다는 대공전하가 지키는 모랑트가 더 안전할거라 여기셔서 보내신거니까요."
당신 고향에서 그런 소리 했다가는 다음날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을텐데. 안타깝게도 이곳은 원칙주의자 차노트가 지배하는 모랑트다.
"그러고보니, 빅토리아 영애께서 차노트에 오신 것을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연다셨어요."
"아... 그러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황녀 전하께서 오셨을 때도 하던 행사니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빅토리아."
파티라고는 아마 프라우제 때만 할 게 분명한 차노트령에 귀한 손님이 왔으니, 파티를 못해서 서러울 대공비가 얼마나 기쁠까. 그 와중에 차노트와 소트의 기싸움을 보며 두통에 시달리던 에스메랄다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이 짓을 또 할 줄이야.
"어쩌죠. 영애는 시녀 하나만 데리고 오셔서 에스코트 해줄 분이 없네요."
"조만간 영지에서 해리 오라버니가..."
"아뇨! 곧 칼도 차노트에 온다고 했어요. 빅토리아도 칼이라면 자주 만났으니 불편하지 않을거예요."
둘이서 누가 나를 에스코트해야 하는지 싸우는 걸 내버려두고 다시 테라스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에스코트 해 줄 남자를 가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성격이나 얼굴, 배경 중에 둘은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리 소트는 올랑트에서도 벽지에 자리잡은 남작가면서 성격도 개차반이다. 얼굴은 뭐, 반반하다. 칼 피뇨르라하면 소랑트의 유명가문인 피뇨르 남작가의 후계자면서 리클렌의 우방이니 배경이야 적당하다. 하지만 그간 알아온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그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떠오르고 만다. 그 작자는 누가 제 속을 긁으면 나는 잊어버리고 장갑을 집어던질거다. 얼굴은 풍채 좋은 피뇨르 남작과 판박이 되시겠다.
하, 아무리 모랑트 이 북쪽 벽촌까지 왔다고 해도 이렇게 인물이 없나. 절로 까만 머리에 시선이 갔다. 평민이라 배경은 없어도 알란타 최고의 미남이라고 불리는 황자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미모에, 교양은 또 얼마나 넘치는가. 게다가 내가 없으면 분명히 연회 내내 벽에 붙어있다 돌아가게 될거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인맥이 제일 급한 건 그 자신인데. 에스메랄다가 무서운 얼굴로 말한다. "책임져." 네. 제가 책임져야죠.
"있어요."
"네?"
둘 다 나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나는 둘의 시선을 각오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에스코트 해 줄 사람, 있어요."
파트론 제국의 연회도 이정도는 아니다. 충격적일 정도로 감정을 격앙시키는 노래와 힘찬 춤을 보고 에들턴은 조금 넋을 놓은 것 같다. 내가 미안하다. 에스코트만 아니었으면 오늘도 그날처럼 연병장에서 검을 휘둘렀을텐데. 내가 너무 미안합니다. 그래도 여기에서 넋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경?"
"아,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이라고 왈츠를 안 추는 건 아니예요."
이제야 진정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식은땀마저 흘릴 정도로 긴장했었나보다. 오라버니들이었다면 주저없이 닦아주었겠지만 차마 앞길 창창한 남자의 혼사길을 막을 수가 없다. 아직도 망나니 시절을 못 잊은 샐리가 칠칠맞게 어디서 이상한 걸 묻혀올까 걱정하며 챙겨준 손수건을 내밀었다.
"좀 더 여유있는 곡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테니 걱정마세요."
"예, 영애."
"그리고... 제 곁을 떠나지 마세요."
내 목숨이 아쉬운 게 아니라 당신 목숨이 위험하니까. 감히 황녀 대리의 자리를 꿰찬 평민이 너무 미울거다. 줄리에타의 시선이 닿지 않을 기둥 옆에 서서 재미있는 연회장을 구경하고싶었다. 그런데 내 옆에 있는 이 남자의 미모가 너무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모였다. 그 시선은 대부분 소트 남작가 사람들이었다.
"아는 것이 적어 잘 모르겠지만, 차노트가 아닌 분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모르는 척 하세요. 에들턴 경께는 위험합니다."
"하지만..."
"황녀께서 보낸 사람은 리클렌 백작가의 빅토리아 영애지, 하틴 기사단의 리스 에들턴 경이 아닙니다."
당신 외모는 내 취향이고 에스메랄다의 취향이니 부디 함부로 나서다 아까운 목숨 마치지 마소서. 키는 한참 못미치지만 그 앞을 쓱 막고 슬슬 다가오는 귀족들 앞에 섰다.
"어머. 일버른 영애! 요새 파티에서 안 보이시더니 차노트에 계셨네요?"
"네. 감사하게도 대공비께서 불러주셔서 얼마 전부터 머물고 있었답니다."
"너무해요. 프라우에서 유명하던 아름다운 영애는 전부 올랑트에 모였네요."
"그정도까지는 아니예요..."
줄리아 일버른은 수줍어하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미소지었다.
"영애께서는 늘 오메르드 공자와 함께 계시더니, 오늘은 혼자 오셨나요?"
"황녀전하께서 호위를 붙여주셔서 편안하게 왔지요. 에들턴 경. 이분은 일버른 남작가의 줄리아 영애예요."
에들턴을 돌아보며 가만히 있으라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그는 태연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보시다시피 제 호위로 오신터라 하는 수 없이 에스코트를 하실 수밖에 없었지요."
전혀 믿겨지지 않지만 내가 말하니 그렇게 알고 있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니. 일버른 주제에. 에들턴의 팔에 손을 얹고 바람이 잘 부는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이쪽에서는 망나니 적 나를 잊지 못했을테니 이정도 일탈은 괜찮겠지. 그리고 이 고지식한 남자는 테라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나를 마주보고 섰다.
"설마 여기에 들어오는 간 큰 사람은 차노트 령엔 없을거예요."
"피뇨르 영애가 굉장히 용기있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줄리에타는... 괜찮아요."
피뇨르가 감히 리클렌을 배신할 이유도 없거니와 마리아가 무서워서라도 나한테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거다. 그 이전에 줄리에타는 나의 열렬한 팬이다. 혹시 해리 소트가 온다면 모를까. 에들턴의 어깨 너머로 여러 얼굴이 기웃거린다. 버틀러, 멜러스, 조르주... 작손의 부하들이 많이도 모였다. 내가 일어날 기미만 보이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춤을 추자고 할 것 같다. 다행히도 차노트는 느림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이니 행진곡 수준의 힘찬 노래만 이어졌다. 어떻게든 눈에 띄겠다고 이 정신나간 선곡에 맞춰 춤을 추는 저 영애들을 보고있자니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리클렌 영애. 실례지만 바로 돌아가지 않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귀족들 틈에 끼어 눈치를 키웠다 해도 아직 생리까지는 이해하지 못해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에스메랄다가 뭐라 얘기하며 보냈는지는 몰라도 꼭 돕고싶다는 눈치라 귀엽다.
"알면 경께서는 평생 제게 매여야 하는데 궁금하십니까?"
"영애께서 아군 하나 없는 이곳에서 황녀전하를 위해 연약한 몸으로 앞장서시는데 황실에 봉사하는 몸으로서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저 또한 황실에 은혜를 입은 몸. 영애의 큰 뜻을 돕고 싶습니다."
내 속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곧게 말하는 에들턴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원하는 것을 쫓는 모습이, 꼭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기억속의 나 같아서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럼 맹세를 하지요. 황녀전하와 저도 한 약속이랍니다."
"기꺼이 하겠습니다."
몸을 한껏 낮추고 고개를 숙인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에스메랄다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주는게 고마워 손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세요. 에스메랄다 전하가, 내가 죽을 위기라고 해도 절대 희생하지 마세요."
리스 에들턴은 칠흑같은 머리칼이 빛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두어번 깜빡이자 빛은 마법처럼 사라졌다. 줄리에타가 루이스 차노트의 팔짱을 끼고 나를 향해 걸어온다. 대공비의 마뜩찮은 시선을 특유의 밝음으로 넘기며 당당하게 걷는다. 나도 어쨌든 에스코트 해 줄 남자가 필요하니 에들턴을 쳐다봤다. 그는 아직도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아, 그리고 그 손수건은 잘 간직하는 게 좋겠네요."
