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감님은 기가 막히게도 내 구구 마법이 사라지자 마자 곧장 수도로 날아 오셨다. 그 불량배도 마법사는 마법사인지 프라우 마법 보조 시설의 구조를 정확하게 외우고 있다가 그곳으로 이동해서 왔다고 한다. 그 인간은 역시 아르카나가 아니라 크로노스인게 분명하다. 아르카나가 어떻게 마법진을 정확하게 외우고 있지? 미친놈이거나 마법에 독보적인 재능이 있거나 둘 중 하나다. 나도 수도에 십칠년 살면서 마법 배우는 동안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어 겨우 외운 걸 어떻게 "한번 쓱 보고 외웠어" 따위로 둘러대지? 정말 급하긴 급했던 모양인지 길드 밖으로 나갈 때는 꼭 걸치던 대장 망토도 잊어버리고 온 것이 조금 짠하기는 하다. 아니, 내가 지금 누구를 동정해? 앞으로 저 인간 수발 들으려면 내 코가 석자다.
"내놔."
"여기요."
오자마자 상석을 딱 차지하고 앉으신다. 한소리 듣기 전에 얼른 수정 구슬을 던져주고 옆에 서서 기다렸다. 아. 십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저기에 앉아 있었는데. 옆에 서 있는 티모시 리클렌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 할 수정구슬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쟨 뭐냐."
"알란타 제국 마법사인 크로노스의 티모시 리클렌이예요."
"그래? 그럼 권력의 앞잡이 한테 연락할 때 써야겠다."
"스승님. 제발 다른 학파 수장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신경 꺼라."
미친 사람. 내가 당신 밑에서 반년만 더 보내면 성격 파탄자가 될 거다. 얼른 옥사나님이 오시면 좋겠다. 내가 이 나이에 요절하기 전에. 한참을 수정구슬을 붙잡고 씨름하던 스승은 결국 어느 규모의 마법인지 추측하는 데 성공하셨다. 영감탱이가 기쁨 반 분노 반의 광기에 찬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 놈을 보았나! 어떤 새끼야! 누가 감히 영혼 복제를 시도했어!"
잠깐 반짝인 보라색 빛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보라색 빛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질린 얼굴로 스승을 쳐다보는 피뇨르 남작과 달리 새파랗게 질려서 올리비아님의 이름을 찾는 티모시 리클렌을 보고 있자니 나도 우리 학파 수장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저기서 날뛰고 있는 인간이란 사실이 너무 가슴아프다.
"어느 학파 놈인지 내 손에 잡히기만 하면 그냥!"
"정신차려 이 인간아!"
과거 스승에게 가장 사랑받갔다는 모범수 출신 사형수에게 배워온 마법으로 스승의 뒤통수를 후려갈렸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전격계 마법에 각성 마법을 섞은 충격 마법인데, 개발의도와는 다르게 죽어가는 사형수들을 깨우는 데 쓰이고 있다. 마법을 한 대 맞은 스승은 차갑게 식은 머리로 자리에 앉아서 '망할 놈' 추적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가 재판에 회부되는 한이 있더라도 마법을 추적해서 붙잡고 말테다."
"스승님."
"오냐. 말해봐라."
"우선은 제가 사용자 명부를 보고 의심가는 사람을 골라뒀는데요."
부엉부엉마법으로 부엉이를 불러서 수정구를 들려주고 멀리멀리 떠나보내는 스승님께 공손하게 아뢨다.
"불러봐."
"첫번째 용의자. 크로노스의 콜린 마커스. 10년 전에 길드에 가입한 수석 마법사예요. 연구 분야는 정신과 마법의 상관관계라고 합니다. 최근에 길드 도서관에서 생명마법에 관해 조사했다고 해요."
티모시 리클렌이 고개를 열심히 저으며 부정했다.
"세상에, 콜린이라니요. 오메르드 영애. 그가 자칫 위험한 영역으로 빠질 수 있는 분야를 연구하는 것은 맞지만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살펴봐야 알 일이고. 다음."
"두번째 용의자. 베르너의 제이콥 브론슨. 8년 전에 길드에 가입한 마법사예요. 치료마법 전문이라고 합니다. 오래전에 길드에서 나와 오르타 가문에 취직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논문 한 번 안 내고 있다고 하네요."
"미친 놈. 갈 데가 없어서 오르타에 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는 스승님께 방긋방긋 웃으며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 얼굴을 보고 정색한 스승님이 다시 계획서에 코를 박았다.
"다음."
"세번째 용의자... 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크로노스의 티모시 리클렌 입니다."
"뭐?"
모두가 경악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특히 알버트는 피뇨르 남작의 뒤에서 고개를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일단 말은 해 둬야지 내가 안 잘리는데. 저 오라버니는 에스메랄다가 절대로 안 죽게 해준다고 약속하셔서 내 밥그릇을 챙겨야해요.
"제자야. 미쳤냐?"
"아니요. 그건 아닌데 마법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간에 시설에 출입해서 한번 꼽아봤어요. 이거 말 하면 또 나만 바가지 긁을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수긍하고 다시 계획서에 코를 박는 걸 보자니 부아가 치민다. 진짜 잉크 다 마르기 전에 얼굴 확 밀어서 글씨 뭉개버리고 싶다. 곱게 정리해둔 보고서를 책상위에 슬쩍 올려놓고 옆에 서서 스승의 반응을 살피려니 맞은편에 서 있는 티모시 리클렌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방금 전에 그쪽을 용의선상에 올린 당사자로서 매우 쑥쓰러워 눈을 돌리고 스승이 옆에 쪼그려앉았다. 원래부터 내 업무는 스승에게 날아오는 짹짹이를 받아서 정리하고, 잔심부름이나 하는 거다. 이제부터 짹짹이가 쏟아지듯 몰아칠테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오메르드 영애."
"네. 리클렌 공자."
"퇴근 후에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이야기좀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뭘 잘못했다구요? 떨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으니 저쪽에서 알버트가 용기내서 외쳤다.
"메, 메리는 저랑 선약이 있다구요! 오랜만에 만난 남매가 우애를 나눌 시간을 빼앗지 마세요!"
알버트...! 감동이 파도처럼 쏟아진다! 티모시 리클렌도 납득했는지 순순히 물러났다. 한참 서류랑 씨름하던 스승이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쳐다봤다.
"저놈이 네 오빠냐?"
"동생이예요!"
"누나예요!"
헉, 알버트. 아무리 누나가 좋아도 앞에 상사가 있는데 그러면... 마음씨가 쓸데없이 넒은 피뇨르 남작은 허허 웃고 우리 스승만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뭐라고 했냐."
"그렇다구요. 그러니까 저는 숙소에서 안 잘거예요. 찾지 마세요."
"잘됐다. 나도 거기서 자자."
"영감님. 우리 가문 이름 들어봤잖아요."
"뭐, 길드보다는 낫지 않겠냐."
그건 맞아요. 부정할 수가 없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스승이 그럼 됐다며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빛이 번쩍이더니 사람이 튀어나왔다. 내가 애타게 찾던 마르그리트님이 드디어 납셨다.
"왔냐."
"클로드! 네 제자가 실수한 것 아니야?"
"내 제자가 실수할 리가 없잖아! 저 팔푼이가 네 반푼이랑 똑같은 줄 아냐!"
졸지에 반푼이가 된 불쌍한 앨리스에게 눈인사로 안부를 전했다. 요즘도 실수가 잦은 모양이다. 나랑 똑같네. 흐흐. 왠지 동질감이 생긴다.
"그렇긴 하지. 오메르드. 용의자가 나왔다지?"
"네, 옥사나님. 자세한건 저 서류를 봐 주시고..."
"옥사나? 마르그리트 그레트헨?"
피뇨르 남작이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합니다. 파트론 제국 귀족이 이렇게 다짜고짜 처들어올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길드 사절단을 대표로 사과합니다. 그래도 길드의 이름으로 활동 중일때는 절대로 남의 제국 일에 간섭 안한다는 조항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리 저쪽이 범죄왕국이라지만...
펄펄 뛰는 옥사나님을 열심히 말리는 앨리스에게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다. 네 스승도 답이 없구나. 나는 다시 한 번 단호하게 손을 휘둘렀다.
"정신차리세요!"
"그래. 화를 내서 해결될 일이 아니지. 그런데 올리비아는 자기 나라 일인데 왜 안 오는거야?"
궁시렁거리면서도 내가 복제해온 마법진 기록을 새로운 마법진에 옮겨서 하나하나 살피시는 것이 역시 수장은 짬밥만으로는 못하는 거구나 싶어졌다. 혼란한 상황이 어느정도 진정되었다 싶어지니 노크소리가 들렸다.
"무슨일인가?"
"황녀전하께서 상황 보고를 위해 알현하라십니다."
"다녀오세요."
리클렌 도련님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메르드 영애도 함께 오시랍니다."
야 황제 딸이면 다냐? 아 왜. 진짜 왜. 니 인생만 챙기지 말고 내 인생을 좀 도와줘라. 순순히 끌려가고 있지만 내 마음이 너무 무겁다. 생전 처음 보는 호사스러운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리는데 지금까지 조용하던 티모시님께서 말을 걸어오신다.
"영애."
"네. 말씀하세요."
"빅토리아와 친하게 지내신다 들었습니다."
"네. 그렇지요. 가장 친한 친구일거예요."
티모시 리클렌은 대놓고 짜증은 못 내고 은근히 돌려까기를 시도했다.
"요즈음 빅토리아가 이전과 달리 의젓해졌다는 것 아실겁니다. 그런 상황에 영애처럼 자유분방한 마법사가 주변을 맴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서로 좋을 것이 없겠지요."
"사실, 저는 별 생각이 없는데 비키가 좋다고 매달리는 거라서 말입니다. 공자께서 잘 말해서 달래보세요."
"제가 들은 이야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뭐... 거리에서 곤란하던 차에 도와줘서 고마운 것은 알겠지만, 길드를 소개해 준 정도면 충분한데 우리 집안을 아예 엮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 조금 곤란하네요. 이쪽 입장도 있고..."
미안하다, 오라버니. 거짓말이다. 오히려 우리가 빅토리아한테 많이 매달리고 있다. 이정도로 봐 달라. 마차가 멈추자마자 밖으로 튀어나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원 한쪽에 자리한 테이블에 앉아계신 우리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황녀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황녀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오느라 수고했다. 조사는 얼마나 진행되었느냐?"
왜 나는 불러놓고 정작 쳐다보는 건 티모시 리클렌님인지. 억울하지만 조아린채로 기다렸다.
"보고드린 것 이상의 진척은 없었사옵니다. 아무래도 조직적으로 은폐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허어..."
안타까워하며 티모시 리클렌을 짠하게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있는 상자를 우리쪽으로 밀었다.
"그대의 업무가 과중한 듯 하여 걱정이 많다. 위로차원에서 이것을 내리니 사양말고 가져가거라."
"황송하옵니다."
받은 자리에서 바로 상자를 연 오라버니께서는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황녀를 쳐다봤다. 근래에 내가 본 황녀의 표정 중에서 제일 밝고 화사한 얼굴이었다. 내가 잘못 본 건지 나도모르게 각성 마법까지 걸고 다시 봤는데 그대로다. 세상에. 평소 두통으로 고생하는 황녀가 사용하는 목걸이었다. 온갖 좋다는 마법은 다 걸어 피로회복과 편두통에 그렇게 좋다던데! 디자인은 미묘하게 다르지만 똑같은 목걸이라는 것은 황성 연회에 한번이라도 와 본 귀족이라면 전부 알 수 있을거다.
"전하. 이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사양말게. 특별히 그대 취향의 디자인으로 만들었으니."
차마 거절도 못하고 당장 착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다. 내가 슬쩍 한마디 보태려니 에스메랄다가 당장이라도 "저 목을 쳐라"라고 외칠것 같은 눈으로 쳐다봤다. 꼬리를 말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일 회의가 있지. 그때 꼭 착용하고 오게. 나는 효과를 잘 모르겠으나, 그대가 효과를 보는지 궁금해."
"...예, 전하."
"그러고보니, 오메르드 영애. 아르카나학파 수장의 제자로 들어갔다지? 제국의 동량에게 치하라도 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다."
아. 나 방치중 아니었니. 나도 네 관리대상이었나.
"네. 우연찮은 계기로 소개받게 되어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기대가 많네. 그대의 가문과 제국을 위해 노력하게."
"예, 전하."
그 말은 네 미래와 내 목숨을 위해 노력하란 말이렸다. 그런 당부 안 해도 나도 죽기 싫으니까 열심히 할 거다. 걱정마시옵소서, 전하. 영 미덥지 않아 하는 에스메랄다를 한번 쏘아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빅토리아가 오메르드 쌍둥이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흔들던 편지를 앞에 두고 원수인 양 쳐다보고 있는 걸 벌써 세시간째 보고있자니 슬슬 우리 연약한 아가씨 눈 건강도 걱정스럽고, 대체 무슨 내용인지 짐작도 안 갈 정도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샐리가 자꾸 눈치를 준다. "주인이 기분이 안좋으면 기쁘게 해 드리는 것도 사용인의 의무예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빅토리아가 있어서 참고있는거다.
