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줄 아는 거라고는 남 속이는 것밖에 없어서."
"다음은 없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헤루안은 목에 겨눈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검은색이 아닌 흰 제복을 입은 남자를 뒤로하고 떠났다. 그가 인파 사이로 사라지기 직전까지 손에 총을 쥔 채 서 있었다. 그리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잠금쇠를 걸고 코트 안에 숨겼다.
"왜 살려 보내셨습니까?"
"제정신이 아닌 부단장이 돌아다니면 기강이 해이해지기 딱 이지. 지휘부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반란군이야. 무너뜨리기 얼마나 좋을까."
까마귀들의 행동대장. 미친개 벤자민 스크랜튼이 활짝 웃었다. 선봉에 서서 칼을 뽑기 직전에나 짓던 표정이었다. 목에서 흐른 피가 옷깃을 붉게 적셨다. 피 냄새를 맡으면 유난히 붉어 보이는 눈동자였다.
"그래서, 단장께서 어디로 오라 하셨다고?"
"... 이쪽입니다."
*
벤자민은 피가 눌어붙은 성을 가로질렀다. 전부 숨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처리하고 떠났으니, 인망 나쁜 스크랜튼 남작가 일가 중에 남아있는 자는 없을 것이었다. 예상대로 낯익은 옷을 입은 채 뒹굴고 있는 시체들을 뒤로하고 벤자민은 복도를 거닐었다. 돈이 될 법한 것은 모두 떼어가고 남은 것은 고물로도 쳐 주지 않을 법한 것들뿐이었다. 벤자민은 물건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남작가가 거주하던 층의 가장 구석. 아침에도 볕이 들지 않고, 우풍이 들어 한여름에도 서늘하던 그 곳. 어린 시절의 방에 찾아왔다.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하고 끌려갔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인가."
누구 하나 손 대지 않아 세월이 그대로 내려앉은 방을 둘러보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풀썩 피어오른 먼지에 기침하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 당신들이 그렇게 원하던 수도의 귀족이 됐어. 다시는 못 오니까. 부러워하라고 말해주러 온 거야."
*
"크라헤는 끝이야."
총성과 포성. 날붙이끼리 부딛히는 소리. 사방이 아비규환이었다. 갑옷이 아닌 제복을 입은 채로 벤자민은 헤루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맥글라이어도 죽을 예정이지. 지는 해에 매달릴 필요가 있나?"
"벤자민 스크랜튼!"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칼을 피하는 것은 쉬웠다. 끝이 흔들리는 검은 떨리는 손으로도 막아낼 수 있었다. 검을 맞부딛혀 튕겨냈다. 헤루안의 손아귀가 찢어지며 검은 멀리 날아갔다. 빈 손을 들어 헤루안은 벤자민의 멱살을 쥐었다.
"저쪽이다!"
"배신자를 잡아라!"
벤자민은 헤루안을 끌고 움직였다. 신 수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수로 중에서 가장 경비가 허술하고, 트와베에게는 전황이 나쁜 곳이었다. 벤자민은 헤루안의 품에 권총과 단검, 그리고 금화가 든 주머니를 안겼다.
"멍청하게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은 아니겠죠? 당신은 똑똑하니까."
헤루안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벤자민은 헤루안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한참을 몸부림친다면 충분히 풀 수 있도록 손발을 묶었다. 이별의 시간이었다. 그는 헤루안을 조각배에 떠밀었다. 쓰러진 그의 위로 짐 위에 뒤집어 씌우는 모포를 둘렀다. 그리고 배를 세게 밀었다.
"미안해요. 당신만 빼돌리는 게 최선이었어요."
벤자민은 자리를 뜨지 않고 배가 멀리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혹시 눈이라도 한 번 마주칠까 활짝 웃은 채였다.
"찾았다!"
추적해온 병사들과 함께 내려온 지유현은 칼자루에 손을 얹은 벤자민이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권총을 뽑아 들었다. 탕. 수로 안에 총성이 시끄럽게 울렸다. 벤자민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헤루안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지만, 메아리에 묻혀 소리 없이 사라졌다. 벤자민은 고개를 쳐들어 헤루안을 바라보았다.
'꼭 살아요. 우리 몫까지.'
*
반역도들의 습격은 성공적으로 제압되었다. 크라헤는 행방이 묘연한 부단장 헤루안 휘스 외 일반 기사를 대부분 사살, 사무 기사는 대부분 구속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트와베 수석 기사이자 구 크라헤 일반 기사 대장이었던 벤자민 스크랜튼 사형 집행일. 머리에 자루를 씌워 놓아 그 누구도 벤자민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뒤로 묶인 손은 저항할 생각 없이 차분히 늘어져 있었다. 간수들이 이끄는 대로 층계를 올라서 목에 밧줄이 드리워지는 순간까지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에녹 세리언의 마지막 선언에 벤자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좆까,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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