마땅한 연미복이 없어 챙겨온 기사단 정복을 입은 그는 곱게 접어 보물처럼 챙겼다.
"빅토리아! 오늘도 너무, 너무 아름다워요!"
"고마워요. 줄리에타와 차노트 경은 오늘도 그림처럼 잘 어울리네요."
이렇게 칭찬하면 줄리에타는 활짝 웃으며 루이스 차노트에게 매달린다. 훌륭한 기사답게 기우뚱거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약혼녀를 받쳐주며 그는 연회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께서 찾으십니다."
"감사해요."
"서재에 계십니다."
새 곡이 시작됐다. 지금까지를 생각하면 장송곡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느린 곡이었다. 지금까지 높은 구두와 발뒷꿈치를 걱정하던 영애들이 하나둘 남자의 손을 잡고 나섰다. 그 소란을 틈타 에들턴의 팔에 손을 얹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줄어든 소음에 귀가 간지러워졌다. 에들턴은 그새 넓은 차노트 성의 길을 외웠는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었다.
"처음 귀족사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왜 환한 낮을 두고 밤에 돌아다니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창밖을 주시하며 걸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인 차노트 령은 수도와 마찬가지로 드문드문 켜져있는 붉은 등과 마차나 다닐 대로를 밝히는 마법등 뿐이었다.
"영애와 함께하면 늘 배우는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앞으로도 제 호위 잘 부탁드려요."
그는 처음 만난 날처럼 환하게 웃었다. 속으로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쓸모있는 패가 그리웠으면 내가 이렇게 감동할까. 에들턴은 헛기침을 하고 먼저 서재 앞에 섰다. 그리고 어쩐일인지 경비 하나 없는 문을 열었다. 창문이 열려있는지 훅 불어오는 바람에 피냄새가 났다. 촛불 하나 없는 캄캄한 방 안에 백작이 심각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 앞에는 죽었는지 미동도 없이 쓰러진 사람이 있다.
"깜짝 선물이 과하시네요, 대공전하."
"생각보다 태연해 실망했네."
대공의 맞은편에 서서 쓰러진 자를 쳐다봤다. 당연히 누구 사람인지 알 수 있을 만 한 것들은 숨겼겠지만,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대공의 검을 들어 이곳저곳을 들췄다.
"아. 역시 감출 수가 없네요. 이래서 평화로운 올랑트란..."
"영애도 그렇게 생각하지? 누가 보더라도 소트 남작가가 보낸 것이 분명하니..."
"하지만 이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잡아뗀다면 황제폐하께서도 어쩔수 없이 덮어야겠지요."
"역시..."
여간 귀찮게 된 게 아니다. 그 순간 괘종시계가 울렸다. 뎅, 뎅... 열두번이 울리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벌써 머물기로 한 일주일 중 이틀이 지났다. 사흘이 되는 순간 맞이한 가장 심각한 문제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묵묵히 서 있던 에들턴이 나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낯익은 복장이군요. 영애의 근처에서도 몇명을 보았습니다."
미친 것 아니야? 어떻게 황녀의 대리인에게 암살자를 붙일 생각을 하는 거지? 대체 고트 공작가에서는 관리를 하기는 하는 걸까? 어쩐지 지난 생애 동안 그 강골이라던 차노트 공작이 비명횡사해 이상하다 싶었다.
"세상에. 그럼 지난 이틀동안 경은..."
"영애께서 공식활동을 하는 동안 쉬었습니다."
어쩐지... 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으면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사라지더라니. 내가 그것도 모르고 이 사람한테 에스코트를 부탁했구나. 미안해서 살짝 고개숙였더니 그는 그저 웃었다.
"감히 저까지 노리는 걸 보니, 이 작자들이 곧 난을 일으킬 모양입니다."
"미안하네. 우리 가문 때문에 영애가 고생이군."
"폐하와 황녀 전하를 모시는 사람들 끼리 뭉쳐야지요. 우선은 제가 미끼가 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건국왕의 핏줄인 대공보다는 한낱 백작가의 딸이라면 그들도 부담이 덜하고, 황녀에게 경고하는 의미로도 좋을 것이다. 대공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당분간은 조금 늘어진 척 하며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녀봐야겠다. 내 성격을 알고있는 차노트 사람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안내해줄터다.
"영애."
"그동안 에들턴 경은 돌아다니면서 최대한 소트가 꾸미는 일에 대해 조사해주세요. 저는 그런 건 잘 모르니까요."
"위험합니다. 옆에 있지는 못하더라도 근처에 있어야..."
불안해하는 에들턴을 별종을 본다는 듯 대공이 쳐다본다.
"경. 귀족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목숨 위협을 받는답니다. 작게는 후계 경쟁자에서부터 크게는 적대 세력에게 위협받지요. 이정도면 그리 심각하지도 않아요."
그는 고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가 어떻게든 납득한 듯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차노트 대공은 정색을 하고 눈길을 뗐다.
"설마 평민이었을 줄은 몰랐네."
"귀족을 어떻게 믿고 데려오나요."
역시 내가 봐둔 사람 답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귀족상이다. 오늘 온다더니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해리 소트와는 딴판이다. 생긴건 둘째 치더라도 마음이라도 곱게 써야 영지민들이 귀족 취급을 해 줄텐데, 여섯의 삶 동안 미래의 남작부인이 전부 달랐던 걸 보면 글러먹은 인물이다.
"그래도 위험한 건 사실이지 않나."
"괜찮습니다. 제가 오메르드 영애와 친한 건 아시지요? 덕분에 여러가지 물건을 가지고 있지요."
"마법이라면 믿을 수 있지. 그럼 영애만 믿고 있겠네."
그는 제 망토를 벗어 시체를 덮었다. 실크로 만든 고급 망토가 겨우 덮개로 산화했다. 대공은 그제야 용건을 기억해냈는지 소파를 권했다.
"일단 앉지. 할 이야기가 많으니 말이야."
"아뇨.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오늘은 제 용건만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조만간 루이스 경을 통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너무 커 엄지손가락에 겨우 끼고 있던 반지를 뽑아 테이블 위로 밀어 건넸다. 대공에게 잘 보이도록 보석과 세공 쪽으로 돌렸다. 그는 우아하게 반지를 집어들었다. 다만 어찌나 뻣뻣한지 경박하지 않으려 애쓴 티가 역력하게 났다. 놀랄 법도 하다. 대공이 작위를 이어받기도 전에 사라진 대공가의 보물이다.
"황녀 전하께서 보내신 물건입니다. 성의를 보인다면 더 큰 은혜를 내려주신다셨지요."
바보같은 차노트는 제 살을 지키기보다 제국을 지키는 것을 중시해 시조의 영광스러운 유품을 많이 잃었다. 그중 하찮은 것들 상당수를 소트에서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였나. 그 딱딱한 차노트 대공이 흥분해서 반지를 이리저리 살핀다.
"대답은 편하신 때 주세요. 그것과 상관 없이 이번 건은 도우라셨으니, 눈에 띄지 않게 에들턴 경을 부리시면 됩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에들턴을 무시하려니 가슴이 아프다. 차노트 대공이 심각한 기색으로 반지를 한 번, 에들턴을 한 번 쳐다본다. 그리고는 그가 입은 정복을 믿기로 결심한 것 같다.
해리 소트. 그의 가문은 본디 올랑트 변방의 보잘것 없는 영지 뿐이었으나, 조부때 부터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돈으로 상계를 쥐어흔드는 가문이다. 그 부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재산의 출처가 궁금해 백방으로 수소문해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래도 단연컨데 세계 최고라 말할 수 있는 고트 공작가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대놓고 질타할 수는 없다.
분명히 대대로 부자였다는 자들이 어째서 저리도 졸부같이 행동하는가. 어쩌다 끌려왔는지 불쌍할 정도로 안쓰러운 몰골을 하고 있는 제이슨 고트에게 살짝 고개숙여 인사했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나를 지긋이 쳐다보다 깜짝 놀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소트 공자. 영애께 오신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기억해주시다니, 정말.... 정말..."
