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5.
벤자민은 자기 일은 모두 내팽개쳐놓고, 단장실이 있는 바로 위의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오랜 시간 눈을 감고 있었다. 곧 함박눈이 쏟아져 내릴 듯 하늘엔 두꺼운 구름이 가득 끼어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코끝을 스쳐 지나간다.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지겨운 나날이 반복된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찔함에 급히 눈을 떴지만, 바닥은 이미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급히 낙법을 펼쳐 머리부터 떨어지는 것은 막았지만, 어깨가 끊어진 것처럼 아팠다.
"아으윽...”
몸을 바르게 뉘고 숨을 골랐다. 머리가 팽팽 도는 기분에 눈을 찌푸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파란 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까지 솔솔 불자 그는 곧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오른팔 또 다쳤네?"
벤자민은 무의식적으로 왼팔로 바닥을 짚었다. 손에 까끌까끌한 모래가 닿았다. 모래? 그가 떨어졌어야 할 곳은 단장실의 테라스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는 섬뜩함에 팔의 상태도 잊고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꽃이 만발한 봄. 특히 벚꽃이 만개한 정원이었다. 흙을 밟아 다진 바닥 위로 연분홍빛 꽃잎이 수를 놓았다. 길의 저 끝에는 처음 보는 양식의 건물이 서 있었다.
건물에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벤자민은 급히 몸을 커다란 벚나무 뒤에 숨기고 허리의 검을 살짝 뽑았다. 건물에서 나온 사람은 경치를 즐기듯 주위를 둘러보며 벤자민이 떨어졌던 곳으로 걸어갔다. 제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기를 빌던 벤자민은 순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흠. 이곳에 이렇게 파인 자국이 있던가?"
소름 끼치도록 그리운 목소리에 그는 헛숨을 삼켰다. 남자는 바닥을 손으로 천천히 훑더니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남자가 뒤를 돌아 얼굴을 비췄을 때, 눈만 살짝 보일 듯 그를 쳐다보던 벤자민은 검을 떨어트렸다.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벤자민, 벤자민 대장 맞나?"
"부단장님..."
벤자민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그는 허리끈을 풀고 겉옷을 벗어 벤자민의 어깨를 덮었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며 그를 데리고 벚꽃이 우거진 곳으로 숨어 들어갔다.
"어떻게 여기에... 그보다, 내가 아는 벤자민 스크랜튼이 맞나?"
"그쪽이야말로 헤루안 휘스가 맞는지 궁금한데."
남자는 벤자민을 쳐다봤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잔뜩 굳은 얼굴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긴장을 풀고 벤자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벤자민이 흠칫 물러나며 검을 쥐자 말했다.
"평소와 너무 달라서 의심스럽군."
벤자민은 잠시 헤루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이 벌어졌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던 그는 겨우 입을 뗐다.
"부단장... 님?"
헤루안은 짐짓 굳은 표정을 지으려다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이제야 좀 벤 답군."
벤자민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너무 오랜만에 뜻밖의 장고에서 만난 그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메인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제가 아는 분 맞아요? 헤루안 부단장님이 저한테 그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는데..."
벤자민의 울먹이는 말에 헤루안은 피식 웃으며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벤자민은 품이 넓고 낯선 옷을 입은 채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리고 앞서 걸어가는 그를 따라 복도를 걸어갔다. 그리고 한 방으로 들어갔다.
"금위대장 대감. 중군 영감께서 도착하셨사옵니다."
복도에 서 있던 여인이 방 안을 향해 조아리며 알렸다. 방 안의 사람은 잠시간의 시간 뒤 대답했다.
"들라하라."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벤자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헤루안을 따라 들어간 방 안에는 은은한 다향이 풍겼고, 익숙하지만 낯선 사람이 있었다.
"왔는가."
"실종되었다 하셨던 별장이 돌아왔습니다. 헌데......"
"무슨 일이기에 말을 그리 늘이는가?"
"기억이 온전치 못한 것 같습니다."
"혹, 그때의 자네처럼 말인가?"
벤자민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단장의 얼굴을 한 낯선 사람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곳에 오기 직전, 헤루안이 당부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너를 먼저 발견했고, 다른 이들은 국경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가 있다는 거야.'
'무슨 뜻입니까?'