"아가씨. 그러다 몸 상하시겠어요. 그러지 말고 잠깐이라도 정원을 좀 걸으셔요."
"정원... 정원! 그 나쁜 계집애!"
정원이 트리거였나! 샐리는 이제 눈빛으로 살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려봤다. 씩씩거리는 빅토리아에게 부채질해주며 열심히 달랬다.
"싫으시면 마리아 영애를 뵈러 가는 건 어떨까요?"
"아냐. 마리아한테 화풀이 할 수는 없지. 정원으로 가자."
"네, 아가씨."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를 팔아 무사히 정원으로 유인해냈다. 산책을 좋아하는 빅토리아를 위해 영지 저택에 대규모 온실까지 만든 리클렌 백작가는 눈이 쌓이지 않는 수도에서는 상록수를 심어 언제나 푸른 정원을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정말 내가 믿을 사람을 믿어야 했는데."
"아가씨. 진정하세요."
"진정할 수 있겠니? 내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는데? 이 빅토리아 리클렌이?"
아무래도 모든 경우의 수를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걸 두 오메르드가 산산이 부숴버려서 충격이 큰 모양이다. 씩씩거리며 정원을 한바퀴 돌고 나서야 지쳐서 그런지, 화가 풀렸는지 조금 진정한 듯했다. 우리 아가씨도 참 문제다. 내 기억에는 난 안 저랬었는데.
"너무 속상해. 그런데 대화가 통하는 몇 없는 사람이 황녀야. 답답해 죽겠어."
"저한테라도 털어놓으세요."
"너한테?"
아가씨가 코웃음쳤다.
"심부름 하나도 제대로 못해서 일을 키운게 누구였지?"
"헉, 알고 계셨어요?"
짜증이 가득한 눈으로 혀를 차고 아가씨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가 누굴 믿고, 누구한테 의지하겠어. 역시 내가 믿을 건 부모님과 오라버니들 뿐이야."
정말 미안해요.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어릴적부터 평민답지 않게 살다보니 아직도 가끔 내가 귀족인 줄 알아요. 열이 나는지 벗어던진 숄을 주워 다시 걸쳐주고 뒤를 따랐다.
"속이 타서 안되겠다. 말이나 타야겠어."
"아가씨. 그 차림으로는 위험해요!"
"그럼 네가 탈거니?"
흉흉한 눈빛 너머로 샐리가 보인다. 샐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클라렌스! 정말 당신은 사용인이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가요? 어떻게 아가씨가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승마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어요? 제가 해고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아가씨 곁에서 떼어놓겠어요!" 그리고 샐리는 다른 리클렌을 찾아 복도를 종종종 뛰어간다. 안돼!
"할게요. 제가 할게요."
"탈 줄은 아니?"
그럴 리가 있겠니, 아가씨야. 내가 평민이라고요. 그래도 이전 삶에서 미련이 안 남을 정도로 타봤으니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클라렌스. 허리."
"히익!"
"무서워하면 말이 멋대로 움직여. 똑바로."
"자, 자, 잘못했어요 아가씨.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 으악!"
은근슬쩍 편자에서 발을 떼고 내려오려니 아가씨가 고삐를 바짝 쥐었다.
"안돼. 넌 오늘 승마천재가 되는거야."
"처음부터 못 탔는데 어떻게 천재가 된다고 그래요!"
"응... 지금부터 될 거야."
"살려주세요. 실수 안 할게요. 제발."
아가씨는 내 귀에 속삭였다.
"네 기억속의 승마실력이 보일 때까지 돌거야."
"왜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로 해주세요. 제발."
"응... 너는 이제부터 내 짹짹이야. 짹짹 해봐 짹짹."
서늘하게 웃으며 자기 머리에 꽂고있던 하얀 새 모양 머리핀을 내게 달아줬다.
"빅토리아. 잠깐만 이야기좀 하자꾸나."
승마장 입구에서 급하게 찾는 큰 도련님의 목소리에 정말 아쉬워하며 아가씨는 표정을 고치고 평소처럼 순진한 얼굴로 걸어갔다.
금지 마법 사건이 발생한 지도 벌써 세달이 흘렀다. 그 사이에 내 부탁을 받아 티모시 리클렌이 아르카나와 싸운 올리비아를 열심히 설득해 데려오고, 용의자 추적을 시작했다. 명목상 용의자이자 밝혀져서는 안 될 또다른 범인 티모시는 내 옆에 잘 붙어있으니, 오르타 공작의 수족이라는 것만 붙잡아온다면 쉽게 끝날 일이렷다.
"리클렌 영식."
"예, 황자 전하."
"요새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아. 앞으로도 자주 만나면 좋겠네."
물론 만나고 있는 티모시 리클렌은 출근길이 지옥길일 것이지만. 그의 목에서 빛나는 목걸이를 한참 노려보던 루드비히가 제 얼굴을 가장 귀엽게 만드는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누님. 그러고보니 곧 누님의 생신이 돌아와요."
"그러고보니 그렇구나. 벌써 해가 지났으니."
올해부터 쉴 새 없이 몰아칠 사건들에만 집중해 정작 연초부터 다가오는 내 생일을 잊고 있었다. 연회는 사용인들이 알아서 준비할테니 나는 귀족들만 상대하면 될 일이다. 어색하게 앉아있는 리클렌을 힐끗 쳐다봤다.
"아바마마도 아바마마지만, 이번 연회에는 내 귀여운 친구가 어떤 선물을 줄 지 궁금하구나."
"리클렌 영애 말이지요?"
"그래. 영식도 연회에 오는가?"
기대하는 듯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손을 쥔 루드비히의 손에 힘줄이 돋았다. 빨리 대답하는 편이 좋을텐데. 실망한 듯 눈을 내리깔자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아 어려울 듯 합니다."
"대체 언제쯤 끝난단 말이냐. 서류가 줄어들지를 않는구나."
"송구합니다. 빠른 시일 내로 범인을 잡아내보이겠습니다."
어림없는 소리. 작손이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던가.. 이번 사건이 터진 것처럼 얻어걸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반년은 더 고생해야 할 테다.
"그런가. 그렇다면 내 생일선물로는 범인을 대령해오도록 하라."
"예?"
진행과정을 알고 있는 루드비히가 환하게 웃으며 부추겼다.
"좋은 생각입니다, 누님. 그렇게 하도록 하게. 리클렌 영식."
"그, 그..."
"역시 무리인가보구나. 무리하지 말거라."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꼭 잡아오라며 환하게 웃는 루드비히와 눈이 마주쳐버린 그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답은 곧잘 하지만 아마 티모시 리클렌을 연회에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곁에 서 있던 시종이 회의시간이 다가옴을 알렸다. 조금 더 놀리며 아랫것들에게 내가 저 자를 연모한다고 광고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일할 시간이다.
회의는 내 예상대로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귀족들과 분노가 머리 끝까지 올라온 마법사들, 이제 그만 퇴근하고 싶은 기사들의 원성으로 소란스러웠다. 시종이 황제와 그 자식들의 등장을 알리자 언제 그랫냐는 듯 조용해지고, 우리가 앉고 나서는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얼굴로 부황을 올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보고를 들은 지도 벌써 세 달이나 지났다. 그간은 에스메랄다에게 맡겨왔으나, 제국의 주인으로서 일의 경과는 알아야 하니 그동안의 성과를 소상히 보고하라."
그 순간 할 말이 많던 어른들이 꿀 먹은 어린애 처럼 입을 다물고 서로 시선을 피했다. 그나마 용기있을 줄 알았던 아르카나마저 새벽녘의 나팔꽃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 뒷목이 당겨왔다. 내가 그 면면을 하나하나 노려보며 소리없이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당장 아무나 말해.'
내 눈빛에 모두 눈을 돌리다 먼 친척 고모님께서 채 피하지 못하고 마주쳤다. 애석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다 곧 체념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흐, 흠. 폐하. 올리비아 하틴 로슈민 크로노스입니다."
"오, 올리비아. 그래. 네가 말해보거라."
"중간에 폐하께 올라간 보고서에서 보았다시피, 리클렌 공자가 용의선상에 오르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용의자를 둘로 압축해 한명은 소환하여 심문을 마쳤고, 나머지 하나는 소환명령에 답하지 않은 채 행방이 묘연합니다."
"심문 결과는 어떠했는가."
"아주 근소한 차이로 금지 마법이 아닌 마법을 실험해본 것이었습니다. 다만, 시국이 이러한 관계로 주의를 주고 자택에서 근신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잘 했다."
우리 아바마마께서는 어릴 때부터 그리 아끼던 먼 친척동생이 똑똑한데다 말까지 잘 하니 좋아서 어쩔줄 몰라 하신다. 정작 중요한 건 잊어버리셨나. 루드비히에게 눈짓했다. 우리 귀여운 황자께서 눈치채고 적당히 말을 던졌다.
"크로노스. 출석하지 않는 자는 누구입니까."
"베르너의 제이콥 브론슨. 오르타 공작의 마법사입니다."
"오르타..."
회의장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오르타. 직접 정계에 진출하지 않으되 막대한 금권으로 추종자들을 내세워 귀족사회를 흔드는 이들. 그 금권은 대공가로서도 버거울 정도여서 황제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업다.
"제 아내가 건강이 나빠 마법사를 고용했다던 오르타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폐하. 제 부인을 보살필 마법사가 한명 뿐이라 보낼 수 없다 거절중이라 합니다."
"사안이 위중하니 휘하의 마법사를 보내주면 되겠는가."
저쪽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마르셀 남작이 날벼락에 화들짝 놀랐다.
"폐하! 지금 황실의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지킬 최소한의 인력을 제외하고는 수사에 전념중이옵니다!"
"제국에 인재가 그리 부족하단 말인가."
아. 이 타이밍은. 우리 아버님께서 현실이 너무 매서워 슬퍼할 때 자학의 시작을 여는 말머리. 재빨리 아바마마의 귀여운 딸 에스메랄다를 연기했다.
"다 황녀인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용서하소서."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이겠느냐.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황자인 제가 위신을 세우지 못하는 탓입니다."
루드비히까지 재롱을 떨어대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셨는지 얼굴이 풀렸다.
"어찌 하면 좋겠는가. 시간이 이리 지났는데 계획이 있을 것 아니냐."
"제일 간단한 방법은 오르타 공작가에 마법사를 보내고 데려오는 것이지요. 허나 필시 폐를 끼칠 수 없다며 거절할 테니 불가능하지요. 차선책으로는 사건을 지휘중인 마법사 길드의 관련자가 직접 공작령으로 찾아가면 되겠지만..."
내 말에 아르카나의 두 마법사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 옆에서 곰곰히 듣고 있던 크로노스와 옥사나마저 얼굴을 찌푸렸다. 제 잘못임을 아는 베르너만이 이를 아득아득 갈고 있었다. 전 세계의 무력의 반절이 반 협박을 하는데도 숨으려 하다니. 이러니 저러니 해도 칼 오르타의 배짱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나 같으면 벌써 목을 맸을텐데. 물론 내가 황제였으면 꿋꿋이 버텼을거다.
"직접 다녀오고 싶다는 말이냐?"
"아바마마도 참. 제가 어찌 간단 말입니까. 리클렌 영식을 보내야지요."
"아. 리클렌 영식. 여기에 있더냐?"
"예. 여기 있습니다."
부황이 흐뭇한 얼굴로 티모시 리클렌을 보다 목걸이를 발견하고 나를 쳐다보셨다. 모르는 척 빙긋 웃으며 아바마마의 손을 잡았다.
"아바마마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이 일을 마무리짓겠사옵니다."
"음... 그래. 너만 믿으마. 에스메랄다."
제가 꼭! 잡아서 리클렌 영식이랑 같이 대전에 들테니 걱정 마시옵소서. 티모시 리클렌이 복잡한 눈으로 우리를 힐끔거리는 것에 밝게 웃으며 대응했다.
우리들이 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유감스러웠던 점은 각자 자신이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죽음이 사실은 어떤 빌어먹을 놈의 농간 때문에 벌어졌고, 그 이득을 누가 보았는지를 알 수 없으니 골치아플 수 밖에. 가장 늦게 죽은 내가 쥐어짜낸 기억을 토대로 하면, 지금의 계획도 그럭저럭 봐줄 만 한 것이다. 죽을 상을 하고 승마연습 중인 클라렌스를 보고 있으니 기분 전환도 되고, 머리도 좀 돌아가는 것 같다. 슬슬 빈센트 오라버니가 도착할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어째 늦으시네.
"빅토리아. 네가 에스메랄다 전하께..."
"작은 오라버니는 언제쯤 도착한대요?"
"... 늦어도 저녁식사 전까지 도착한다 했다. 빅토리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저도 몰라요. 오히려 전하가 오라버니를 설득해달라시는 걸 거절하느라 혼났다구요!"