무례하게 손을 덥썩 잡는다. 그 손에는 정말 더없이 화려한 장갑이 있었으니 불쾌함은 덜했다. 이 작자의 뒤에서 넋을 놓고 있는 고트 공자는 저 화려한 옷도 제 몸처럼 어울리는데, 이 인물은 성은 비슷하지만 전혀 아니다. 제발 조금은 자중해주었으면 하는데. 고트 공자는 등 뒤의 에들턴 경이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손을 놓았다. 잠시 정원에 나가 시녀에게 꽃을 한아름 안겨 돌아온 메리 소트가 활짝 웃었다.
"어머, 오라버니! 왜 이리 늦으셨어요?"
"미안하구나. 프라우에 들러 제이슨을 데려오느라 늦었구나."
"아! 고트 공자님!"
어쩐지 고통스러워 보이는 제이슨 고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로 결심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고트 공자. 소피아는 요즘 어떤가요?"
"누님은... 늘 건강하시지요."
흐릿한 눈빛으로 지나가듯 중얼거리고는 차마 소트 남매를 보기 힘든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에들턴이 작게 속삭였다.
"아마 만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제 기억대로라면 우리가 차노트에 도착했을 때 훈련기간이 끝났을텐데, 지금 도착하려면 그날에 프라우에서 출발해야 겨우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나."
알고 보니 그의 눈 밑이 새카매보이는 것도 같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해리 소트는 버리고 떠나갔다. 곧 에들턴도 대공에게 불려갈테니 이제 이 원대한 꿈을 가진 남매 사이에서 홀로 고통받아야한다.
"소트 공자님은 고트 공자와 친하신가봅니다."
"아, 예. 아무래도 같은 올랑트에 살기도 하고, 상계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보니 친목을 다질 기회가 많지요."
유감스럽게도 내가 알기로는 제이슨 고트는 가업을 잇는데는 관심이 없어서 작위만 이어받을 것이라고 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해리 소트는 제 인맥을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오라버니. 제가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되었어요?"
"물론 함께 왔단다. 대공께 부탁드려 오늘 밤 만찬 후에 보여주마."
나는 잊은 채 둘이서만 다정하던 남매는 대공에게 인사해야 한다며 해리 소트가 떠나는 것으로 끝맺었다. 에들턴의 강권을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며 요란하게 사라졌다. 에들턴도 없는 정원에서 무얼 보며 즐거워해야 하는걸까.
"차노트의 음식은 이국적이여서 늘 즐겁지만, 오늘 만찬은 더 기대되요!"
"공자께서 무얼 가져오셨기에 그리 즐거우신가요?"
"비밀이예요. 아, 영애는 프라우에서 오셨으니 벌써 알고 계시겠네요."
요새 프라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조금 시들해지기는 했지만, 역시 인형극이겠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열풍을 피해 이곳까지 왔는데. 이것도 다 내 운명인가. 하긴 도망쳐서 괜찮아질 운명이었다면 여섯번이나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각오를 해 둬야 겠다.
"그것을 말하시는거라면요. 저는 관심이 없어서 주의깊게 본 적은 없어요."
"어머. 그럼 잘 됐네요! 이번에 고트 공작가에서도 공연을 했다는 마법사를 초청했으니까요."
"소트 남작가의 재력이 제국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한다더니, 정말 대단하네요."
각오해봤지만 다시 그걸 본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올라온다. 어떻게든 메리와 연락해서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날 힘들게 하는 사람 중에 메리가 둘이나 있구나.
"저, 영애. 대공가에 봉사하는 마법사가 어디에서 머물고 있는지 아세요?"
"당연하죠. 서쪽 탑을 혼자서 전부 사용한다고 들었어요. 무슨 일인데요?"
순순히 알려주는 모양새가 그 마법사라는 작자의 성격이 이상하거나, 대공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만날 수 없는 사람이겠다. 소트 영애는 역시 연기에는 재능이 없는지 궁금하지만 애써 아닌 척하며 새침하게 질문한다.
"제 친구인 메리, 오메르드 영애에게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날이 다가와서요."
"너무 아름다워요. 저도 그런 친구가 생기면 좋겠어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아련하게 쳐다본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문이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나의 구원자 피뇨르 영애가 뛰어들어왔다.
"어머! 방금 듣고서야 생각났어요. 차노트에 도착하고 얼마 뒤에 영애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편지하는 걸 깜빡했네요."
"괜찮아요. 줄리에타는 제 친구니까요."
혼자서 감동에 벅차 어쩔줄 몰라 하다 소트와 시녀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지 겨우 손만 꼭 잡고 고개를 마구 흔들어댄다. 피뇨르 남작가의 피가 어디 가지는 않았는지 손아귀 힘도 여간이 아니라 슬슬 아프다. 웬만하면 제 동생에게 찾아가 듣던대로 감동에 젖은 연설을 늘어놓았으면 좋겠는데.
"고트 공자와는 인사하셨나요? 제가 잘 말해뒀는데."
이곳 저곳 친한 척 하는 것이 취미이자 정말 친구가 많은 줄리에타가 벌써 고트에까지 손을 뻗쳤나보다. 어쩐지 그 말 짧다던 제이슨 고트가 제대로 말을 하더라니.
"많이 피곤해보여서 소피아의 안부만 물었어요. 그럼 서쪽 탑으로 안내좀 해줄래요?"
"물론이죠! 차노트 성의 길은 완벽하게 꿰고 있어요."
보통은 길 같은 것 외우지 않는데, 줄리에타도 참 특이한 귀족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좋다고 쫓아다녔겠지.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줄리에타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는 소트 영애의 눈이 흔들린다. 아무리 견제를 하려고 해도 상대가 저렇게 마이페이스라면 지칠거다. 안타깝다. 그냥 차노트를 포기하면 좋을텐데.
"그럼 저는 이만."
벌써 한참 앞서가던 줄리에타가 갑자기 몸을 돌려세웠다.
"그런데, 차노트 령의 마법사님이 누군지 아세요?"
"아뇨. 설마 연락용 마법도 못 쓰는 분은 아니시죠?"
"그건 아니고... 조금..."
"차노트라면 아르카나 학파의 마법사를 고용했죠? 어떤 사람일지 잘 알 것 같아요."
줄리에타의 표정이 미묘하다. 아닌가? 그럼 대체 어떻길래. 마법사가 머무는 탑인데도 아무런 마법 없이 계단을 빙빙 돌아 올라갔다. 이제는 정말 죽을것 같아 벽을 짚은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리클렌 영애.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편한대로 해요."
앞서가던 에들턴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마차로 다가왔다. 제대로 살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옆에 있는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여차하면 대신 칼 맞으라고 하고 도망치라고 보낸 거니 잘 쓰겠습니다. 에들턴은 나무 밑에 말을 묶어놓고 정작 마차에는 못 들어와서 한참 머뭇거렸다. 발소리만 한참 들리다 만다.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샐리에게 살짝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에들턴 경.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요."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문은 못 열더니 올라타는 건 잘 한다. 샐리가 쪼르르 걸어와 내 옆에 앉자 문을 닫고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지나가는 비라고 해도 한시간은 기다러야 할 텐데, 풍문으로 들어온 에들턴은 말주변이 없어도 참 없는 사람이였다. 샐리가 귓가에 소근거리는 걸 어색하게 곁눈질하던 에들턴이 헛기침했다.
"실례지만, 리클렌 영애."
"네. 말씀하세요."
"리클렌 기사단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걸까. 하틴 기사단 사람들이 괴롭히나? 내가 도망치지 않게 잘 돌보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알버트 너... 그는 애꿎은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글쎄요. 저는 멀리서 훈련을 구경하거나, 호위를 받기만 해서 잘 모르겠네요. 하틴 기사단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알란타에서는 손에 꼽는건 확실하지요."
