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장부로 태어난 이상 사나이가 한번 마음먹었다면 실행에 옮겨야 하는 거다.'
보잘것없는 시골 귀족이던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기사단에 들어왔을 때부터의 내 좌우명이었다. 그래, 벤자민 스크랜튼 가자! 라고 마음먹은 지 십분. 나는 아직도 내 숙소보다 더 익숙한 발코니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다.
세상에 그렇게 혼나면서도 마구 뛰어내리고 몰래 오르던 곳인데 이렇게 높아 보일 줄이야. 만약 이 세상에 마법이 있다면, 분명히 어딘가의 사악한 마녀가 내 마음속의 부단장님과의 거리를 한 100km쯤 벌려놓은 것 같다.
난간에 손을 뻗기를 몇 차례. 차마 풀썩 뛰어올라 당당하게 마음속의 말을 전할 낯은 안 된다. 커튼 너머로 흐릿하게 그의 그림자가 비친다. 난간을 움켜쥐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조금이나마 조용해지기를 바라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작은 돌조각을 던졌다.
은거 생활도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렀다. 겉으로는 다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예전처럼 맹해져 버려 재미있는 일도 거의 없다시피 한 일과 중 제일 기다려지는 것이라면 일정을 마친 후 부단장님의 사무실로 찾아가는 거지. 같이 있지 못했던 반나절 동안의 이렇고 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시덕대기.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며칠째 잘못 삼킨 알약처럼 걸려서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귀찮은 듯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으론 펜을 굴리며 나를 쳐다보는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벤자민. 신입이 들어왔어."
"네? 요즘 같을 때에 무슨 신입?"
온 종일 열심히 일하고 달려와서 만나자마자 한다는 말이 신입 얘기다. 그것까지는 좋다 치자. 신입이라니? 언제 받으셨는데요? 대장인 나도 모르는 신입이 어디 있어? 이놈의 기사단은 대체 사람을 뽑을 때 직접 부릴 사람은 빼놓고 높으신 분들끼리 뽑냐!
"라베랑 입단 테스트로 대련했어. 꽤 버텼다던데."
"헐......"
우리의 신입은 감히 나 몰래 입단을 했으면서 단장님이랑 대련했고, 거기에 부단장님의 관심까지 받고 있다. 감히... 감히... 이런 깜찍한 신입 자식... 부단장님은 날 슬쩍 쳐다보곤 피식 웃었다.
"... 왜 웃어요."
"그냥."
"... 벌써 만난 건 아니죠?"
"아직."
"거짓말. 바른대로 말하라! 거짓말하는 상사는 싫다!"
"아르펜시 론델라마드! 어이 론델라마드! 난 숨바꼭질 싫어하는데!"
문제의 신입을 쫓아다니다 신경질이 났다. 얼른 찾아서 어떤 놈인지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굴릴까... 아니 훈련할까, 어떻게 활용하면 부단장님한테 칭찬받을까 고민 좀 해봐야 하는데 온종일 온 건물을 다 뒤지고 다녀도 털끝 하나도 안 보인다. 안 그래도 오전에 훈련 시켜놓고 부단장님한테 놀러 갔다 왔더니 다들 퍼질러 앉아서 놀고 있어가지고 화나 죽겠구만. 너 잘 걸렸다.
그때 눈앞에 ‘단장실’ 이라고 써있는 팻말이 보였다. 예전 같아선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짓이지만 습관적으로 문고리를 돌린다. 혹시나 부단장님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문을 여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건방진 부하들의 훈련에 임하는 자세를 고발하러 간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뛰는 건방진 신입 위에 나는 훌륭한 대장이, 그 위에는 팔짱 끼고 지켜보는 최종 보스 단장이 있었다. 미술품을 감정하듯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고 펜을 탁 내려놓았다. 펜 울리는 소리가 내 귀에 대고 ‘네 인생은 이제 끝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 조용히 깍지를 끼고 턱을 기대는 단장님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 여기 와서 좀 앉아봐."
... 망했다.
"자, 잘못... 했습니다..."
"그래. 뭘 잘못했는데?"
모든 걸 잘못했어요.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망할 놈의 단장 같으니. 권력을 사적으로 휘두르는구나! 독재자가 따로 없네. 자기가 아들처럼 부둥부둥 키웠다 그거지? 나도 애인처럼 소중하게 부둥부둥 할 줄 아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숨이 푹 나온다. 뱅글뱅글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는데 착각인가보다.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야. 그만 돌아. 허리에 묶은 거 치우고 재미있는 거 하자."
"헉, 헉. 네? 재미있는 거요? 어... 포커라도 칠까요?"
아르펜시는 주머니에서 척 하고 카드를 꺼냈다. 얜 아무래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보다.
"장난하냐? 벤치를 오르내리는 재미있는 스텝 박스 운동을을 할 거야."
"헉헉, 내 인생이 뭐 그렇지. 에라이. 괜히 들어왔어 이 짧은 인생 뭐가 아쉽다고..."