미안해요. 사실 나중에는 내가 더 부추겼어요. 오라버니가 침울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댔다. 불쌍한 우리 오라버니. 멍청한 동생 때문에 인생 말아먹을 뻔했는데. 그래도 역적으로 몰려서 형장에 오르는 것 보다는, 황녀와 스캔들이 터지는 게 낫지 않아요? 힘내.
"혹시 마음에 둔 영애가 있었어요?"
"응? 아, 아니."
"정말?"
뚫어지게 쳐다봤더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누굴까.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궁금하네. 오라버니한테 머리를 기대고 다리를 살살 흔들었다. 좋다. 앞으로도 쭉 이럴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나는 바쁠테지만 나는 바쁘지 않으니까 괜찮아. 눈을 감고 햇볓을 쬐고 있으려니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키."
"빈센트 오라버니!"
티모시 오라버니를 밀쳐내고 일어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먼지를 뒤집어쓰고서 나를 끌어안지 말란 말이야. 화를 내고 싶었지만 너무 오랜만이라서, 정말 오랜만이라서 참으려고 했는데 멋대로 눈물이 쏟아졌다.
"비키. 이 오라버니가 그렇게나 보고싶었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끌어안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괜찮은 척 할 수 있어서 괜찮은 줄 알았지만 아니었나보다. 나 생각보다 더 힘들었나봐. 그냥 반가워서 우는 정도로 끝내고 싶었는데 그간의 서러움이 다 터져나오고 있다.
"형. 빅토리아한테 뭐라고 했어?"
"그럴리가! 그냥 서로 한탄하고 있었어. 너 때문이다."
"빅토리아. 내가 잘못했다. 기사단은 때려치고 수도에 있을 테니 그만 울어."
빈센트 오라버니가 먼지투성이 손으로 어쩔줄 몰라서 손만 들썩이다 손수건을 꺼내서 눈가를 훔쳐줬다. 먼 기억 그대로 따뜻한 눈길이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내 생애 마지막에 보았던 그 눈빛이 아니다. 부디 이번에는 빈센트 오라버니가 자기 손으로 가족들을 죽이지 않기를.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 어지러움을 견디고 오라버니와 눈을 맞췄다. 걱정이 가득한 파란색 눈동자를 마주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할 수 있어. 못 하면 누구 하나를 버리는 수밖에. 오라버니에게 안겨 방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버려야 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첫번째는 아마 나 일거라고.
얼마나 오래 잠들어있었는지 눈을 떴을때는 방 안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클라렌스는 부루퉁한 얼굴로 내 옆에 앉아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아가씨. 너무하신거 아니예요? 어떻게 저를 말 위에 두고 그렇게 가버리실 수 있어요?"
"아... 미안."
"몰라요. 도련님들은 서재에서 마님들과 이야기중이세요."
"고마워."
클라렌스의 부축을 받아 앉았다. 맞은편 벽난로 가에 선물더미가 쌓여있는 걸 보니 그새 누가 내가 쓰러졌다 소문을 내고 다닌 모양이다.
"오메르드 영애와 공자가 다녀갔어요. 내일 오르타 영지로 떠나야 해서 잠깐 들르셨어요."
"오르타에?"
왜? 무섭게 지옥으로 걸어들어가? 클라렌스가 준비해둔 드레스를 두 벌 가져와 들어보였다. 오늘은 기분도 안 좋으니 화사한 색으로 하자. 먼지투성이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클라렌스가 준비해준 드레스에 몸을 넣었다. 등 뒤에서 단추를 하나씩 채우며 클라렌스가 소근거렸다.
"작손이 범인을 안 내놓으니 처들어간대. 그 김에 영지를 이 잡듯이 뒤집을거라는데, 노골적으로 헤집어서 역모 증거라도 찾아낼거라나봐."
"위험한 건 둘째치고 힘들텐데. 보통내기여야지."
"그건 알아서 할 일이지요. 호호."
메리가 고생하는 게 그리 좋으니. 클라렌스는 신나게 웃으며 허리춤의 장식을 졸라맸다. 너무 조여서 팔을 찰싹 때리고 나서야 느슨하게 묶었다. 내일 당장이라. 프라우를 떠나면 도와주기 힘드니 배웅이라도 나가야겠다.
"참. 황녀님이 첫째 도련님께 달콤하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이예요?"
"벌써 거기까지 퍼졌니?"
"헤헤. 아가씨가 시키신 대로 성에 드나드는 하녀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있거든요."
"장하다. 그래, 맞아."
"헉!"
놀랄 줄은 알았지만 정말 놀라서는 질린 얼굴로 가까이 붙어서 허리를 살살 찔러댄다.
"진짜? 오라버니들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내가 나중에 그럴 줄은 몰랐어. 나 괜찮은거지? 어디 이상해진 거 아니야?"
"아냐. 재주껏 더 퍼트려. 평민들까지 알 정도로."
"그런 건 내가 또 잘 해! 맡겨만 주세요 아가씨!"
정말 너무 잘해서 걱정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사실만 퍼트려. 그래도 시작도 전에 기를 죽일 수는 없으니 부드럽게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래. 너만 믿는다."
배시시 웃으며 클라렌스가 노크했다.
"백작님.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거라."
클라렌스가 문을 열었다. 얼른 들어가 빈센트 오라버니에게 다시 한번 안겼다.
"비키. 지난번에 크게 앓고 나서 자주 쓰러진다고 들었어. 몸이 그렇게 안좋아?"
"아니. 그냥 너무 반가워서 우는 바람에..."
부끄러우니까 우리 그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오라버니들을 올려다보았다. 부모님께는 미안하지만 두분께는 안타까운 마음 뿐이고, 오라버니들에게는 미안하다. 앞으로는 정말 착한 동생이 되어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빈센트 오라버니가 내 머리를 배배 꼬면서 장난을 친다. 음. 작은 오라버니한테는 응징도 조금 하자.
"내 생각에도 그렇단다, 아가. 당분간 파티는 물리고 쉬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빅토리아."
"아니, 곧 마리아 생일이기도 하고..."
내가 메리 오메르드는 몰라도 전생 현생 통틀어 첫번째 친구였던 마리아의 생일 연회만큼은 빠질 수가 없는걸요. 티모시 오라버니는 마리아라는 말에 눈을 번뜩이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같이 갈 테니 조금이라도 힘들어 보이면 바로 돌아올거다."
"네!"
음? 뭐지? 왜? 오라버니 왜 마리아라는 이름이 나오니까 갑자기 내 편을 들어주시지요. 안돼요. 설마 내 친구인데? 느낌이 심상치 않아 꺼림칙하긴 하지만 마리아의 연회에서 지금까지 발표된 적 없는 새로운 마법이 발표될 거다. 티모시 오라버니가 본다면 금방 눈치채겠지. 아무래도 더 앉아있다간 이것마저 못 하게 하고 영지에서 한동안 요양하라며 들들 볶아댈 것 같으니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맞춰야겠다고 둘러대로 얼른 도망쳐나왔다. 영 못마땅한 네 사람의 눈총에 내가 못 버텨서 도망치나? 내가 누구냐. 리클렌 가문의 탕아 빅토리아 리클렌이다. 원하는 건 언제든 얻어내고야 말지. 마리아의 가장 친한 친구로서 그 옆을 지켜야 하니 에스메랄다의 탄신연회때 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을거다. 밖에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눈이 의욕으로 불타오르는 클라렌스를 데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번에는... 샐리의 의견이 필요할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이야."
클라렌스가 어찌나 비장한지 나도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우선은 더 급한 것이 있으니, 마땅한 손수건을 찾아둬야겠다.
다음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오랜만에 꽃단장을 했다. 많은 영애들이 사모하는 오메르드 공자가 출장을 가니 마음이 찢어지는 영애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도 그 대열에 끼어서 해 줄 말이 있기도 했다. 손수건을 줄 용기도 없이 무작정 나오기만 한 영애들을 뚫고 나아가 말의 콧잔등을 쓸어주고 있는 긴 망토에게 다가갔다.
"메리. 알버트는 어디에 있어?"
"오, 내 레이디. 메리는 저쪽에 있어요."
남장도 안 하고 뻔뻔하게 구는 메리의 등을 찰싹 때렸다. 엄살을 부리며 깡총깡총 뛰는 메리를 붙잡아세웠다.
"장난치지 말고. 할 말 있어."
"나는 내 하나뿐인 친구가 배웅 오는데 아무것도 없이 올 줄은 몰랐네."
어쩌라는거니... 손을 내밀고 우는 척 하며 손가락 사이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손수건을 올려주고 나서야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뺨에 쪽 소리를 내며 키스했다.
"내 잘못을 잊지 않았으니 죽을 각오로 공을 쌓을게. 너를 위해."
"아냐. 너 자신을 위해서 쌓으렴. 그게 네 가문에 백배 도움 될 거야."
"역시 빅토리아는 너무 상냥해. 알버트는 기사단 쪽에 있어."
"고마워. 몸 조심하고. 연락해."
"응."
손짓 한번에 화살표를 만들어내더니 따라가라며 손을 흔든다. 이런 과도한 친절 할 시간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사고나 안 쳤으면 좋겠는데... 화살표를 따라 걸어가니 부담스럽게 커다란 말들이 무리지어있다. 하필 이 타이밍에 화살표가 사라져버려 멍하니 서 있으니 안쪽에서 알버트가 튀어나왔다.
"비키!"
"알버트. 만나기 어렵네."
"어... 리클렌 공자님들이 무서워서..."
"아. 미안. 자, 이거 선물."
내가 손수건을 건네자 주변에서 영애들이 비명을 지르고, 알버트 뒤의 기사들이 헉 하고 놀란다. 알버트는 거절했다가는 빈센트 리클렌한테 죽고, 받으면 티모시 리클렌한테 죽을 미래 중에 그나마 덜 고통스러울 티모시 리클렌을 선택했다.
"... 고마워."
울먹이는 목소리가 기뻐서가 아니라 우울해서 잠겨있다. 힘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머리를 가까이 붙였다.
"네가 처신 잘 해야해. 어느 영지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오르타 영지에서는 그들이 왕이니까. 메리한테 연락하라고 해뒀지만 나한테 따로 편지해줘. 메리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내 누나지만 부정할 수가 없네. 같이 움직이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막아볼게."
"정말 그나마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다."
"못 믿는구나."
"너희 신용도는 오메르드인 순간에 5할로 시작해서, 지난번 사고로 3할까지 떨어졌어."
"너무해."
너무하든 말든.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아무나 믿을 수는 없잖아. 그 믿음이라는 것이 비밀을 터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놓고 부탁할 수가 없다는 의미인 걸 나도, 알버트도 알고있다. 알버트는 피뇨르 남작의 옆에서 점점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는 빈센트 오라버니를 이기지 못하고 한걸음 물러났다.
"그럼 잘 다녀올게."
"응. 올 때 선물 사와."
오르타 특산물이 오색으로 빛나는 수정이란다. 한층 더 어두워진 안색으로 빈센트는 기사단 쪽으로 돌아갔다. 볼일을 마쳤는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옆에 꼭 붙는 빈센트 오라버니의 팔짱을 끼고 유유히 영애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빠져나갔다.
바람 잘 날 없는 프라우라지만 이번 스캔들은 조금 크긴 했다. 그간 남자라고는 제 동생인 황자를 귀여워 할 줄밖에 모르던 그 목석같은 황녀가 리클렌 가의 첫째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닳고 닳은 귀족들도, 아직은 낭만에 젖어있는 그 자녀들도 모두 기대에 젖어있었다. 과연 황녀의 로맨스가 로맨스로 끝날 것인지, 국혼까지 이어질 것인지 내기하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간만의 즐거운 유흥거리를 유흥으로 여기지 못하는 이들 중에 저기, 아나이스 오르타가 있다. 어찌나 울었는지 부은 눈으로 비극 속 주인공처럼 내 뒤의 오라버니를 쳐다보는데 아무리 눈치없는 마리아라도 힐끔거릴 정도였다.
"빅토리아. 어쩌면 좋니?"
"글쎄. 차마 말을 걸 용기는 없을테니 그냥 둬."
"그래도..."
상냥한 마리아. 정적의 딸한테도 친절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자기 생일을 망치고 있다고 화를 내도 모자랄텐데. 아무래도 끝까지 미안해 할 것 같으니 관심을 돌려버려야겠다.
"넌 친하지도 않은 영애가 친구보다 중요하니? 오늘 내가 널 위해 얼마나 열심히 꾸미고 왔는데. 계집애. 내가 한껏 멋 낸것보다 더 예쁘면 어쩌자는거야."
"오늘은 내 생일인걸. 하루쯤은 비키보다 더 예뻐도 괜찮아."
"맞아. 평소에는 내가 더 예쁘니까 참아줄게."
그 말을 하기 무섭게 제국 최고의 미녀 소피아 고트 영애께서 들어오셨다. 그녀를 보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한번 보니 우리가 싸운 게 다 소용이 없어졌다. 고마워요 소피아. 그래도 생일이라고 조금 덜 꾸미고 왔는데 우리를 굼벵이로 만들었어. 고트 영애가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마리아를 향해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착한 마리아는 고트 영애와도 친했다.