거짓말이다. 내가 아저씨들 훈련하는 사이에 뛰어들어서 알란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여성 기사가 될거라고 난리도 피웠었다. 그리고 내가 몸치라는 걸 알게되었지. 그날 이후로도 자주 숨어들어서 구경했다. 그것도 다 옛날 일이다. 열다섯 이후로는 프라우에 올라와 사교계에 몸담았으니까. 에들턴은 내 말을 듣고도 한참 대답이 없었다.
"기사단에서 무슨 일 있으셨는지요?"
"그런 건 아닙니다. "
"털어놓으셔도 괜찮아요. 어린 영애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답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겠지만 말이다. 그는 프라우와 멀리 떨어진 이 북부까지 와서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는 아시다시피 평민 출신이라... 지금은 어찌어찌 동기분들께서 도와주셔서 버티고 있습니다만, 언제까지나 수도에 있을 수는 없고 언젠가는 전출을 갈 테니까요. 그때도 제가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 들더군요."
"평민으로 기사가 되려는 마음을 먹었을 때 그 정도는 각오하셨어야지요."
"각오했습니다. 혈육 하나 남아있지 않아 어떤 협박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지만..."
뜸을 들인다. 대충 예상은 된다. 내 능력이 이정도 대우밖에 못 받고 사나, 자괴감이 든다. 차라리 무법지대라는 파트론이 이것보다는 낫겠다. 겠지.
"버틴다고 해도, 나중에 결혼하게 된다면 그들이 위험하겠지요. 국경 수비대 쪽은 인력난이 심해 차별이 덜하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으로 전출신청을 하는게 어떨까 싶은데 빈센트 경께 여쭤봐주실 수 있으신지요."
세상에. 미래의 소드 마스터... 당신은 정말 천사군요. 프란님의 화신인가요.
"그쪽은 그쪽대로 차별이 심하다고 해요. 아무래도 기사단에 들지 못한 자유기사들이 몰려가다보니, 그들끼리 파벌이 있다고 들었어요. 오라버니도 가문의 위세가 아니었다면 고생했을 거라며 진저리를 치셨지요."
"그렇습니까."
침울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불쌍하기도 하지. 본인이 태어나고 싶어서 평민으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능력까지 무시당하고. 어쩌겠나. 어디 돈 많고 능력 필요한 귀족 하나 낚아채 결혼이라도 하던가 해야지. 그런 영애가 누구 있던가. 많기는 한데 반란세력을 빼고 나니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 뿐이구나. 내실 튼튼한 왕당파중에 인재가 없어서 안달 난 자가 얼마나 있겠냐만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불쑥 올라왔다. 에들턴은 가라앉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다 머리를 쓸어넘겼다. 내 신분으로 어설프게 위로해봤자 약올리는 것 처럼 들릴테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애써 웃었다.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 죄송합니다, 영애."
고개를 젓고 커튼을 들춰 바깥을 쳐다봤다. 어느새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햇볕이 스며들었다.
"기사님, 이제 출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준비하죠."
에들턴은 말없이 마차에서 내려 말 위에 올라탔다.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샐리가 작게 한숨을 쉰다. 다행이도 차노트 성까지는 이제 서너시간 정도 남았다. 멀리 성탑의 끄트머리가 보인다. 그도 어느정도 마음이 정리가 됐는지 한결 편안한 얼굴로 마차에 다가왔다.
"도착하면 우선 머물 곳부터 마련하겠습니다."
"아뇨. 차노트 대공께서 해결해주실거라셨어요."
"그렇다면 곧장 성으로 가겠습니다."
"네."
에들턴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앞으로 말을 몰았다. 입 다문 채로 웃고만 있으면 누구도 평민인 줄 모를텐데. 어떤 사람은 평생을 연습해도 저렇게 웃지 못하는데 어쩜 저렇게 자연스러울까. 지금까지 아무도 후원하겠다 붙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누가 근처에서 훼방이라도 놓고 있는건가? 그렇다면 유력 후보는 돈 쓸 줄 모르는 노먼 뿐이구나.
늘어선 줄 앞에 멈춰서더니 그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빙긋 웃으며 정문으로 말을 몰았다. 등을 돌리고 힘차게 말을 모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 귀엽고 순진한 청년은 내가 챙겨야겠구나. 에스메랄다가 그래서 굳이 저 사람을 붙여서 보냈구나. 어쩔 수 없지. 내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 나라의 부국강병이 필요하다. 겸사겸사 파트론에 물도 먹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아가씨! 또 엉뚱한 생각 하고 계시죠?"
"아냐. 그냥 고민이 풀려서."
"정말이시죠?"
쓸데없이 눈치만 좋은 샐리를 밀어내고 창틀에 기댔다. 드디어 북부의 끝인 차노트 공작 직할령에 도착했다. 황가에서 뻗어나온 세 가문 중 하나 답게 웅장한 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주가 오갈 때나 열릴 것 같은 커다란 문이 열렸다. 한계선에서 경계를 서야 할 것 같은 기사들이 열을 맞춰 서 있다. 황녀도 아니고 심부름꾼인데 적당히 할 것이지. 하여튼 차노트는 적당히를 모른다.
에들턴은 살짝 당황한 듯 싶더니 말을 몰고 기사들의 앞으로 갔다. 그가 말에서 내리자 기사들이 뭐라 말을 전했다. 턱을 괴고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평민이라고 무시하면 혼낼 준비는 끝났다. 다행이도 그는 무사히 돌아왔다. 벅찬 듯 한 얼굴로 창가에 다가왔다.
"황녀 전하의 대리인이자 친구인 만큼 극진히 모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잘 됐네요. 그럼 들어가도록 해요."
제발 그런 대접 안 해도 되는데. 떠나는 그날까지 지루한 의전 하다 금쪽같은 시간은 다 흘려보내겠구나. 하지만 남남인 내가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쩌겠나. 기쁘게 받아들여야지. 내가 언제 이런 취급을 당해보겠나. 차노트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영주성으로 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 말은 죽어도 듣지 않을 차노트 둘에 날을 세우고 덤빌 대공비, 제 시댁은 신경도 안 쓰고 꼬리를 흔들 줄리에타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온다. 창가에 붙어 말을 몰고 있는 에들턴을 한번 쳐다봤다. 훨씬 진정이 된다.
선물이 들어있는 상자를 고이 샐리에게 안겨주고 에들턴을 앞세웠다. 형식을 따지기로 유명한 소트 출신이 집안을 꽉 쥐고 있으니 그에 맞춰 고전적인 디자인에 보석을 치렁치렁하게 단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가장 상석이 비워져있었다. 에스메랄다에게 하사받은 망토가 저 자리에 앉을 권한까지 내주었다. 당당하게 대공이 앉았을 자리에 앉아 모두를 훑었다. 순간 줄리에타와 눈이 마주쳐 애써 시선을 돌렸다.
"황녀 전하를 대신해 온 저를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께서도 기뻐하셨을 거예요."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에스메랄다가 꼭 읽어주라며, 꼭 자기 흉내를 내서 읽으라며 건네준 연설문을 펼쳐들었다.
"시조 오버다이어 황제 때부터 북방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하틴의 핏줄 차노트여. 지난 한 해도 제국을 위해 노력했음을 황제 폐하와 나 또한 잘 알고 있노라. 평년과 같이 내가 직접 그대들을 치하하고자 하였으나 정식으로 후계자에 오른 몸. 섣불리 자리를 옮길 수 없게 되었음을 고려해 나의 가장 커다란 우군이자 단 하나뿐인 친우를 그대에게 보내 예를 다하고자 한다. 부디 거절치 말고 받도록 하라."
교지를 잘 접어 대공가의 집사에게 건넸다. 그는 두 손을 받아들어 대공에게 전했다. 차노트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감동에 젖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교지만 쳐다보는 찰나에 냉랭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 먼곳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네."
"대공비 전하께서 걱정해주신 덕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멜린 차노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가 백작가의 혼처도 정해지지 않은 영애라 해도 황녀의 대리인인데 저렇게 고고하다니. 내 권력이 무섭지 않은 사람이 몇 있을테지만, 감히 황실에 끈을 댄 대공가에서 이런 푸대접을 받아 볼 줄이야. 상관없다. 내가 오늘 만나러 온 건 차노트의 실권자가 아닌 그냥 대공이니까. 에들턴이 헛기침을 하니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영애 앞에서 추태를 부렸군. 만찬까지 시간이 넉넉하니 방에서 잠시 쉬고 있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대공전하."