'저쪽에 있을 때 동료의 얼굴을 한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가 대수롭지 않게 걸어오는 말에 자연스레 대꾸할 수 있겠냐는거지.'
'... 당연히 무리입니다만, 부단장님. 말투가 상당히 바뀌신 것 같습니다?'
벤자민은 용기를 내어 라베를 마주 보았다. 크라헤 단장 라베 핀 멕글라이어가 아닌 금위대장인 그는... 헤루안의 앞에서도 좀처럼 웃음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금위별장 벤자민 스크랜튼. 병영을 총 책임지는 관리자의 임무는 훈련과 전투만을 담당하던 그로서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의 자신은 어떤 존재였기에 이 많은 일을 모두 처리하고 병사들을 돌봤으며, 수련한 것인가. 이곳은 어디인가. 벤자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응은 잘 하고 있나?"
"부단장님."
그는 생각을 멈추고 헤루안을 쳐다봤다. 그가 비시시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자 헤루안도 웃었다.
"왜 웃지?"
"그냥요. 전에는 부단장님은 늘 단장실에서 살다시피 해서 이렇게 마주칠 시간 같은 건 없었잖아요?"
헤루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그것보다는 다른 문제가 더 컸던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매일 내 뒤를 쫓아다니면 나도 부담스러워."
벤자민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헤루안을 쳐다봤다.
"그, 그런 건 됐으니 이런 서류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나 알려주시죠!"
평소라면 건방지다며 핀잔을 늘어놓았을 그가 아무런 반응 없이 자신에게로 다가와 고개를 맞대고 종이들을 읽자 벤자민은 잠시 혼동을 느꼈다. 하지만 곧 복잡한 서류들을 읽어내려갔다.
"이런 서류들은 그냥 부단장님이 해주시면 안 됩니까? 제가 이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요."
"왜 못한다고 생각하지? 이곳의 네가 할 수 있었다면 너도 분명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맡긴 일인데."
"애초에 사무기사도 아니고, 전투기사인 제가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며 벤자민은 또다시 허전함을 느꼈다. 오랫동안 낯선 곳에서 혼자 지내더니 정신이 나가서 내가 듣고 싶어 할 만한 말들만 하는 건가? 그는 헤루안을 잠시 쳐다보았다.
"부담스럽게 왜 그런 말을 해요?"
"부담스럽다니?"
벤자민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복장이었기에 어설프게 쓴 갓이 살짝 기울어지자 헤루안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머리에 제대로 얹어놓고 끈을 묶었다. 그의 손이 턱에 닿을 때마다 벤자민은 움찔거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과민반응인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러지?"
"...... 아뇨. 잠시 혼자 있고 싶어서요."
"그럴 만도 하지... 그럼 나는 먼저 돌아갈 테니 천천히 돌아와."
"예."
헤루안이 나가고 벤자민은 혼란스러움에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짜증을 발산했다. 이게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가볍게 뺨을 때려봤지만 느낌은 제대로 왔다. 이 낯선 세상은 어디인지, 왜 이곳에 오게 된 건지 궁금한 것은 많은데 왜 그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인지... 벤자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라베를 보았던 방으로 향했다. 우연히 방에서 나오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벤자민은 성큼성큼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단장, 아니 대장님. 헤루안 중군 댁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 사람을 하나 붙여주지."
라베의 씁쓸한 얼굴에 벤자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이해할 것이 아니었다.
"벤자민."
"예?"
"궁금한 것이 많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조용한 건가?"
"...지금부터 부단장, 아니 중군께 여쭈러 갈 겁니다."
"꼭 지금 가야 하는 건가?"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베가 고갯짓으로 그의 옆에 서 있던 병사에게 지시했다. 병사가 벤자민의 앞에 나서자 그는 다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몸을 돌렸다.
벤자민은 헤루안의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무작정 들어갔다. 마당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그를 보고 놀라서 뛰쳐나와 막았다. 그는 왼팔로 막는 사람들을 밀쳐내고 불이 켜져 있는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그 안에는 책상 앞에 정좌하고 앉아있는 헤루안이 있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벤자민의 말에 헤루안은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그 웃음을 마주한 벤자민은 아찔함에 뒤로 흠칫 물러났다. 이건 그가 아니다. 그가 나에게 이런 웃음을 지을 리가 없다. 아무리 쫓아다녀도 이런 웃음은 자신을 향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단 한 번도 그것을 바란 적은 없었지만...