헉헉거리며 오르락거리는 아르펜시놈을 쳐다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미친 것처럼 올라간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 안에 무언가가 깨어나는 기분이야.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부단장님을 만나다니. 크라헤에서 부단장님을 만나려면 먼저 나한테 눈도장 찍고 가야 하는 것도 모르나.
"... 저, 벤자민 대장님. 신입 뭐 하는 거예요?"
"어, 카린. 그... 체력검사."
카린이 서류를 몇 개를 들고 서서 황당하다는 듯 쳐다봤다. 뭐! 체력검사 맞아. 조금 사심이 섞이긴 했지만, 목적은 어쨌든 체력검사야. 죽지는 않겠지. 무려 단장님이랑 대련하신 몸인데. 내가 빤히 쳐다보자 카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가던 길로 사라졌다. 카린이 갔는데도 넋을 놓고 나를 쳐다보는 아르펜시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놈도 웃는다.
"웃냐? 웃어?"
"죄송합니다!"
다시 아침이다. 난 아침이 싫다.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내 잠을 깨우는 것도 싫고,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것도 싫다. 심지어 아침 훈련도 싫다. 하지만 제일 싫은 건 해를 등지고 서 있는 부단장님의 아름다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물론 햇빛이 부단장님의 미모에 참패하고 뒤따라오고 있는 거지만.
그나마 나를 위로하는 건 늦잠 자는 척 이불 속에 파묻혀 있으면 곧 들리는 노크 소리다. 가볍게 두 번 두드리곤 증오하는 내 이름을 불러준다.
"벤자민. 안 일어나나?"
"으음..."
"점점 늦게 일어나는군. 이렇게 게으른 대장은 필요 없는데... 신입으로 바꿔야 하나."
"일어났습니다!"
부단장님은 어느새 침대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머리 다 헝클어졌을 텐데. 다시 엎어져서 베개로 머리를 감싸 안고 이불 속에서 발버둥 쳤다. 왜 일어나지를 못해서! 부단장님은 베개를 뺏어 들고 팡팡 내리쳤다.
"안 일어나면 일어날 때까지 때린다."
"일어날게요..."
고개 숙인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부단장님은 방에서 나가버렸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부스스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내 지정석이 된 부단장님 옆자리에 아르펜시가 앉아있다. 반쯤 감은 눈으로 꾸벅꾸벅 부단장님 쪽으로 고개도 떨어진다. 죽여버린다 아르펜시.
"야 아르펜시."
"네, 대장님."
"너 머리 좀 어떻게 해봐."
아르펜시는 내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더니 손으로 대충 눌렀다. 야 더 차분해지란 말이야. 부단장님은 분명히 더벅하고 개털 같은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하시는 거라고. 넌 더벅하면 안 돼.
"제가 뭐 잘못했..."
"니 모든 게 잘못이야 나쁜 놈아! 으아아아!"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소리를 마구 질렀다. 어디서 누군가가 “대장님 미칠 거면 곱게 미치세요!”라고 외친다. 아르펜시의 등짝을 확 갈겼다.
"커헉!"
"연병장이나 달리자!"
아르펜시는 그늘에 드러누워 있는 기사들과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는 울상을 지으며 달렸다. 나도 같이 달렸다.
"언제까지 달리실 겁니까!"
"우리 둘 중에 아무나 하나 죽을 때까지!"
"그냥 죽여주세요!
유리창을 살짝 두드리는 소리에 헤루안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창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가 와서 쪼았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난간에 삐죽 튀어나온 고동색 새집이 반가워서 다가갔다. 무얼 생각하는지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벤자민."
"아 뭐야! 깜짝 놀랐네. 나올 때 기척은 하셔야죠."
뒤로 멀찍이 달아나 한숨을 푹 쉬는 그의 모습은 평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우물쭈물하며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벤자민을 쳐다보며 헤루안은 난간에 팔을 괴고 그를 쳐다봤다. 오늘은 무슨 짓을 꾸미려고 그러나. 짐짓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헤루안."
"상관을 이름으로 부르다니."
벤자민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서 테라스 근처에 던졌다. 웬일인지 정복에 단추까지 모두 여미고 뻣뻣하게 서서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모습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결투 신청이라도 하려는 건가? 잠깐, 검을 내 발치에 던졌는데 정말 결투 신청인가?
다행히도 벤자민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왔다.
"싫어."
"...뭐가?"
"나도 모르는 녀석이랑 친해지는 거 싫다고."
평소에도 유치했지만, 오늘따라 어리광을 부리는 벤자민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벤자민은 고개를 살짝 빼며 그를 노려봤다.
"머리 쓰다듬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도 싫어."
헤루안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벤자민은 잠깐 멈칫하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 말라는 건 아니에요. 그 누구보다 첫 번째로 날 봐달라는 거예요. 이젠... 그래도 되잖아요? 하라는 것도 잘 하고 있잖아요? 쿠데타 전에도 레이디 말 안 듣기로 유명한 벤자민 스크랜튼이 당신 말만 잘 듣고 있다구요."
벤자민은 헤루안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제 나만의 헤루안이 되어줘요."
-
(+2017. 12. 8)
옴마옴마 얘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말 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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