취소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 집무실에 돌아가 교지를 액자에 넣어 걸어놓고 나야 진정할테다. 권력을 거머쥔 대공비도 편안하지만은 않겠다. 저 자들을 어떻게 지금까지 휘어잡고 있었나. 그녀는 애써 화를 참으며 부채질했다.
"줄리에타. 그대에게 안내를 부탁하지요."
"네, 대공비 전하."
줄리에타를 따라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대공비의 신경질 섞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못들은 척 줄리에타에게 걸음을 맞춰 나란히 걸었다.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빅토리아!"
"저도요. 그간 잘 지냈어요?"
"물론이죠! 대공가 식구들과 사용인들은 모두 친절하거든요. 여기예요."
줄리에타가 멈춰서자 샐리가 문을 열었다. 문 밖에서 언뜻 봐도 볕이 잘 드는, 좋은 방이다. 에들턴은 차마 여자가 머물 방에까지 들어올 용기는 없었는지 문 앞에서 등을 돌리고 섰다. 우리가 들어가자 샐리는 조용히 밖에서 문을 닫았다.
"그런데, 차노트가 아닌 사람도 꽤 보이네요."
"대공비 전하의 친정 식구들이세요. 차노트는 북방을 지키느라 일손이 모자라서 도와주신다네요."
아무리 꽃밭을 거니는 정신이라고 해도 이 상황은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자신이 나중에 휘어잡아야 할 가문인데 엉뚱한 사람들이 유세를 부리고 다니는 게 거슬리지 않을 리가 없다.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소트 남작께서 대공비 전하를 많이 아끼시나봐요."
"글쎄요... 머무는 동안 편지 한 통 오는 걸 못 봤는걸요."
"설마. 줄리에타가 잘못 아는 거겠죠."
"그렇다면 좋겠지만..."
넘처나는 열정을 주체 못 해서 늘 나를 괴롭히던 줄리에타가 시름에 빠져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피뇨르 남작이 아들보다 아끼는 딸이니 보채면 해결해주겠지만 예의상 어깨를 토닥였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요.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줄게요."
"빅토리아..."
감동도 잠시. 닫힌 창문에서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줄리에타가 쪼르르 달려가 겁도 없이 창문을 열었다. 이제는 짹짹이라고 불러도 창피하지 않을 만큼 익숙해진 서신 마법이 내게 날아왔다. 부담스러울 반짝거리는 줄리에타의 눈길을 피하며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 앉은 새를 귓가에 가져다 댔다.
<안녕 비키! 클라라 보내줘서 고마워! 영감님한테 보고하자마자 너한테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법 분석을 마쳤어. 곧 해주 마법도 개발될거야. 오늘도 위대하고 자애로우신 빅토리아 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수도에서 만나!>
짹짹이는 힘차게 푸드덕거리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죽을 운명은 아니었구나. 죽는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든 살려놨겠지만.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줄리에타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세상에! 빅토리아, 아는 마법사 있어요? 너무 멋지다. 나도 마법으로 편지 받아보고 싶어요!"
"글쎄... 남작께 부탁드려보는게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예요! 아버지께 목소리가 듣고싶다고 편지하면 보내주시겠죠?"
글쎄. 아마 바로 휴가를 내고 차노트로 달려올지도 모른다. 벌써 기분이 풀려 헤실거리는 줄리에타의 어깨를 두드렸다. 당신의 임무가 막중합니다. 직접 말할 수는 없지만, 평소 하던 대로 해 주세요. 노크소리와 함께 하녀들이 들어와 짐가방을 끌고 들어왔다. 눈을 반짝이며 줄리에타가 말했다.
"차노트 성과 어울리는 드레스로 갈아입어야겠어요!"
"좋은 생각이예요."
치노트는 옛 왕조의 여름 별장이었던 모랑트 성을 차지했다. 그만큼 고풍스럽고, 이제는 유행에 뒤쳐진 옛 양식이다. 유감스럽게도 황도 사교계에서 십년 가까이 버틴 내게 그런 드레스는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어디 가서 꿇리지 말라며 넣어주신, 대대로 물려받아 시집올 때 가져오신 장신구가 있으니 한숨 돌렸다. 내 처참한 드레스들을 보고 절망하던 줄리에타는 내 옷을 제 몸에 대 보더니 다시 희망찬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제 드레스가 딱 맞겠어요!"
"그런 민페를 끼칠 수는 없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빅토리아가 돌아갈 때 같이 가려고 했었거든요. 드레스는 넉넉해요."
그렇게 말하며 제 방으로 끌고가 정열적인 붉은 드레스를 꺼내왔다. 숨막힐 정도로 코르셋을 조여야 할테니 모야트 풍 식사는 다 틀렸다. 행복해하는 줄리에타와 그 시녀, 그리고 샐리를 쳐다보며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귀족 여성으로 태어나 하는 수 없이 무위도식하며 내게 이득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냐 하면, 바로 다른 가문 기사단의 훈련을 먼 발치에서나마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내 앞에서 강아지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줄리에타가 부담스럽지만, 그 시선을 피한다는 핑계로 차노트 기사단을 살필 수 있다.
"리클렌 영애. 소트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소트 영애? 어느 영애를 말하는거니?"
"셋째이신 메리 영애십니다."
그 말에 줄리에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평소처럼 화사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메리 소트라. 쥐고 있던 부채를 줄리에타에게 밀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들어오시라 하지 않고 뭘 하니?"
내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분명 줄리에타의 시녀는 방 안에 있는데. 문을 연 장본인은 메리 소트의 시녀였다. 메리 소트는 의자가 둘 밖에 없는 티 테이블 앞까지 걸어오고 나서야 인사했다.
"처음 뵈어요, 빅토리아 영애. 소트 남작가의 메리예요."
"네, 소트 영애.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초대받지 못했지만 꼭 영애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찾아왔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해도 괜찮을까요?"
실례가 되는 걸 알면 찾아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체면을 생각해 무턱대고 쫓아내지 못하는 걸 노리고 쳐들어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딱 일년만 일찍 이랬다면 마시던 차를 뿌리고 쫓아냈겠지만, 지금의 나는 프라우 최고의 레이디다.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웃었다.
"물론이죠."
내 대답에 소트는 줄리에타를 쳐다봤다. 눈길 한 번 안 주던 줄리에타가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쫓아내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풍문으로 들어온 소트의 행태를 떠올리니 착각만은 아닌 것 같다. 저 순하던 눈에 점점 독기가 차올랐다. 소트의 시녀는 상황을 타개해 볼 생각도 없는지 요지부동이니, 이런 상황이 너무 오랜만이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샐리가 너무 불쌍하다.
"거기 너. 무엇 하고 있어. 가서 의자를 가져오지 않고."
"... 예, 영애."
영 내키지 않아 하면서 종종걸음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지긋이 쳐다봤다. 가문이 가문이라고, 아랫것들도 예의를 모르는구나. 하루만 더 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은 내가 노는 걸 보고싶지 않은 모양이다. 샐리에게 살짝 고갯짓하자 티세트를 하나 더 내왔다.
"영애께서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 제 말동무가 되어줄 사람이라면 줄리에타가 있는데."
"고모님께서 루이스 오라버니가 성을 비우신 동안 피뇨르 영애가 외로울까 걱정하셨답니다. 그래서 먼 올랑트에 있던 저를 부르셨지요."
"대공비께서 걱정하시는 영애는 제가 아는 줄리에타가 아닌 모양입니다."
줄리에타는 혼자 남는다면 그날 기분에 따라 내 얼굴이나 차노트 경의 얼굴을 수놓으며 하루를 보낼 사람이다. 곁에 사람이 없다고 외로워 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가여운 줄리에타. 태연하게 부채를 부치며 대꾸했다.