벤자민이 말을 않자 그가 일어나 팔을 끌었다.
"앉아."
벤자민은 팔을 뿌리치고 벽에 달라붙어 그를 노려봤다. 의아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에게 벤자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 누구야."
그 말과 동시에 벤자민은 머리가 깨질듯한 아픔에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끊어질 듯한 고통에 털썩 주저앉은 벤자민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생각보다 멍청한 놈은 아니었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벤자민."
헤루안은 한숨을 쉬고 벤자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바깥에서는 시끄러운 소리와 창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무슨......."
헤루안이 검을 집어 들자 벤자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헤루안은 벤자인의 머리를 뒤로 툭 밀며 말했다.
"다시 겪게 할 수는 없으니... 어서 꺼져버려라. 귀찮게 들러붙지 말고."
벤자민은 헤루안이 드디어 뱉은 그다운 말에 안심하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헤루안은 그렇게 말하고 칼을 뽑아 들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창이 불쑥 찔러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앞에 있는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더니 어지러운 것은 나아졌지만 오히려 온몸이 쑤시는 것이 심해졌다. 살짝 눈꺼풀을 들자 보인 것은 꽤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천장이었다. 그리고,
"정신이 좀 드나? 며칠 만에 깼는지는 아나? 대장으로서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나 하고..."
"네... 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라베와 눈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곧 어지러움이 몰려와 손을 짚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왜?"
"부, 부..."
벤자민은 말을 더듬으며 라베를 쳐다봤다.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곤 황급히 손을 놓았다.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라베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긴 어딥니까?"
"의무실."
"네?"
벤자민은 멍하니 둘러보다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잘 묶이지도 않는 머리를 억지로 올려 묶어 불편해야 할 머리카락이 예전처럼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벤자민의 얼굴에 라베가 입을 열었다.
"내 집무실 옥상 난간에 앉아있다가 떨어졌어. 테라스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하기 싫군. 앞으로 옥상에 올라가는 건 금지다."
라베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 했는데 갑자기 손목을 잡더니 놓질 않아 붙잡혀있었으니 이만 가보지. 쉬어라."
"네. 죄송합니다."
벤자민의 사과에 라베는 그를 슬쩍 쳐다보고 밖으로 나갔다. 벤자민은 오른손을 살짝 오므렸다 펴보았다. 뭐야. 나는 지금까지 어디서 뭘 했던 거야. 설마... 벤자민은 애써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쓸어냈다.
"그래. 그 인간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다시 드러누워 버린 그는 깍지를 끼고 머리를 받혔다. 그리고 눈을 살짝 감았다. 갓끈을 고쳐 매주던 손의 감촉이 아직도 선명한데...
둔한 그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지금이라도 잠들면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작은 바람이 마음속에 일어났다.
그리고 노크가 가볍게 울렸다. 한쪽 눈을 살짝 들었다가 다시 감아버렸다.
"벤자민 잡니다."
-
트위터질은 함부로 하는게 아니었음다.
달초에 쓰기 시작해서 오늘에야 끝났네요. 이것참ㅋㅋㅋㅋ
알티해주신 나쁜분들 리퀘 폭탄맞아랑.
이 소설은 언젠가 컴터로 복사해서 수정좀 해야겠네요.
폰으로 썼더니 호흡도엉망이고... 묘사고 뭐고 다 먼곳으로 훨훨...
그럼 다음번 소설은 아스란 영웅전 팬픽으로...
(+2017. 12. 8.)
와 지금 보니까 너무 못썼다...
언제 다 백업하조 미치겠다
'커뮤 > EPO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록 - 나만의 헤루안이 되어줘요 (0) | 2017.12.08 |
---|---|
벤헤루 - 상처는 아물지만 흉터가 남아 (0) | 2017.12.08 |
벤헤루 - 네가 그럴 때마다 난 미쳐버려 (0) | 2017.12.08 |
벤헤루 조선AU 잠입수사 편집/ㅁ| (0) | 2016.01.13 |
[벤자민x헤루안] 2주년 연성 2부 (0) | 201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