"생일 축하해."
"소피아! 와줘서 고마워요."
"네 생일인데 당연히 와야지."
루이스 차노트에게 시비걸려고 파격적인 패션으로 연회에 등장했던 그날 이후로 칩거하던 소피아 고트가 처음으로 나타난 연회다. 우리 마리아가 오늘 연회에서 제일 예뻤다는 소리는 못 듣더라도 또래 영애들 사이에서 힘좀 쓴다는 얘기는 듣겠지. 나도 이제부턴 미친년 처럼 돌아다니지도 못하는데 무시당하진 않을 것 같다. 다행이네. 소피아 고트는 마리아와 이야기하다 내 옆에 서있는 티모시 오라버니를 보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웃지마. 내 오라버니야.
"아, 참. 오라버니. 선물은요?"
"여기있다."
오라버니가 상자를 건넸다. 내가 어깨에 한껏 힘 주고 있으니 고트 영애도 목을 빼고 쳐다본다.
"마리아. 열 일곱번째 생일 축하해. 선물 받아."
덥석 안겨준 상자를 열더니 마리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전부터 그렇게 가지고 싶다고 노래하던 소린 왕국의 부채다. 마리아의 부모님은 소린을 싫어해 절대로 사주지 않을거라며 벌써 몇 달째 서러워했다.
"티모시 오라버니랑 같이 골랐어. 어때?"
"정말, 정말 예뻐. 고마워 비키!"
"세상에. 이 정도 물건은 나도 처음봐요."
"소린에서도 왕족들한테나 납품하는 장인이 만든 거니까요."
소피아 고트마저 놀랐다. 당연히 예뻐야지. 우리 오라버니가 그거 구하는데 얼마나 썼는데. 공납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우기고 우겨서 담당자와 관계자에게 돈을 먹이고, 장인한테는 몇배로 쳐 줬다. 헛기침을 하는 오라버니에게 마리아가 활짝 웃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냐. 비키의 친구의 생일선물이라면 당연히 구해줘야지."
보자보자 하니까... 뿌듯하게 웃지 마세요 오라버니. 당신 지금 황녀랑 스캔들 난 중인데 내 친구한테 그렇게 상냥하게 대하면 일 더 커지잖아. 내가 슬쩍 옆구리를 꼬집고 나서야 표정을 수습하고는 평소의 무뚝뚝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네. 그렇게만 계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힌트 다 필요 없고, 차라리 빈센트 오라버니랑 올 걸 그랬어. 이미 소피아 고트는 눈치채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보고있다. 망했어, 망했다고. 이제는 오라버니도 날 안 도와준다.
"그건 그렇고, 마리아. 신기한 구경거리도 있을 거라면서. 언제쯤 보여줄건데?"
"음... 지금쯤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마리아도 신경쓰이는듯 살짝 찌푸린 얼굴로 무대쪽을 바라봤다. 설마 영지로 사람 보냈다고 바람잡이까지 빼돌렸나. 설마. 오르타 공작이 아무리 조심성이 대단하다 못해 소심하다고는 해도 자기 권력이 달린 일을 포기하는 사람은 아니다. 역시나, 머지않아 무대 위에 한껏 멋낸 중년 마법사가 올라왔다.
"특별한 날을 맞이한 영애를 위해 오늘 제국 최초의 마법인형을 소개합니다!"
광대처럼 과장된 동작으로 인사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에 미리 깔아둔 천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는지 주저앉은 인형이 나타났다. 관절이 멋대로 꺾여있는 인형을 향해 한번 손을 휘두르자 인형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팽그르르 돌던 눈동자가 정면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뻣뻣하게 움직인 인형이 예의바르게 인사한다.
"이 아이의 이름은 엘피도. 저의 30년간의 연구의 정수가 담긴 인형이지요. 엘피도가 오늘 밤 여러분의 기억속에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길 것입니다."
인형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았다. 갈피를 못 잡고 움직이던 눈동자와 마주쳤다. 순간 싸늘한 기운이 맴돌아 섬뜩해 나도 모르게 오라버니의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도 반사적으로 내 손을 쥐었다.
"빅토리아. 왜 그러니?"
"눈을 마주쳤어요."
"괜찮아. 인형일 뿐이란다."
내 손을 토닥이면서도 눈은 무대에서 떼지 않았다. 인형이 우아하게 춤을 추다 상대도 없이 홀로 왈츠를 추었다. 구역질이 올라오지만 드러낼 수 없었다. 내 손을 쥔 티모시 오라버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손을 놓고 팔짱을 끼며 오라버니에게 기댔다.
"정말 감쪽같아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래. 그렇구나."
모두가 신기해하며 박수를 친다. 어지럽게 울리는 박수 속에서 이 상황에 떨고 있는 것은 나와 오라버니 둘 뿐이었다. 겨우 오라버니에게 기대어 끔찍한 시간을 버티고 나서는 무슨 정신으로 저택까지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수도는 때 아닌 인형극 열풍이다. 그 마법사의 인형극을 보지 못해 안달 난 귀족들도 많았다. 그 중에 자신의 연회에 마법사를 초대하지 못한 사람들은 평범한 인형극으로 대신하려는 듯 길거리의 예술가들을 불러오기도 했다. 세상이 미쳐가나. 평민들이나 보는 천박한 예술이라고 무시하던 건 언제인지 기억도 못 하나. 다행히도 나는 그날 이후로 파티는 전면 사절중이라는 점이다. 정말로 피곤하기도 했고, 그 엘피도라는 인형을 다시 한 번 봤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사건 조사로 바쁘고, 어머니는 그 공백을 메우느라 집안 온갖 대소사에 치이는 중이신데 혼자 편히 지내려니 미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아가씨. 가만히 좀 계셔보세요."
"만날 사람도 없는데 그렇게 꾸며서 어디에 쓰니."
"아름다움은 수많은 관리에서 오는 법이예요."
"글쎄. 고트 영애는 어릴때도 그렇게 예쁘더라."
"자꾸 비교하지 마시라니까요?"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빗어야 한다, 향유를 발라야 한다 난리를 피우니 사실 쉬어도 쉬는 기분도 안 들어.
"그리고, 곧 빈센트 도련님이 다시 떠나시잖아요."
"뭐? 왜?"
"어제 식사시간에 또 다른 생각 하셨죠! 오르타 공작령에 파견된 조사단을 지원하러 간다고 하셨잖아요."
아 맞다. 왜 오라버니가 가야 하냐고 화내면서 에스메랄다한테 편지할거라고 날뛰다가 혼났지. 요 며칠 얌전하게 굴지 않았으면 또 무리한다고 엄청 혼나고 지금쯤 침대에 누워서 좌측 샐리 우측 클라렌스의 감시를 받고 있었을거다. 이틀 건너 한번씩 오는 짹짹이에서 아무리 뒤져도 모르겠다고 징징거리더니 결국 쫓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싫다. 우리 오라버니 쉬지도 못했는데."
"어쩔 수 없지요. 황제폐하께서도 빨리 처리하셨으면 하는 눈치신데."
그래. 얼른 치워버리자. 그리고 빛나는 내일 찾자. 은근슬쩍 손톱 관리 도구를 들고오는 샐리를 뿌리치고 냉큼 책상 앞에 앉았다. 아무리 짹짹이가 온다고 해도 그건 그거고, 오라버니가 간다고 하면 또 편지를 보내줘야지. 아껴뒀던 좋은 잉크를 꺼내서 첫문장을 적어보았다.
사랑하는 내 메리에게.
안녕 얘들아. 너희들의 비공식 물주이자 주인님인 빅토리아란다. 일 하고 있기는 한 거니? 왜 아직도 결론을 못 내고 있어? 너희가 제대로 안 해서 빈센트 오라버니가 거기까지 가야 하잖아. 똑바로 안해?
그래도 너희가 잠깐이나마 수도에 돌아왔을 때는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늘 즐거웠는데. 근데 눈앞에 안 보이니 섭섭하면서도 귀찮은 일은 안 생겨서 참 좋다. 오르타 공작령은 어떻니? 그곳은 늘 기후가 온화하다던데. 여기는 매일같이 눈이 오고있어. 덕분에 연회에 안 갈 핑계도 생기고 좋아.
그나저나, 메리. 내가 지난번에 마리아의 연회에서 이상한 걸 봤어. 인형인데, 사람처럼 움직이더라고. 마법사가 조종한다고 하던데 난 잘 모르겠더라. 그 마법사가 요새 수도를 돌아다니고 있어. 엄청 소름끼치니까 얼른 처리하고 와서 나랑 같이 있어. 나 밤에 자꾸 생각나서 잠도 못 자겠다. 진짜 너랑 같이 있으면 사람들이 알버트인 줄 알고 물러가는 것도 좋고, 알버트랑 같이 있는 기분도 나서 좋단말이야. 빨리와.
참. 알버트한테도 안부 전해줘. 내 손수건에 때 묻은 채로 돌아오면 죽는다고도 전해주고. 그럼 몸 조심히 돌아와.
"알버트. 우리 빨리 처리 못하면 빈센트 리클렌이든, 빅토리아 리클렌이든 둘 중에 하나가 우릴 죽일거야."
편지를 전해주던 빈센트 리클렌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귀찮아 죽겠지만 사랑스러운 동생님의 부탁이라 할수없이 오기는 했는데, 요새 빅토리아가 자꾸 장난질을 쳐서 마음에 안 들게 된 알버트까지 봐야 하니 얼마나 화가 날까. 우리가 미안합니다. 얼른 처리하고 싶은데 천성이 마법사인 나랑 이제 막 종자가 된 알버트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나... 정말 죽을지도..."
"걱정마. 내가 죽더라도 너는 살게 해줄게."
"메리..."
울지 마라. 내가 어깨를 안아주니까 와락 안겨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토닥여주고 일어났다. 아무리 슬퍼도 일은 해야지. 지금까지 샅샅히 뒤졌지만 못 뒤진 곳이 딱 하나. 공작성이다. 황명을 받고 온 조사단을 이렇게 박정하게 대할 줄은 몰라서 크로노스님도 안 모시고 왔는데 말이다. 그래도 오늘 리클렌 백작가의 사람이 왔으니 열어줘야 할 거다.
"스승님. 이제 영주성도 털어볼 수 있어요."
"잘 됐다. 얼른 처리하자."
"그런데 요새 수도에 기묘한게 돌아다닌다는데요."
편지를 건네니 우리 영감탱이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야. 내뺐다. 여기에는 증거밖에 없겠어."
"그렇죠? 망했네, 망했어. 그러니까 내가 올리비아님 모시고 오자 했잖아요."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너무 잘 해서 아직도 현장을 못 찾았네."
중얼거리는 소리를 용케 듣고 사부가 끔찍한 살상마법을 던져댄다. 내가 당신 시종 한 지도 벌써 반년이야. 태연하게 막아내고 바닥에 흩어져있는 서류를 모았다.
"얼른 가요. 의심되는 장소는 따로 있잖아요."
"그래. 가자."
우리 중에 가장 신분이 높고, 끝발도 좀 날려주는 빈센트 리클렌님을 앞세워서 공작성으로 쳐들어갔다. 기사들이 호들갑을 떨며 막아섰지만, 멋진 빈센트님이 꺼내든 칼에 모두가 찍소리 않고 물러났다. 스승님은 자기가 찍어둔 자리로 달려가고, 나는 대충 돈 바른 멋이나 구경하자는 심정으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멀리서 스승이 공을 쳤는지 악을 질러댄다. 내가 그러게 아닌것 같다니까. 알버트의 등을 팡팡 두드리면서 비틀거리다 벽을 짚었는데 그대로 쑥 밀려들어간다. 알버트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는 나를 급하게 끌어안고 그대로 계단을 굴렀다. 다행히도 계단은 길지 않았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붙잡고 앉아서 올려다본 지하실에는 사방에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주저앉아있는 인형들이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눈동자들이 순간 전부 멈추더니 우리를 쳐다본다. 알버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뒤에서 나를 감싸듯 안았다.
"미쳤어 이건."
인형과 눈을 마주친 순간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세상에.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소름끼치는 방에 저주마법을 걸어? 급하게 이동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내 실력으론 알버트와 같이 이동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이딴 곳에 혼자 남았다간 미쳐버릴거다. 마법이라고는 내가 장난처럼 쓰던 부양마법밖에 모르는 알버트의 눈을 가리고 있는 힘을 다해 짹짹이를 불러냈다. 주위에서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 대신 새들이 날개를 휘젓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간신이 손짓을 하자 새들이 일제히 계단으로 빠져나갔다. 짹짹이들이 스승을 발견해 이곳까지 끌고오길. 석상처럼 굳어있던 알버트가 어느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손을 더듬어 나를 붙잡았다.
"괜찮아. 스승님이 구하러 올 거야."
"메리. 절대, 절대로 밑에 보지 마."