"우리 공자님은 제가 혼자있는 걸 안타까워하니까요. 차라리 수도에 있는 걸 더 좋아할 거예요. 빅토리아가 저와 함께해주는 걸 알고 정말 좋아했어요."
"차노트 경이 그렇게 자상한 분인 줄은 몰랐네요."
"좋은 분이예요."
언제 화가 났는지 모를 만큼 행복한 얼굴이다. 좋겠네, 줄리에타는. 둘이 신경전을 하든 말든 고개를 돌려 바깥을 쳐다봤다. 블론드, 진저가 넘쳐나는 사람들 속에 콩알만한 까만 머리가 보였다. 에들턴인가. 그가 나를 볼 수 있을리는 없지만 손을 흔들었다. 에들턴은 검을 휘두르는 것도 잊고 멈춰서있다 차노트 기사단의 기사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확정되기는 했지만, 아직 정식 서임 전인 기사가 한눈을 팔다니. 그는 검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 잠깐, 내가 보인건가? 저쪽에서 여기가? 말도 안돼.
"그러고보니 이곳에 약혼한 사람은 저 뿐이네요. 빅토리아야, 리클렌 공자님들이 아쉬워하셔서 미뤄지는거라지만 소트 영애는 의외네요."
"아버님께서 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 혼처를 구해오신다 하셨으니, 저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요."
"헐뜯으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저 영애같은 아름다운 분이 아직이라는 게 놀라웠을 뿐이예요."
"오해하지 않았으니 걱정마세요. 아버님께서도 올랑트보다는 대공전하가 지키는 모랑트가 더 안전할거라 여기셔서 보내신거니까요."
당신 고향에서 그런 소리 했다가는 다음날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을텐데. 안타깝게도 이곳은 원칙주의자 차노트가 지배하는 모랑트다.
"그러고보니, 빅토리아 영애께서 차노트에 오신 것을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연다셨어요."
"아... 그러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황녀 전하께서 오셨을 때도 하던 행사니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빅토리아."
파티라고는 아마 프라우제 때만 할 게 분명한 차노트령에 귀한 손님이 왔으니, 파티를 못해서 서러울 대공비가 얼마나 기쁠까. 그 와중에 차노트와 소트의 기싸움을 보며 두통에 시달리던 에스메랄다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이 짓을 또 할 줄이야.
"어쩌죠. 영애는 시녀 하나만 데리고 오셔서 에스코트 해줄 분이 없네요."
"조만간 영지에서 해리 오라버니가..."
"아뇨! 곧 칼도 차노트에 온다고 했어요. 빅토리아도 칼이라면 자주 만났으니 불편하지 않을거예요."
둘이서 누가 나를 에스코트해야 하는지 싸우는 걸 내버려두고 다시 테라스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에스코트 해 줄 남자를 가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성격이나 얼굴, 배경 중에 둘은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리 소트는 올랑트에서도 벽지에 자리잡은 남작가면서 성격도 개차반이다. 얼굴은 뭐, 반반하다. 칼 피뇨르라하면 소랑트의 유명가문인 피뇨르 남작가의 후계자면서 리클렌의 우방이니 배경이야 적당하다. 하지만 그간 알아온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그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떠오르고 만다. 그 작자는 누가 제 속을 긁으면 나는 잊어버리고 장갑을 집어던질거다. 얼굴은 풍채 좋은 피뇨르 남작과 판박이 되시겠다.
하, 아무리 모랑트 이 북쪽 벽촌까지 왔다고 해도 이렇게 인물이 없나. 절로 까만 머리에 시선이 갔다. 평민이라 배경은 없어도 알란타 최고의 미남이라고 불리는 황자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미모에, 교양은 또 얼마나 넘치는가. 게다가 내가 없으면 분명히 연회 내내 벽에 붙어있다 돌아가게 될거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인맥이 제일 급한 건 그 자신인데. 에스메랄다가 무서운 얼굴로 말한다. "책임져." 네. 제가 책임져야죠.
"있어요."
"네?"
둘 다 나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나는 둘의 시선을 각오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에스코트 해 줄 사람, 있어요."
파트론 제국의 연회도 이정도는 아니다. 충격적일 정도로 감정을 격앙시키는 노래와 힘찬 춤을 보고 에들턴은 조금 넋을 놓은 것 같다. 내가 미안하다. 에스코트만 아니었으면 오늘도 그날처럼 연병장에서 검을 휘둘렀을텐데. 내가 너무 미안합니다. 그래도 여기에서 넋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경?"
"아,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이라고 왈츠를 안 추는 건 아니예요."
이제야 진정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식은땀마저 흘릴 정도로 긴장했었나보다. 오라버니들이었다면 주저없이 닦아주었겠지만 차마 앞길 창창한 남자의 혼사길을 막을 수가 없다. 아직도 망나니 시절을 못 잊은 샐리가 칠칠맞게 어디서 이상한 걸 묻혀올까 걱정하며 챙겨준 손수건을 내밀었다.
"좀 더 여유있는 곡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테니 걱정마세요."
"예, 영애."
"그리고... 제 곁을 떠나지 마세요."
내 목숨이 아쉬운 게 아니라 당신 목숨이 위험하니까. 감히 황녀 대리의 자리를 꿰찬 평민이 너무 미울거다. 줄리에타의 시선이 닿지 않을 기둥 옆에 서서 재미있는 연회장을 구경하고싶었다. 그런데 내 옆에 있는 이 남자의 미모가 너무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모였다. 그 시선은 대부분 소트 남작가 사람들이었다.
"아는 것이 적어 잘 모르겠지만, 차노트가 아닌 분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모르는 척 하세요. 에들턴 경께는 위험합니다."
"하지만..."
"황녀께서 보낸 사람은 리클렌 백작가의 빅토리아 영애지, 하틴 기사단의 리스 에들턴 경이 아닙니다."
당신 외모는 내 취향이고 에스메랄다의 취향이니 부디 함부로 나서다 아까운 목숨 마치지 마소서. 키는 한참 못미치지만 그 앞을 쓱 막고 슬슬 다가오는 귀족들 앞에 섰다.
"어머. 일버른 영애! 요새 파티에서 안 보이시더니 차노트에 계셨네요?"
"네. 감사하게도 대공비께서 불러주셔서 얼마 전부터 머물고 있었답니다."
"너무해요. 프라우에서 유명하던 아름다운 영애는 전부 올랑트에 모였네요."
"그정도까지는 아니예요..."
줄리아 일버른은 수줍어하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미소지었다.
"영애께서는 늘 오메르드 공자와 함께 계시더니, 오늘은 혼자 오셨나요?"
"황녀전하께서 호위를 붙여주셔서 편안하게 왔지요. 에들턴 경. 이분은 일버른 남작가의 줄리아 영애예요."
에들턴을 돌아보며 가만히 있으라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그는 태연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보시다시피 제 호위로 오신터라 하는 수 없이 에스코트를 하실 수밖에 없었지요."
전혀 믿겨지지 않지만 내가 말하니 그렇게 알고 있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니. 일버른 주제에. 에들턴의 팔에 손을 얹고 바람이 잘 부는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이쪽에서는 망나니 적 나를 잊지 못했을테니 이정도 일탈은 괜찮겠지. 그리고 이 고지식한 남자는 테라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나를 마주보고 섰다.
"설마 여기에 들어오는 간 큰 사람은 차노트 령엔 없을거예요."
"피뇨르 영애가 굉장히 용기있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줄리에타는... 괜찮아요."
피뇨르가 감히 리클렌을 배신할 이유도 없거니와 마리아가 무서워서라도 나한테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거다. 그 이전에 줄리에타는 나의 열렬한 팬이다. 혹시 해리 소트가 온다면 모를까. 에들턴의 어깨 너머로 여러 얼굴이 기웃거린다. 버틀러, 멜러스, 조르주... 작손의 부하들이 많이도 모였다. 내가 일어날 기미만 보이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춤을 추자고 할 것 같다. 다행히도 차노트는 느림의 미학을 모르는 자들이니 행진곡 수준의 힘찬 노래만 이어졌다. 어떻게든 눈에 띄겠다고 이 정신나간 선곡에 맞춰 춤을 추는 저 영애들을 보고있자니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리클렌 영애. 실례지만 바로 돌아가지 않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귀족들 틈에 끼어 눈치를 키웠다 해도 아직 생리까지는 이해하지 못해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에스메랄다가 뭐라 얘기하며 보냈는지는 몰라도 꼭 돕고싶다는 눈치라 귀엽다.
"알면 경께서는 평생 제게 매여야 하는데 궁금하십니까?"
"영애께서 아군 하나 없는 이곳에서 황녀전하를 위해 연약한 몸으로 앞장서시는데 황실에 봉사하는 몸으로서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저 또한 황실에 은혜를 입은 몸. 영애의 큰 뜻을 돕고 싶습니다."
내 속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곧게 말하는 에들턴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원하는 것을 쫓는 모습이, 꼭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기억속의 나 같아서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럼 맹세를 하지요. 황녀전하와 저도 한 약속이랍니다."
"기꺼이 하겠습니다."
몸을 한껏 낮추고 고개를 숙인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에스메랄다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주는게 고마워 손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세요. 에스메랄다 전하가, 내가 죽을 위기라고 해도 절대 희생하지 마세요."
리스 에들턴은 칠흑같은 머리칼이 빛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두어번 깜빡이자 빛은 마법처럼 사라졌다. 줄리에타가 루이스 차노트의 팔짱을 끼고 나를 향해 걸어온다. 대공비의 마뜩찮은 시선을 특유의 밝음으로 넘기며 당당하게 걷는다. 나도 어쨌든 에스코트 해 줄 남자가 필요하니 에들턴을 쳐다봤다. 그는 아직도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아, 그리고 그 손수건은 잘 간직하는 게 좋겠네요."
마땅한 연미복이 없어 챙겨온 기사단 정복을 입은 그는 곱게 접어 보물처럼 챙겼다.
"빅토리아! 오늘도 너무, 너무 아름다워요!"
"고마워요. 줄리에타와 차노트 경은 오늘도 그림처럼 잘 어울리네요."
이렇게 칭찬하면 줄리에타는 활짝 웃으며 루이스 차노트에게 매달린다. 훌륭한 기사답게 기우뚱거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약혼녀를 받쳐주며 그는 연회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님께서 찾으십니다."
"감사해요."
"서재에 계십니다."
새 곡이 시작됐다. 지금까지를 생각하면 장송곡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느린 곡이었다. 지금까지 높은 구두와 발뒷꿈치를 걱정하던 영애들이 하나둘 남자의 손을 잡고 나섰다. 그 소란을 틈타 에들턴의 팔에 손을 얹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줄어든 소음에 귀가 간지러워졌다. 에들턴은 그새 넓은 차노트 성의 길을 외웠는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었다.
"처음 귀족사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왜 환한 낮을 두고 밤에 돌아다니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창밖을 주시하며 걸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인 차노트 령은 수도와 마찬가지로 드문드문 켜져있는 붉은 등과 마차나 다닐 대로를 밝히는 마법등 뿐이었다.
"영애와 함께하면 늘 배우는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앞으로도 제 호위 잘 부탁드려요."
그는 처음 만난 날처럼 환하게 웃었다. 속으로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쓸모있는 패가 그리웠으면 내가 이렇게 감동할까. 에들턴은 헛기침을 하고 먼저 서재 앞에 섰다. 그리고 어쩐일인지 경비 하나 없는 문을 열었다. 창문이 열려있는지 훅 불어오는 바람에 피냄새가 났다. 촛불 하나 없는 캄캄한 방 안에 백작이 심각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 앞에는 죽었는지 미동도 없이 쓰러진 사람이 있다.
"깜짝 선물이 과하시네요, 대공전하."
"생각보다 태연해 실망했네."
대공의 맞은편에 서서 쓰러진 자를 쳐다봤다. 당연히 누구 사람인지 알 수 있을 만 한 것들은 숨겼겠지만,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대공의 검을 들어 이곳저곳을 들췄다.
"아. 역시 감출 수가 없네요. 이래서 평화로운 올랑트란..."
"영애도 그렇게 생각하지? 누가 보더라도 소트 남작가가 보낸 것이 분명하니..."
"하지만 이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잡아뗀다면 황제폐하께서도 어쩔수 없이 덮어야겠지요."
"역시..."
여간 귀찮게 된 게 아니다. 그 순간 괘종시계가 울렸다. 뎅, 뎅... 열두번이 울리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벌써 머물기로 한 일주일 중 이틀이 지났다. 사흘이 되는 순간 맞이한 가장 심각한 문제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묵묵히 서 있던 에들턴이 나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낯익은 복장이군요. 영애의 근처에서도 몇명을 보았습니다."
미친 것 아니야? 어떻게 황녀의 대리인에게 암살자를 붙일 생각을 하는 거지? 대체 고트 공작가에서는 관리를 하기는 하는 걸까? 어쩐지 지난 생애 동안 그 강골이라던 차노트 공작이 비명횡사해 이상하다 싶었다.
"세상에. 그럼 지난 이틀동안 경은..."
"영애께서 공식활동을 하는 동안 쉬었습니다."
어쩐지... 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으면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사라지더라니. 내가 그것도 모르고 이 사람한테 에스코트를 부탁했구나. 미안해서 살짝 고개숙였더니 그는 그저 웃었다.
"감히 저까지 노리는 걸 보니, 이 작자들이 곧 난을 일으킬 모양입니다."
"미안하네. 우리 가문 때문에 영애가 고생이군."
"폐하와 황녀 전하를 모시는 사람들 끼리 뭉쳐야지요. 우선은 제가 미끼가 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건국왕의 핏줄인 대공보다는 한낱 백작가의 딸이라면 그들도 부담이 덜하고, 황녀에게 경고하는 의미로도 좋을 것이다. 대공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당분간은 조금 늘어진 척 하며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녀봐야겠다. 내 성격을 알고있는 차노트 사람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안내해줄터다.
"영애."
"그동안 에들턴 경은 돌아다니면서 최대한 소트가 꾸미는 일에 대해 조사해주세요. 저는 그런 건 잘 모르니까요."
"위험합니다. 옆에 있지는 못하더라도 근처에 있어야..."
불안해하는 에들턴을 별종을 본다는 듯 대공이 쳐다본다.
"경. 귀족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목숨 위협을 받는답니다. 작게는 후계 경쟁자에서부터 크게는 적대 세력에게 위협받지요. 이정도면 그리 심각하지도 않아요."
그는 고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가 어떻게든 납득한 듯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차노트 대공은 정색을 하고 눈길을 뗐다.
"설마 평민이었을 줄은 몰랐네."
"귀족을 어떻게 믿고 데려오나요."
역시 내가 봐둔 사람 답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귀족상이다. 오늘 온다더니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해리 소트와는 딴판이다. 생긴건 둘째 치더라도 마음이라도 곱게 써야 영지민들이 귀족 취급을 해 줄텐데, 여섯의 삶 동안 미래의 남작부인이 전부 달랐던 걸 보면 글러먹은 인물이다.
"그래도 위험한 건 사실이지 않나."
"괜찮습니다. 제가 오메르드 영애와 친한 건 아시지요? 덕분에 여러가지 물건을 가지고 있지요."
"마법이라면 믿을 수 있지. 그럼 영애만 믿고 있겠네."
그는 제 망토를 벗어 시체를 덮었다. 실크로 만든 고급 망토가 겨우 덮개로 산화했다. 대공은 그제야 용건을 기억해냈는지 소파를 권했다.
"일단 앉지. 할 이야기가 많으니 말이야."
"아뇨.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오늘은 제 용건만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조만간 루이스 경을 통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너무 커 엄지손가락에 겨우 끼고 있던 반지를 뽑아 테이블 위로 밀어 건넸다. 대공에게 잘 보이도록 보석과 세공 쪽으로 돌렸다. 그는 우아하게 반지를 집어들었다. 다만 어찌나 뻣뻣한지 경박하지 않으려 애쓴 티가 역력하게 났다. 놀랄 법도 하다. 대공이 작위를 이어받기도 전에 사라진 대공가의 보물이다.