"응?"
왜, 하지 말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한번 하게 되지 않나? 나도 모르게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밑에는... 머리속에서 시끄럽게 경종이 울린다. 절대로 사람이 들어오면 안 되는 마법진이다. 글자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구토감이 올라왔다. 내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스승님이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메리! 이 팔푼이가 대체 어딜 간... 이런 미친."
스승님이 급히 내 눈을 가렸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지나가고 탁한 지하실 냄새가 아닌 흙냄새가 났다. 바닥을 짚고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 투박하게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하나,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손이 하나. 왼쪽을 돌아보았다. 스승이 심각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다.
"한달 쯤 되었지?"
"그렇습니다."
"어떤가. 효과가 좋지?"
"예. 덕분에 업무 효율이 증진되었습니다."
티모시 리클렌과 독대하는 것도 벌써 여러번이다. 이제 그는 내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지 않고, 나는 그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과한 장난을 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내가 현 사건에 대해 상의하려 부른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더이상 이 만남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실을 은폐하려 들었다. 내가 자신을 좋게 보고 있으니 아주 좋은 기회이긴 했다. 물론 나는 내 옛 오라버니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나는 그대가 용의선상에 오를 줄은 정말 몰랐다."
"대체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하실 셈입니까?"
"그대가 더는 억울해하지 않을 때까지."
그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표정을 꾸민다. 언제까지 이 연기를 해야 할까. 이제 슬슬 티모시 리클렌도 내가 정말 마음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려 한다. 그 전에 해결되야 할텐데. 갑자기 바깥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황녀전하. 급한 소식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아 짜증난 척 하며 전령을 쳐다봤다. 그 뒤에 따라온 길드 소속 마법사가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로 말했다.
"오르타 공작의 성에서 금지 마법의 사용 흔적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발견 과정에서 오메르드 영식과 영애가 저주 마법에 당했다고 합니다."
"큰일이로군. 회의를 열어야겠어. 피뇨르 남작과 길드측 대표만을 부르게."
리클렌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통신마법을 사용했다. 쓸데없이 사람을 불러 시끄럽게 할 때가 아니다. 소란을 잠재울 거리를 찾아오라 보냈더니 오히려 일을 키워오다니. 대체 오메르드로만 살아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오메르드같을 수가 있는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먼저 이동겠네. 그대는 길드에 들러 자세한 상황을 듣고 보고하게."
이 끔찍한 소식을 빅토리아가 알아야 하는데. 그래야 그 한가한 탕아가 어떻게든 대첵을 세울 텐데 말이다. 뒤에서 시종들이 만류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내 발로 걸어 회의장에 도착했다. 비치된 종이에 간단한 사건의 나열을 적었다. 오메르드. 오르타 공작성 지하. 저주마법. 멍청한 아이는 아니니 이정도면 충분히 이해하고 처리할테다. 가볍게 한번 접어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가 내용이 보이지 않게 잘 접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른 오전에 허겁지겁 달려온 피뇨르 남작과 올리비아 로슈민에게 가볍게 눈인사했다. 뒤이어 들어오는 티모시 리클렌에게 웃어주고 바르게 앉았다.
"다들 모였군. 회의를 시작하게."
"예, 전하."
이전 사건으로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보다 더 무거운 분위기다. 그럴만도 하다. 제국의 귀족이 저주마법에 당했고, 심상치 않은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아직 그 인형들이 무엇인지, 어느 용도로 사용될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 지난 삶에서도 밝혀지지 않았었다. 지난 삶의 나는 독학으로 겨우 마법을 깨쳤기에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회의장에 모인 사람 중 둘 뿐인 마법사인 티모시 리클렌이 심각한 투로 물었다.
"올리비아 님. 아직도 저주 마법을 연구합니까?"
"학문으로서만. 절대로 마법의 구현방법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올리비아 로슈민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제자도 없이 들어와 직접 마법으로 열심히 부채를 부쳤다. 옆에서 피뇨르 남작이 부러워하며 손부채를 부쳤다.
"그래도 제 부관과 오메르드 영애여서 다행입니다."
"무엇이 다행인가. 그들이 죽길 바라기라도 한 겐가?"
어디 감히 내 전생을 욕해. 오메르드를 감쌌더니 피뇨르 남작이 시선을 가만히 두지를 못한다.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에 리클렌 영식이 한숨을 쉰다.
"남작께서 오메르드 영식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심술부리지 마십시오, 전하."
"그대를 봐서 넘어가도록 하지."
피뇨르 남작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 오메르드여서 다행이기는 하다. 그들은 운이 따르지 않으면서 여간해서는 죽지도 않는 이들이니. 사태는 심각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이 회의를 한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우리는 오르타 공작을 잡아들일 힘이 없고, 그는 벌써 수도 내에서 병력을 그러모으며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귀족들이 반란이라도 벌이려는 것이냐며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그들도 목숨이 아까우니 쥐죽은듯 몸을 낮추고 있다.
"올리비아 고모님. 위험한 건 알지만, 오르타 공작에 대해 조사해주세요."
로슈민의 기둥, 크로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전하가 건국왕의 후손에게 명령하지 못할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샅샅히 알아내드리지요."
이 세상의 모든 마법을 안다는 크로노스의 수장이 조사한다면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모두 알아올테다. 그럼 그의 혈통에 대해 알게될테니 황실이 뒤집어지겠지. 그러면 내 죽음에서는 한발자국 벗어나게 된다.
"오르타 공작은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직 수도에는 소식이 퍼지지 않았지?"
"예."
"그렇다면 잠자코 있어라."
"그도 다 알고 있을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움직일 수도 없다. 내가 황제는 아니지 않느냐."
내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후계자로 공표받지도 못한, 아래로 남동생이 있는 황녀. 내 권한이란 황성 내에서나 조금 뽐낼까, 귀족사회로 간다면 어림도 없다. 지금만 해도 나를 어떻게 회유해 제 집안에 시집오도록 하려는 빌어먹을 놈들도 있으니. 사랑에 빠진 영애같은 눈으로 티모시 리클렌을 쳐다보았다. 그가 태연하게 시선을 피했다.
"피뇨르 남작. 그대는 기사들이 술렁이지 않도록 잘 다독이게.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가는 골치아파질테니."
"명심하겠습니다."
"너무 술렁이면 국경 수비대로 배치해버리게. 그곳의 기사들도 쉴 때가 되었지."
할 일이 없어 풀이 죽어 있다가 갑자기 얼굴이 펴서는 신나하는 남작을 두고 크로노스와 눈을 맞췄다. 첫 회의부터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무언가 눈치챈 것 같기도 하지만... 증거도 없이 추궁할 수는 없다.
"잠깐. 리클렌 영식."
"예, 전하."
"영애에게 전해주게. 아무래도 빅토리아가 걱정되어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폐하를 뵙고 설명해두겠네. 그대들만 믿지."
내가 움츠러들면 저들이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턱을 당겨 똑바로 앞을 바라본 채로 회의장을 나섰다. 시녀들을 모두 물리고 초대 황제의 초상이 걸려있는 복도를 지나 문을 열어젖혔다. 창 하나 없이 어두운 방에 누군가 앉아있는 발치만 보였다. 문을 닫고 세걸음 나아갔다.
"어땠느냐."
"제 예상대로입니다. 아바마마. 부디 결정을 내려주세요."
"어려운 일이구나."
"황실과 귀족을 넘어 백성들의 목숨까지 위험한 일입니다. 부디 허락해주세요."
한숨소리가 대답 대신 들려왔다. 하틴 왕조는 오버다이어 하틴으로부터 겨우 6대밖에 내려오지 않아 지지기반이 약하다. 그 사이에서 벌써 30년이나 황제로 살아온 아버지는 많이 지치셨다. 내가 독에 당하고, 루드비히가 밤중에 자객에게 당할 뻔 한 일을 겪으며 그 강하던 분은 사라지셨다. 마지막 책임으로 황위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 전부인 부황께 무리인 부탁인 것은 알았다.
"허락하실 수 없다면, 적어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에스메랄다. 나는 너를 잃고싶지 않구나."
"아바마마. 우리가 칼을 빼들지 않으면, 그들이 우릴 찌를겁니다. 어마마마를 기억하세요."
"아나이스..."
황후. 아나이스 디쳇 하틴. 죄 없이 죽어가야 했던 나의 어머니. 오르타 공작의 손에 새카맣게 죽어야 했던 어머니. 감히 그 이름을 제 딸에게 붙인 치욕을 잊을 수 없다.
"이리 오거라."
부황이 내민 손을 잡고 가까이 다가갔다. 아버지는 나를 곁의 의자에 앉히고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동자로 가만히 바라보셨다. 아버지도 잊지 않으셨다. 자신의 손에 낀 반지를 뽑아 내게 끼워주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셨다.
"해 보거라. 대신 뒤는 내가 지켜주마."
"폐하!"
"너마저 황후를 따라 가버리면 루드비히를 볼 낯이 없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다오."
"절대. 절대로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황위에 오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지켜보시는 아래 하틴의 영광을 널리 알리겠습니다."
"그래. 그리 믿으마."
그렇게 감추려 했던 무거운 소식이 프라우를 덮쳤다. 황실에서 나서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 와중에 준비된 행사에 사람들이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거운 드레스, 무거운 망토. 화려하게 치장된 방에서 한창 준비중인 시종들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얼굴의 수도 시민들도 하나둘 나와 무슨 일인지 구경을 시작했다.
"전하. 하루아침 사이에 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아시지 않습니까."
"그대는 이 사태를 뒤집을 수 있는 묘안이 있는가?"
"그렇다 해도."
"나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했네."
권력이 모자라다면, 더 큰 권력을 끌어오겠다. 그것으로도 모자라다면 다른 이와 손을 잡아서라도 그들을 무너트릴 것이다.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주저없이 타인에게 상해를 입히는 자들을 지배층에 돌아가게 두는 것 만큼은 두고볼 수 없다. 시종이 문 밖에서 시간이 되었다 알렸다. 내가 일어나자 리클렌도 따라 일어난다.
"보필하겠습니다."
"되었네. 일이나 열심히 하게."
"위험합니다."
위험하기는 하다. 원래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사방이 적이 되는 법이다.
"부황께서는 평생 이 자리에 계셨었네. 자식된 도리로 어찌 피하겠나."
문을 열자 웅장한 악기 소리가 울려퍼진다. 티모시 리클렌이 고개를 숙인다. 그의 배웅을 받으며 붉은 카펫 위를 걸었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진다. 인파들 속의 내 적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넣은 것 처럼 당당하게 걸었다. 카펫의 끝에 서서 아버지가 기다리신다.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머리에 어머니가 쓰셨던 티아라를 얹어주신다.
세상에 이런 책봉식이 어디에 있나. 하틴 왕조 최초의 후계자 책봉식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 쇼를 위한 광대가 나다. 나의 티아라도 없이, 보여주기 식의 진행이다. 고르고 고른 시동들이 금화를 던진다. 그 알량한 눈속임에 평민들은 속아넘어갔지만, 귀족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나마 안도한 듯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다다. 모두 기억해두겠다. 그대들의 가소롭다는 눈초리도, 새로운 희망을 바라는 생각도.
눈동자. 눈동자. 눈동자. 사방의 눈동자가 나를 쳐다본다. 달려도 달려도 소용없다. 시선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다. 넘어지는 순간, 발목을 옭아매고 나를 끌고간다. 비명을 지르는 순간 어깨가 흔들려 잠에서 깨어났다.
"메리. 정신차려라."
"... 스승님."
"이 미친놈들이 드디어 사단을 벌일 모양이다. 당분간 잠자코 길드에서 지내라."
"알버트는요?"
"수도로 보냈다."
"말도 안돼. 저주받은 사람을 어떻게!"
"정신차려. 그 애는 네가 돌봐서 괜찮았다. 네가 문제지."
역시 고개를 숙이면 안됐다. 쓸데없이 마법만 많이 늘어서 너무 많은 걸 봐버렸다. 딱히 어찌 할 도리가 없으니 그냥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스승님은 내 얼굴에 흰 천을 덮어씌우고 무언가 마법을 사용했다.
"많이 위험해요?"
"그래.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하다. 이 팔푼아. 내가 어디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지."
"죄송해요. 그래도 실수였어요. 스승님이 소리만 안 질렀어도..."
"말은 잘해요, 말은."
이마를 찰싹 때리고 스승님은 한숨을 쉬셨다.
"이 천덕꾸러기를 두고 어떻게 떠나나."
"얼른 가보셔야죠. 미친 놈이 수도를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그냥 둬요."
"너는 네 목숨은 걱정도 안 되냐?"
"뭐... 살만큼 살아 봤고."
"어린놈이 말은 잘 해."
정말 살만큼 살았는데. 두번째 삶이면 그냥 거저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나. 거기에 알버트랑 클라렌스, 에스메랄다까지 있으니 이거 참 너무 많이 살았다. 나는 모르는 삶이지만. 길드의 먼지냄새와 시약냄새가 이렇게 편안하기는 처음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혀를 찬다.
"얼씨구. 살 만 한가보다?"
"안 죽었으면 살 만 한거죠. 다녀오세요. 길드는 제가 지킬게요."
"무너트리지나 마라. 잘 때 얼굴에 이거 꼭 덮고. 갖혀있는 놈들도 관리하고."
"네. 스승님은 올리비아 님이랑 싸우지 마시구요."
"오냐."
어쩐일로 순순히 대답한대. 빛처럼 사라지는 영감님을 멀뚱히 쳐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모범수가 감옥에 돌아왔으니, 죄수들을 관리할 시간이다.
"내놔."
"여기요."
오자마자 상석을 딱 차지하고 앉으신다. 한소리 듣기 전에 얼른 수정 구슬을 던져주고 옆에 서서 기다렸다. 아. 십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저기에 앉아 있었는데. 옆에 서 있는 티모시 리클렌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 할 수정구슬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쟨 뭐냐."
"알란타 제국 마법사인 크로노스의 티모시 리클렌이예요."
"그래? 그럼 권력의 앞잡이 한테 연락할 때 써야겠다."
"스승님. 제발 다른 학파 수장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신경 꺼라."
미친 사람. 내가 당신 밑에서 반년만 더 보내면 성격 파탄자가 될 거다. 얼른 옥사나님이 오시면 좋겠다. 내가 이 나이에 요절하기 전에. 한참을 수정구슬을 붙잡고 씨름하던 스승은 결국 어느 규모의 마법인지 추측하는 데 성공하셨다. 영감탱이가 기쁨 반 분노 반의 광기에 찬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 놈을 보았나! 어떤 새끼야! 누가 감히 영혼 복제를 시도했어!"
잠깐 반짝인 보라색 빛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보라색 빛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질린 얼굴로 스승을 쳐다보는 피뇨르 남작과 달리 새파랗게 질려서 올리비아님의 이름을 찾는 티모시 리클렌을 보고 있자니 나도 우리 학파 수장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저기서 날뛰고 있는 인간이란 사실이 너무 가슴아프다.
"어느 학파 놈인지 내 손에 잡히기만 하면 그냥!"
"정신차려 이 인간아!"
과거 스승에게 가장 사랑받갔다는 모범수 출신 사형수에게 배워온 마법으로 스승의 뒤통수를 후려갈렸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전격계 마법에 각성 마법을 섞은 충격 마법인데, 개발의도와는 다르게 죽어가는 사형수들을 깨우는 데 쓰이고 있다. 마법을 한 대 맞은 스승은 차갑게 식은 머리로 자리에 앉아서 '망할 놈' 추적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가 재판에 회부되는 한이 있더라도 마법을 추적해서 붙잡고 말테다."
"스승님."
"오냐. 말해봐라."
"우선은 제가 사용자 명부를 보고 의심가는 사람을 골라뒀는데요."
부엉부엉마법으로 부엉이를 불러서 수정구를 들려주고 멀리멀리 떠나보내는 스승님께 공손하게 아뢨다.
"불러봐."
"첫번째 용의자. 크로노스의 콜린 마커스. 10년 전에 길드에 가입한 수석 마법사예요. 연구 분야는 정신과 마법의 상관관계라고 합니다. 최근에 길드 도서관에서 생명마법에 관해 조사했다고 해요."
티모시 리클렌이 고개를 열심히 저으며 부정했다.
"세상에, 콜린이라니요. 오메르드 영애. 그가 자칫 위험한 영역으로 빠질 수 있는 분야를 연구하는 것은 맞지만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살펴봐야 알 일이고. 다음."
"두번째 용의자. 베르너의 제이콥 브론슨. 8년 전에 길드에 가입한 마법사예요. 치료마법 전문이라고 합니다. 오래전에 길드에서 나와 오르타 가문에 취직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논문 한 번 안 내고 있다고 하네요."
"미친 놈. 갈 데가 없어서 오르타에 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는 스승님께 방긋방긋 웃으며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 얼굴을 보고 정색한 스승님이 다시 계획서에 코를 박았다.
"다음."
"세번째 용의자... 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크로노스의 티모시 리클렌 입니다."
"뭐?"
모두가 경악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특히 알버트는 피뇨르 남작의 뒤에서 고개를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일단 말은 해 둬야지 내가 안 잘리는데. 저 오라버니는 에스메랄다가 절대로 안 죽게 해준다고 약속하셔서 내 밥그릇을 챙겨야해요.
"제자야. 미쳤냐?"
"아니요. 그건 아닌데 마법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간에 시설에 출입해서 한번 꼽아봤어요. 이거 말 하면 또 나만 바가지 긁을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수긍하고 다시 계획서에 코를 박는 걸 보자니 부아가 치민다. 진짜 잉크 다 마르기 전에 얼굴 확 밀어서 글씨 뭉개버리고 싶다. 곱게 정리해둔 보고서를 책상위에 슬쩍 올려놓고 옆에 서서 스승의 반응을 살피려니 맞은편에 서 있는 티모시 리클렌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방금 전에 그쪽을 용의선상에 올린 당사자로서 매우 쑥쓰러워 눈을 돌리고 스승이 옆에 쪼그려앉았다. 원래부터 내 업무는 스승에게 날아오는 짹짹이를 받아서 정리하고, 잔심부름이나 하는 거다. 이제부터 짹짹이가 쏟아지듯 몰아칠테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오메르드 영애."
"네. 리클렌 공자."
"퇴근 후에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이야기좀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뭘 잘못했다구요? 떨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으니 저쪽에서 알버트가 용기내서 외쳤다.
"메, 메리는 저랑 선약이 있다구요! 오랜만에 만난 남매가 우애를 나눌 시간을 빼앗지 마세요!"
알버트...! 감동이 파도처럼 쏟아진다! 티모시 리클렌도 납득했는지 순순히 물러났다. 한참 서류랑 씨름하던 스승이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쳐다봤다.
"저놈이 네 오빠냐?"
"동생이예요!"
"누나예요!"
헉, 알버트. 아무리 누나가 좋아도 앞에 상사가 있는데 그러면... 마음씨가 쓸데없이 넒은 피뇨르 남작은 허허 웃고 우리 스승만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뭐라고 했냐."
"그렇다구요. 그러니까 저는 숙소에서 안 잘거예요. 찾지 마세요."
"잘됐다. 나도 거기서 자자."
"영감님. 우리 가문 이름 들어봤잖아요."
"뭐, 길드보다는 낫지 않겠냐."
그건 맞아요. 부정할 수가 없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스승이 그럼 됐다며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빛이 번쩍이더니 사람이 튀어나왔다. 내가 애타게 찾던 마르그리트님이 드디어 납셨다.
"왔냐."
"클로드! 네 제자가 실수한 것 아니야?"
"내 제자가 실수할 리가 없잖아! 저 팔푼이가 네 반푼이랑 똑같은 줄 아냐!"
졸지에 반푼이가 된 불쌍한 앨리스에게 눈인사로 안부를 전했다. 요즘도 실수가 잦은 모양이다. 나랑 똑같네. 흐흐. 왠지 동질감이 생긴다.
"그렇긴 하지. 오메르드. 용의자가 나왔다지?"
"네, 옥사나님. 자세한건 저 서류를 봐 주시고..."
"옥사나? 마르그리트 그레트헨?"
피뇨르 남작이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합니다. 파트론 제국 귀족이 이렇게 다짜고짜 처들어올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길드 사절단을 대표로 사과합니다. 그래도 길드의 이름으로 활동 중일때는 절대로 남의 제국 일에 간섭 안한다는 조항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리 저쪽이 범죄왕국이라지만...
펄펄 뛰는 옥사나님을 열심히 말리는 앨리스에게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다. 네 스승도 답이 없구나. 나는 다시 한 번 단호하게 손을 휘둘렀다.
"정신차리세요!"
"그래. 화를 내서 해결될 일이 아니지. 그런데 올리비아는 자기 나라 일인데 왜 안 오는거야?"
궁시렁거리면서도 내가 복제해온 마법진 기록을 새로운 마법진에 옮겨서 하나하나 살피시는 것이 역시 수장은 짬밥만으로는 못하는 거구나 싶어졌다. 혼란한 상황이 어느정도 진정되었다 싶어지니 노크소리가 들렸다.
"무슨일인가?"
"황녀전하께서 상황 보고를 위해 알현하라십니다."
"다녀오세요."
리클렌 도련님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메르드 영애도 함께 오시랍니다."
야 황제 딸이면 다냐? 아 왜. 진짜 왜. 니 인생만 챙기지 말고 내 인생을 좀 도와줘라. 순순히 끌려가고 있지만 내 마음이 너무 무겁다. 생전 처음 보는 호사스러운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리는데 지금까지 조용하던 티모시님께서 말을 걸어오신다.
"영애."
"네. 말씀하세요."
"빅토리아와 친하게 지내신다 들었습니다."
"네. 그렇지요. 가장 친한 친구일거예요."
티모시 리클렌은 대놓고 짜증은 못 내고 은근히 돌려까기를 시도했다.
"요즈음 빅토리아가 이전과 달리 의젓해졌다는 것 아실겁니다. 그런 상황에 영애처럼 자유분방한 마법사가 주변을 맴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서로 좋을 것이 없겠지요."
"사실, 저는 별 생각이 없는데 비키가 좋다고 매달리는 거라서 말입니다. 공자께서 잘 말해서 달래보세요."
"제가 들은 이야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뭐... 거리에서 곤란하던 차에 도와줘서 고마운 것은 알겠지만, 길드를 소개해 준 정도면 충분한데 우리 집안을 아예 엮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 조금 곤란하네요. 이쪽 입장도 있고..."
미안하다, 오라버니. 거짓말이다. 오히려 우리가 빅토리아한테 많이 매달리고 있다. 이정도로 봐 달라. 마차가 멈추자마자 밖으로 튀어나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원 한쪽에 자리한 테이블에 앉아계신 우리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황녀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황녀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오느라 수고했다. 조사는 얼마나 진행되었느냐?"
왜 나는 불러놓고 정작 쳐다보는 건 티모시 리클렌님인지. 억울하지만 조아린채로 기다렸다.
"보고드린 것 이상의 진척은 없었사옵니다. 아무래도 조직적으로 은폐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허어..."
안타까워하며 티모시 리클렌을 짠하게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있는 상자를 우리쪽으로 밀었다.
"그대의 업무가 과중한 듯 하여 걱정이 많다. 위로차원에서 이것을 내리니 사양말고 가져가거라."
"황송하옵니다."
받은 자리에서 바로 상자를 연 오라버니께서는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황녀를 쳐다봤다. 근래에 내가 본 황녀의 표정 중에서 제일 밝고 화사한 얼굴이었다. 내가 잘못 본 건지 나도모르게 각성 마법까지 걸고 다시 봤는데 그대로다. 세상에. 평소 두통으로 고생하는 황녀가 사용하는 목걸이었다. 온갖 좋다는 마법은 다 걸어 피로회복과 편두통에 그렇게 좋다던데! 디자인은 미묘하게 다르지만 똑같은 목걸이라는 것은 황성 연회에 한번이라도 와 본 귀족이라면 전부 알 수 있을거다.
"전하. 이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사양말게. 특별히 그대 취향의 디자인으로 만들었으니."
차마 거절도 못하고 당장 착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다. 내가 슬쩍 한마디 보태려니 에스메랄다가 당장이라도 "저 목을 쳐라"라고 외칠것 같은 눈으로 쳐다봤다. 꼬리를 말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일 회의가 있지. 그때 꼭 착용하고 오게. 나는 효과를 잘 모르겠으나, 그대가 효과를 보는지 궁금해."
"...예, 전하."
"그러고보니, 오메르드 영애. 아르카나학파 수장의 제자로 들어갔다지? 제국의 동량에게 치하라도 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다."
아. 나 방치중 아니었니. 나도 네 관리대상이었나.
"네. 우연찮은 계기로 소개받게 되어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기대가 많네. 그대의 가문과 제국을 위해 노력하게."
"예, 전하."
그 말은 네 미래와 내 목숨을 위해 노력하란 말이렸다. 그런 당부 안 해도 나도 죽기 싫으니까 열심히 할 거다. 걱정마시옵소서, 전하. 영 미덥지 않아 하는 에스메랄다를 한번 쏘아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빅토리아가 오메르드 쌍둥이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흔들던 편지를 앞에 두고 원수인 양 쳐다보고 있는 걸 벌써 세시간째 보고있자니 슬슬 우리 연약한 아가씨 눈 건강도 걱정스럽고, 대체 무슨 내용인지 짐작도 안 갈 정도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샐리가 자꾸 눈치를 준다. "주인이 기분이 안좋으면 기쁘게 해 드리는 것도 사용인의 의무예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빅토리아가 있어서 참고있는거다.
"아가씨. 그러다 몸 상하시겠어요. 그러지 말고 잠깐이라도 정원을 좀 걸으셔요."
"정원... 정원! 그 나쁜 계집애!"