"황녀 전하께서 보내신 물건입니다. 성의를 보인다면 더 큰 은혜를 내려주신다셨지요."
바보같은 차노트는 제 살을 지키기보다 제국을 지키는 것을 중시해 시조의 영광스러운 유품을 많이 잃었다. 그중 하찮은 것들 상당수를 소트에서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였나. 그 딱딱한 차노트 대공이 흥분해서 반지를 이리저리 살핀다.
"대답은 편하신 때 주세요. 그것과 상관 없이 이번 건은 도우라셨으니, 눈에 띄지 않게 에들턴 경을 부리시면 됩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에들턴을 무시하려니 가슴이 아프다. 차노트 대공이 심각한 기색으로 반지를 한 번, 에들턴을 한 번 쳐다본다. 그리고는 그가 입은 정복을 믿기로 결심한 것 같다.
해리 소트. 그의 가문은 본디 올랑트 변방의 보잘것 없는 영지 뿐이었으나, 조부때 부터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돈으로 상계를 쥐어흔드는 가문이다. 그 부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재산의 출처가 궁금해 백방으로 수소문해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래도 단연컨데 세계 최고라 말할 수 있는 고트 공작가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대놓고 질타할 수는 없다.
분명히 대대로 부자였다는 자들이 어째서 저리도 졸부같이 행동하는가. 어쩌다 끌려왔는지 불쌍할 정도로 안쓰러운 몰골을 하고 있는 제이슨 고트에게 살짝 고개숙여 인사했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나를 지긋이 쳐다보다 깜짝 놀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소트 공자. 영애께 오신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기억해주시다니, 정말.... 정말..."
무례하게 손을 덥썩 잡는다. 그 손에는 정말 더없이 화려한 장갑이 있었으니 불쾌함은 덜했다. 이 작자의 뒤에서 넋을 놓고 있는 고트 공자는 저 화려한 옷도 제 몸처럼 어울리는데, 이 인물은 성은 비슷하지만 전혀 아니다. 제발 조금은 자중해주었으면 하는데. 고트 공자는 등 뒤의 에들턴 경이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손을 놓았다. 잠시 정원에 나가 시녀에게 꽃을 한아름 안겨 돌아온 메리 소트가 활짝 웃었다.
"어머, 오라버니! 왜 이리 늦으셨어요?"
"미안하구나. 프라우에 들러 제이슨을 데려오느라 늦었구나."
"아! 고트 공자님!"
어쩐지 고통스러워 보이는 제이슨 고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로 결심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고트 공자. 소피아는 요즘 어떤가요?"
"누님은... 늘 건강하시지요."
흐릿한 눈빛으로 지나가듯 중얼거리고는 차마 소트 남매를 보기 힘든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에들턴이 작게 속삭였다.
"아마 만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제 기억대로라면 우리가 차노트에 도착했을 때 훈련기간이 끝났을텐데, 지금 도착하려면 그날에 프라우에서 출발해야 겨우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나."
알고 보니 그의 눈 밑이 새카매보이는 것도 같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해리 소트는 버리고 떠나갔다. 곧 에들턴도 대공에게 불려갈테니 이제 이 원대한 꿈을 가진 남매 사이에서 홀로 고통받아야한다.
"소트 공자님은 고트 공자와 친하신가봅니다."
"아, 예. 아무래도 같은 올랑트에 살기도 하고, 상계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보니 친목을 다질 기회가 많지요."
유감스럽게도 내가 알기로는 제이슨 고트는 가업을 잇는데는 관심이 없어서 작위만 이어받을 것이라고 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해리 소트는 제 인맥을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오라버니. 제가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되었어요?"
"물론 함께 왔단다. 대공께 부탁드려 오늘 밤 만찬 후에 보여주마."
나는 잊은 채 둘이서만 다정하던 남매는 대공에게 인사해야 한다며 해리 소트가 떠나는 것으로 끝맺었다. 에들턴의 강권을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며 요란하게 사라졌다. 에들턴도 없는 정원에서 무얼 보며 즐거워해야 하는걸까.
"차노트의 음식은 이국적이여서 늘 즐겁지만, 오늘 만찬은 더 기대되요!"
"공자께서 무얼 가져오셨기에 그리 즐거우신가요?"
"비밀이예요. 아, 영애는 프라우에서 오셨으니 벌써 알고 계시겠네요."
요새 프라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조금 시들해지기는 했지만, 역시 인형극이겠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열풍을 피해 이곳까지 왔는데. 이것도 다 내 운명인가. 하긴 도망쳐서 괜찮아질 운명이었다면 여섯번이나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각오를 해 둬야 겠다.
"그것을 말하시는거라면요. 저는 관심이 없어서 주의깊게 본 적은 없어요."
"어머. 그럼 잘 됐네요! 이번에 고트 공작가에서도 공연을 했다는 마법사를 초청했으니까요."
"소트 남작가의 재력이 제국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한다더니, 정말 대단하네요."
각오해봤지만 다시 그걸 본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올라온다. 어떻게든 메리와 연락해서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날 힘들게 하는 사람 중에 메리가 둘이나 있구나.
"저, 영애. 대공가에 봉사하는 마법사가 어디에서 머물고 있는지 아세요?"
"당연하죠. 서쪽 탑을 혼자서 전부 사용한다고 들었어요. 무슨 일인데요?"
순순히 알려주는 모양새가 그 마법사라는 작자의 성격이 이상하거나, 대공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만날 수 없는 사람이겠다. 소트 영애는 역시 연기에는 재능이 없는지 궁금하지만 애써 아닌 척하며 새침하게 질문한다.
"제 친구인 메리, 오메르드 영애에게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날이 다가와서요."
"너무 아름다워요. 저도 그런 친구가 생기면 좋겠어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아련하게 쳐다본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문이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나의 구원자 피뇨르 영애가 뛰어들어왔다.
"어머! 방금 듣고서야 생각났어요. 차노트에 도착하고 얼마 뒤에 영애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편지하는 걸 깜빡했네요."
"괜찮아요. 줄리에타는 제 친구니까요."
혼자서 감동에 벅차 어쩔줄 몰라 하다 소트와 시녀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지 겨우 손만 꼭 잡고 고개를 마구 흔들어댄다. 피뇨르 남작가의 피가 어디 가지는 않았는지 손아귀 힘도 여간이 아니라 슬슬 아프다. 웬만하면 제 동생에게 찾아가 듣던대로 감동에 젖은 연설을 늘어놓았으면 좋겠는데.
"고트 공자와는 인사하셨나요? 제가 잘 말해뒀는데."
이곳 저곳 친한 척 하는 것이 취미이자 정말 친구가 많은 줄리에타가 벌써 고트에까지 손을 뻗쳤나보다. 어쩐지 그 말 짧다던 제이슨 고트가 제대로 말을 하더라니.
"많이 피곤해보여서 소피아의 안부만 물었어요. 그럼 서쪽 탑으로 안내좀 해줄래요?"
"물론이죠! 차노트 성의 길은 완벽하게 꿰고 있어요."
보통은 길 같은 것 외우지 않는데, 줄리에타도 참 특이한 귀족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좋다고 쫓아다녔겠지.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줄리에타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는 소트 영애의 눈이 흔들린다. 아무리 견제를 하려고 해도 상대가 저렇게 마이페이스라면 지칠거다. 안타깝다. 그냥 차노트를 포기하면 좋을텐데.
"그럼 저는 이만."
벌써 한참 앞서가던 줄리에타가 갑자기 몸을 돌려세웠다.
"그런데, 차노트 령의 마법사님이 누군지 아세요?"
"아뇨. 설마 연락용 마법도 못 쓰는 분은 아니시죠?"
"그건 아니고... 조금..."
"차노트라면 아르카나 학파의 마법사를 고용했죠? 어떤 사람일지 잘 알 것 같아요."
줄리에타의 표정이 미묘하다. 아닌가? 그럼 대체 어떻길래. 마법사가 머무는 탑인데도 아무런 마법 없이 계단을 빙빙 돌아 올라갔다. 이제는 정말 죽을것 같아 벽을 짚은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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