정원이 트리거였나! 샐리는 이제 눈빛으로 살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려봤다. 씩씩거리는 빅토리아에게 부채질해주며 열심히 달랬다.
"싫으시면 마리아 영애를 뵈러 가는 건 어떨까요?"
"아냐. 마리아한테 화풀이 할 수는 없지. 정원으로 가자."
"네, 아가씨."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를 팔아 무사히 정원으로 유인해냈다. 산책을 좋아하는 빅토리아를 위해 영지 저택에 대규모 온실까지 만든 리클렌 백작가는 눈이 쌓이지 않는 수도에서는 상록수를 심어 언제나 푸른 정원을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정말 내가 믿을 사람을 믿어야 했는데."
"아가씨. 진정하세요."
"진정할 수 있겠니? 내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는데? 이 빅토리아 리클렌이?"
아무래도 모든 경우의 수를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걸 두 오메르드가 산산이 부숴버려서 충격이 큰 모양이다. 씩씩거리며 정원을 한바퀴 돌고 나서야 지쳐서 그런지, 화가 풀렸는지 조금 진정한 듯했다. 우리 아가씨도 참 문제다. 내 기억에는 난 안 저랬었는데.
"너무 속상해. 그런데 대화가 통하는 몇 없는 사람이 황녀야. 답답해 죽겠어."
"저한테라도 털어놓으세요."
"너한테?"
아가씨가 코웃음쳤다.
"심부름 하나도 제대로 못해서 일을 키운게 누구였지?"
"헉, 알고 계셨어요?"
짜증이 가득한 눈으로 혀를 차고 아가씨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가 누굴 믿고, 누구한테 의지하겠어. 역시 내가 믿을 건 부모님과 오라버니들 뿐이야."
정말 미안해요.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어릴적부터 평민답지 않게 살다보니 아직도 가끔 내가 귀족인 줄 알아요. 열이 나는지 벗어던진 숄을 주워 다시 걸쳐주고 뒤를 따랐다.
"속이 타서 안되겠다. 말이나 타야겠어."
"아가씨. 그 차림으로는 위험해요!"
"그럼 네가 탈거니?"
흉흉한 눈빛 너머로 샐리가 보인다. 샐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클라렌스! 정말 당신은 사용인이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가요? 어떻게 아가씨가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승마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어요? 제가 해고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아가씨 곁에서 떼어놓겠어요!" 그리고 샐리는 다른 리클렌을 찾아 복도를 종종종 뛰어간다. 안돼!
"할게요. 제가 할게요."
"탈 줄은 아니?"
그럴 리가 있겠니, 아가씨야. 내가 평민이라고요. 그래도 이전 삶에서 미련이 안 남을 정도로 타봤으니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클라렌스. 허리."
"히익!"
"무서워하면 말이 멋대로 움직여. 똑바로."
"자, 자, 잘못했어요 아가씨.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 으악!"
은근슬쩍 편자에서 발을 떼고 내려오려니 아가씨가 고삐를 바짝 쥐었다.
"안돼. 넌 오늘 승마천재가 되는거야."
"처음부터 못 탔는데 어떻게 천재가 된다고 그래요!"
"응... 지금부터 될 거야."
"살려주세요. 실수 안 할게요. 제발."
아가씨는 내 귀에 속삭였다.
"네 기억속의 승마실력이 보일 때까지 돌거야."
"왜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로 해주세요. 제발."
"응... 너는 이제부터 내 짹짹이야. 짹짹 해봐 짹짹."
서늘하게 웃으며 자기 머리에 꽂고있던 하얀 새 모양 머리핀을 내게 달아줬다.
"빅토리아. 잠깐만 이야기좀 하자꾸나."
승마장 입구에서 급하게 찾는 큰 도련님의 목소리에 정말 아쉬워하며 아가씨는 표정을 고치고 평소처럼 순진한 얼굴로 걸어갔다.
금지 마법 사건이 발생한 지도 벌써 세달이 흘렀다. 그 사이에 내 부탁을 받아 티모시 리클렌이 아르카나와 싸운 올리비아를 열심히 설득해 데려오고, 용의자 추적을 시작했다. 명목상 용의자이자 밝혀져서는 안 될 또다른 범인 티모시는 내 옆에 잘 붙어있으니, 오르타 공작의 수족이라는 것만 붙잡아온다면 쉽게 끝날 일이렷다.
"리클렌 영식."
"예, 황자 전하."
"요새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아. 앞으로도 자주 만나면 좋겠네."
물론 만나고 있는 티모시 리클렌은 출근길이 지옥길일 것이지만. 그의 목에서 빛나는 목걸이를 한참 노려보던 루드비히가 제 얼굴을 가장 귀엽게 만드는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누님. 그러고보니 곧 누님의 생신이 돌아와요."
"그러고보니 그렇구나. 벌써 해가 지났으니."
올해부터 쉴 새 없이 몰아칠 사건들에만 집중해 정작 연초부터 다가오는 내 생일을 잊고 있었다. 연회는 사용인들이 알아서 준비할테니 나는 귀족들만 상대하면 될 일이다. 어색하게 앉아있는 리클렌을 힐끗 쳐다봤다.
"아바마마도 아바마마지만, 이번 연회에는 내 귀여운 친구가 어떤 선물을 줄 지 궁금하구나."
"리클렌 영애 말이지요?"
"그래. 영식도 연회에 오는가?"
기대하는 듯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손을 쥔 루드비히의 손에 힘줄이 돋았다. 빨리 대답하는 편이 좋을텐데. 실망한 듯 눈을 내리깔자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아 어려울 듯 합니다."
"대체 언제쯤 끝난단 말이냐. 서류가 줄어들지를 않는구나."
"송구합니다. 빠른 시일 내로 범인을 잡아내보이겠습니다."
어림없는 소리. 작손이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던가.. 이번 사건이 터진 것처럼 얻어걸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반년은 더 고생해야 할 테다.
"그런가. 그렇다면 내 생일선물로는 범인을 대령해오도록 하라."
"예?"
진행과정을 알고 있는 루드비히가 환하게 웃으며 부추겼다.
"좋은 생각입니다, 누님. 그렇게 하도록 하게. 리클렌 영식."
"그, 그..."
"역시 무리인가보구나. 무리하지 말거라."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꼭 잡아오라며 환하게 웃는 루드비히와 눈이 마주쳐버린 그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답은 곧잘 하지만 아마 티모시 리클렌을 연회에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곁에 서 있던 시종이 회의시간이 다가옴을 알렸다. 조금 더 놀리며 아랫것들에게 내가 저 자를 연모한다고 광고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일할 시간이다.
회의는 내 예상대로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귀족들과 분노가 머리 끝까지 올라온 마법사들, 이제 그만 퇴근하고 싶은 기사들의 원성으로 소란스러웠다. 시종이 황제와 그 자식들의 등장을 알리자 언제 그랫냐는 듯 조용해지고, 우리가 앉고 나서는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얼굴로 부황을 올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보고를 들은 지도 벌써 세 달이나 지났다. 그간은 에스메랄다에게 맡겨왔으나, 제국의 주인으로서 일의 경과는 알아야 하니 그동안의 성과를 소상히 보고하라."
그 순간 할 말이 많던 어른들이 꿀 먹은 어린애 처럼 입을 다물고 서로 시선을 피했다. 그나마 용기있을 줄 알았던 아르카나마저 새벽녘의 나팔꽃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 뒷목이 당겨왔다. 내가 그 면면을 하나하나 노려보며 소리없이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당장 아무나 말해.'
내 눈빛에 모두 눈을 돌리다 먼 친척 고모님께서 채 피하지 못하고 마주쳤다. 애석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다 곧 체념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흐, 흠. 폐하. 올리비아 하틴 로슈민 크로노스입니다."
"오, 올리비아. 그래. 네가 말해보거라."
"중간에 폐하께 올라간 보고서에서 보았다시피, 리클렌 공자가 용의선상에 오르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용의자를 둘로 압축해 한명은 소환하여 심문을 마쳤고, 나머지 하나는 소환명령에 답하지 않은 채 행방이 묘연합니다."
"심문 결과는 어떠했는가."
"아주 근소한 차이로 금지 마법이 아닌 마법을 실험해본 것이었습니다. 다만, 시국이 이러한 관계로 주의를 주고 자택에서 근신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잘 했다."
우리 아바마마께서는 어릴 때부터 그리 아끼던 먼 친척동생이 똑똑한데다 말까지 잘 하니 좋아서 어쩔줄 몰라 하신다. 정작 중요한 건 잊어버리셨나. 루드비히에게 눈짓했다. 우리 귀여운 황자께서 눈치채고 적당히 말을 던졌다.
"크로노스. 출석하지 않는 자는 누구입니까."
"베르너의 제이콥 브론슨. 오르타 공작의 마법사입니다."
"오르타..."
회의장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오르타. 직접 정계에 진출하지 않으되 막대한 금권으로 추종자들을 내세워 귀족사회를 흔드는 이들. 그 금권은 대공가로서도 버거울 정도여서 황제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업다.
"제 아내가 건강이 나빠 마법사를 고용했다던 오르타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폐하. 제 부인을 보살필 마법사가 한명 뿐이라 보낼 수 없다 거절중이라 합니다."
"사안이 위중하니 휘하의 마법사를 보내주면 되겠는가."
저쪽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마르셀 남작이 날벼락에 화들짝 놀랐다.
"폐하! 지금 황실의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지킬 최소한의 인력을 제외하고는 수사에 전념중이옵니다!"
"제국에 인재가 그리 부족하단 말인가."
아. 이 타이밍은. 우리 아버님께서 현실이 너무 매서워 슬퍼할 때 자학의 시작을 여는 말머리. 재빨리 아바마마의 귀여운 딸 에스메랄다를 연기했다.
"다 황녀인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용서하소서."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이겠느냐.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황자인 제가 위신을 세우지 못하는 탓입니다."
루드비히까지 재롱을 떨어대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셨는지 얼굴이 풀렸다.
"어찌 하면 좋겠는가. 시간이 이리 지났는데 계획이 있을 것 아니냐."
"제일 간단한 방법은 오르타 공작가에 마법사를 보내고 데려오는 것이지요. 허나 필시 폐를 끼칠 수 없다며 거절할 테니 불가능하지요. 차선책으로는 사건을 지휘중인 마법사 길드의 관련자가 직접 공작령으로 찾아가면 되겠지만..."
내 말에 아르카나의 두 마법사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 옆에서 곰곰히 듣고 있던 크로노스와 옥사나마저 얼굴을 찌푸렸다. 제 잘못임을 아는 베르너만이 이를 아득아득 갈고 있었다. 전 세계의 무력의 반절이 반 협박을 하는데도 숨으려 하다니. 이러니 저러니 해도 칼 오르타의 배짱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나 같으면 벌써 목을 맸을텐데. 물론 내가 황제였으면 꿋꿋이 버텼을거다.
"직접 다녀오고 싶다는 말이냐?"
"아바마마도 참. 제가 어찌 간단 말입니까. 리클렌 영식을 보내야지요."
"아. 리클렌 영식. 여기에 있더냐?"
"예. 여기 있습니다."
부황이 흐뭇한 얼굴로 티모시 리클렌을 보다 목걸이를 발견하고 나를 쳐다보셨다. 모르는 척 빙긋 웃으며 아바마마의 손을 잡았다.
"아바마마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이 일을 마무리짓겠사옵니다."
"음... 그래. 너만 믿으마. 에스메랄다."
제가 꼭! 잡아서 리클렌 영식이랑 같이 대전에 들테니 걱정 마시옵소서. 티모시 리클렌이 복잡한 눈으로 우리를 힐끔거리는 것에 밝게 웃으며 대응했다.
우리들이 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유감스러웠던 점은 각자 자신이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죽음이 사실은 어떤 빌어먹을 놈의 농간 때문에 벌어졌고, 그 이득을 누가 보았는지를 알 수 없으니 골치아플 수 밖에. 가장 늦게 죽은 내가 쥐어짜낸 기억을 토대로 하면, 지금의 계획도 그럭저럭 봐줄 만 한 것이다. 죽을 상을 하고 승마연습 중인 클라렌스를 보고 있으니 기분 전환도 되고, 머리도 좀 돌아가는 것 같다. 슬슬 빈센트 오라버니가 도착할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어째 늦으시네.
"빅토리아. 네가 에스메랄다 전하께..."
"작은 오라버니는 언제쯤 도착한대요?"
"... 늦어도 저녁식사 전까지 도착한다 했다. 빅토리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저도 몰라요. 오히려 전하가 오라버니를 설득해달라시는 걸 거절하느라 혼났다구요!"
미안해요. 사실 나중에는 내가 더 부추겼어요. 오라버니가 침울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댔다. 불쌍한 우리 오라버니. 멍청한 동생 때문에 인생 말아먹을 뻔했는데. 그래도 역적으로 몰려서 형장에 오르는 것 보다는, 황녀와 스캔들이 터지는 게 낫지 않아요? 힘내.
"혹시 마음에 둔 영애가 있었어요?"
"응? 아, 아니."
"정말?"
뚫어지게 쳐다봤더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누굴까.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궁금하네. 오라버니한테 머리를 기대고 다리를 살살 흔들었다. 좋다. 앞으로도 쭉 이럴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나는 바쁠테지만 나는 바쁘지 않으니까 괜찮아. 눈을 감고 햇볓을 쬐고 있으려니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키."
"빈센트 오라버니!"
티모시 오라버니를 밀쳐내고 일어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먼지를 뒤집어쓰고서 나를 끌어안지 말란 말이야. 화를 내고 싶었지만 너무 오랜만이라서, 정말 오랜만이라서 참으려고 했는데 멋대로 눈물이 쏟아졌다.
"비키. 이 오라버니가 그렇게나 보고싶었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끌어안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괜찮은 척 할 수 있어서 괜찮은 줄 알았지만 아니었나보다. 나 생각보다 더 힘들었나봐. 그냥 반가워서 우는 정도로 끝내고 싶었는데 그간의 서러움이 다 터져나오고 있다.
"형. 빅토리아한테 뭐라고 했어?"
"그럴리가! 그냥 서로 한탄하고 있었어. 너 때문이다."
"빅토리아. 내가 잘못했다. 기사단은 때려치고 수도에 있을 테니 그만 울어."
빈센트 오라버니가 먼지투성이 손으로 어쩔줄 몰라서 손만 들썩이다 손수건을 꺼내서 눈가를 훔쳐줬다. 먼 기억 그대로 따뜻한 눈길이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내 생애 마지막에 보았던 그 눈빛이 아니다. 부디 이번에는 빈센트 오라버니가 자기 손으로 가족들을 죽이지 않기를.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 어지러움을 견디고 오라버니와 눈을 맞췄다. 걱정이 가득한 파란색 눈동자를 마주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할 수 있어. 못 하면 누구 하나를 버리는 수밖에. 오라버니에게 안겨 방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버려야 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첫번째는 아마 나 일거라고.
얼마나 오래 잠들어있었는지 눈을 떴을때는 방 안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클라렌스는 부루퉁한 얼굴로 내 옆에 앉아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아가씨. 너무하신거 아니예요? 어떻게 저를 말 위에 두고 그렇게 가버리실 수 있어요?"
"아... 미안."
"몰라요. 도련님들은 서재에서 마님들과 이야기중이세요."
"고마워."
클라렌스의 부축을 받아 앉았다. 맞은편 벽난로 가에 선물더미가 쌓여있는 걸 보니 그새 누가 내가 쓰러졌다 소문을 내고 다닌 모양이다.
"오메르드 영애와 공자가 다녀갔어요. 내일 오르타 영지로 떠나야 해서 잠깐 들르셨어요."
"오르타에?"
왜? 무섭게 지옥으로 걸어들어가? 클라렌스가 준비해둔 드레스를 두 벌 가져와 들어보였다. 오늘은 기분도 안 좋으니 화사한 색으로 하자. 먼지투성이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클라렌스가 준비해준 드레스에 몸을 넣었다. 등 뒤에서 단추를 하나씩 채우며 클라렌스가 소근거렸다.
"작손이 범인을 안 내놓으니 처들어간대. 그 김에 영지를 이 잡듯이 뒤집을거라는데, 노골적으로 헤집어서 역모 증거라도 찾아낼거라나봐."
"위험한 건 둘째치고 힘들텐데. 보통내기여야지."
"그건 알아서 할 일이지요. 호호."
메리가 고생하는 게 그리 좋으니. 클라렌스는 신나게 웃으며 허리춤의 장식을 졸라맸다. 너무 조여서 팔을 찰싹 때리고 나서야 느슨하게 묶었다. 내일 당장이라. 프라우를 떠나면 도와주기 힘드니 배웅이라도 나가야겠다.
"참. 황녀님이 첫째 도련님께 달콤하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이예요?"
"벌써 거기까지 퍼졌니?"
"헤헤. 아가씨가 시키신 대로 성에 드나드는 하녀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있거든요."
"장하다. 그래, 맞아."
"헉!"
놀랄 줄은 알았지만 정말 놀라서는 질린 얼굴로 가까이 붙어서 허리를 살살 찔러댄다.
"진짜? 오라버니들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내가 나중에 그럴 줄은 몰랐어. 나 괜찮은거지? 어디 이상해진 거 아니야?"
"아냐. 재주껏 더 퍼트려. 평민들까지 알 정도로."
"그런 건 내가 또 잘 해! 맡겨만 주세요 아가씨!"
정말 너무 잘해서 걱정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사실만 퍼트려. 그래도 시작도 전에 기를 죽일 수는 없으니 부드럽게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래. 너만 믿는다."
배시시 웃으며 클라렌스가 노크했다.
"백작님.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거라."
클라렌스가 문을 열었다. 얼른 들어가 빈센트 오라버니에게 다시 한번 안겼다.
"비키. 지난번에 크게 앓고 나서 자주 쓰러진다고 들었어. 몸이 그렇게 안좋아?"
"아니. 그냥 너무 반가워서 우는 바람에..."
부끄러우니까 우리 그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오라버니들을 올려다보았다. 부모님께는 미안하지만 두분께는 안타까운 마음 뿐이고, 오라버니들에게는 미안하다. 앞으로는 정말 착한 동생이 되어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빈센트 오라버니가 내 머리를 배배 꼬면서 장난을 친다. 음. 작은 오라버니한테는 응징도 조금 하자.
"내 생각에도 그렇단다, 아가. 당분간 파티는 물리고 쉬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빅토리아."
"아니, 곧 마리아 생일이기도 하고..."
내가 메리 오메르드는 몰라도 전생 현생 통틀어 첫번째 친구였던 마리아의 생일 연회만큼은 빠질 수가 없는걸요. 티모시 오라버니는 마리아라는 말에 눈을 번뜩이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같이 갈 테니 조금이라도 힘들어 보이면 바로 돌아올거다."
"네!"
음? 뭐지? 왜? 오라버니 왜 마리아라는 이름이 나오니까 갑자기 내 편을 들어주시지요. 안돼요. 설마 내 친구인데? 느낌이 심상치 않아 꺼림칙하긴 하지만 마리아의 연회에서 지금까지 발표된 적 없는 새로운 마법이 발표될 거다. 티모시 오라버니가 본다면 금방 눈치채겠지. 아무래도 더 앉아있다간 이것마저 못 하게 하고 영지에서 한동안 요양하라며 들들 볶아댈 것 같으니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맞춰야겠다고 둘러대로 얼른 도망쳐나왔다. 영 못마땅한 네 사람의 눈총에 내가 못 버텨서 도망치나? 내가 누구냐. 리클렌 가문의 탕아 빅토리아 리클렌이다. 원하는 건 언제든 얻어내고야 말지. 마리아의 가장 친한 친구로서 그 옆을 지켜야 하니 에스메랄다의 탄신연회때 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을거다. 밖에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눈이 의욕으로 불타오르는 클라렌스를 데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번에는... 샐리의 의견이 필요할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이야."
클라렌스가 어찌나 비장한지 나도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우선은 더 급한 것이 있으니, 마땅한 손수건을 찾아둬야겠다.
다음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오랜만에 꽃단장을 했다. 많은 영애들이 사모하는 오메르드 공자가 출장을 가니 마음이 찢어지는 영애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도 그 대열에 끼어서 해 줄 말이 있기도 했다. 손수건을 줄 용기도 없이 무작정 나오기만 한 영애들을 뚫고 나아가 말의 콧잔등을 쓸어주고 있는 긴 망토에게 다가갔다.
"메리. 알버트는 어디에 있어?"
"오, 내 레이디. 메리는 저쪽에 있어요."
남장도 안 하고 뻔뻔하게 구는 메리의 등을 찰싹 때렸다. 엄살을 부리며 깡총깡총 뛰는 메리를 붙잡아세웠다.
"장난치지 말고. 할 말 있어."
"나는 내 하나뿐인 친구가 배웅 오는데 아무것도 없이 올 줄은 몰랐네."
어쩌라는거니... 손을 내밀고 우는 척 하며 손가락 사이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손수건을 올려주고 나서야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뺨에 쪽 소리를 내며 키스했다.
"내 잘못을 잊지 않았으니 죽을 각오로 공을 쌓을게. 너를 위해."
"아냐. 너 자신을 위해서 쌓으렴. 그게 네 가문에 백배 도움 될 거야."
"역시 빅토리아는 너무 상냥해. 알버트는 기사단 쪽에 있어."
"고마워. 몸 조심하고. 연락해."
"응."
손짓 한번에 화살표를 만들어내더니 따라가라며 손을 흔든다. 이런 과도한 친절 할 시간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사고나 안 쳤으면 좋겠는데... 화살표를 따라 걸어가니 부담스럽게 커다란 말들이 무리지어있다. 하필 이 타이밍에 화살표가 사라져버려 멍하니 서 있으니 안쪽에서 알버트가 튀어나왔다.
"비키!"
"알버트. 만나기 어렵네."
"어... 리클렌 공자님들이 무서워서..."
"아. 미안. 자, 이거 선물."
내가 손수건을 건네자 주변에서 영애들이 비명을 지르고, 알버트 뒤의 기사들이 헉 하고 놀란다. 알버트는 거절했다가는 빈센트 리클렌한테 죽고, 받으면 티모시 리클렌한테 죽을 미래 중에 그나마 덜 고통스러울 티모시 리클렌을 선택했다.
"... 고마워."
울먹이는 목소리가 기뻐서가 아니라 우울해서 잠겨있다. 힘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머리를 가까이 붙였다.
"네가 처신 잘 해야해. 어느 영지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오르타 영지에서는 그들이 왕이니까. 메리한테 연락하라고 해뒀지만 나한테 따로 편지해줘. 메리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내 누나지만 부정할 수가 없네. 같이 움직이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막아볼게."
"정말 그나마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다."
"못 믿는구나."
"너희 신용도는 오메르드인 순간에 5할로 시작해서, 지난번 사고로 3할까지 떨어졌어."
"너무해."
너무하든 말든.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아무나 믿을 수는 없잖아. 그 믿음이라는 것이 비밀을 터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놓고 부탁할 수가 없다는 의미인 걸 나도, 알버트도 알고있다. 알버트는 피뇨르 남작의 옆에서 점점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는 빈센트 오라버니를 이기지 못하고 한걸음 물러났다.
"그럼 잘 다녀올게."
"응. 올 때 선물 사와."
오르타 특산물이 오색으로 빛나는 수정이란다. 한층 더 어두워진 안색으로 빈센트는 기사단 쪽으로 돌아갔다. 볼일을 마쳤는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옆에 꼭 붙는 빈센트 오라버니의 팔짱을 끼고 유유히 영애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빠져나갔다.
바람 잘 날 없는 프라우라지만 이번 스캔들은 조금 크긴 했다. 그간 남자라고는 제 동생인 황자를 귀여워 할 줄밖에 모르던 그 목석같은 황녀가 리클렌 가의 첫째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닳고 닳은 귀족들도, 아직은 낭만에 젖어있는 그 자녀들도 모두 기대에 젖어있었다. 과연 황녀의 로맨스가 로맨스로 끝날 것인지, 국혼까지 이어질 것인지 내기하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간만의 즐거운 유흥거리를 유흥으로 여기지 못하는 이들 중에 저기, 아나이스 오르타가 있다. 어찌나 울었는지 부은 눈으로 비극 속 주인공처럼 내 뒤의 오라버니를 쳐다보는데 아무리 눈치없는 마리아라도 힐끔거릴 정도였다.
"빅토리아. 어쩌면 좋니?"
"글쎄. 차마 말을 걸 용기는 없을테니 그냥 둬."
"그래도..."
상냥한 마리아. 정적의 딸한테도 친절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자기 생일을 망치고 있다고 화를 내도 모자랄텐데. 아무래도 끝까지 미안해 할 것 같으니 관심을 돌려버려야겠다.
"넌 친하지도 않은 영애가 친구보다 중요하니? 오늘 내가 널 위해 얼마나 열심히 꾸미고 왔는데. 계집애. 내가 한껏 멋 낸것보다 더 예쁘면 어쩌자는거야."
"오늘은 내 생일인걸. 하루쯤은 비키보다 더 예뻐도 괜찮아."
"맞아. 평소에는 내가 더 예쁘니까 참아줄게."
그 말을 하기 무섭게 제국 최고의 미녀 소피아 고트 영애께서 들어오셨다. 그녀를 보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한번 보니 우리가 싸운 게 다 소용이 없어졌다. 고마워요 소피아. 그래도 생일이라고 조금 덜 꾸미고 왔는데 우리를 굼벵이로 만들었어. 고트 영애가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마리아를 향해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착한 마리아는 고트 영애와도 친했다.
"생일 축하해."
"소피아! 와줘서 고마워요."
"네 생일인데 당연히 와야지."
루이스 차노트에게 시비걸려고 파격적인 패션으로 연회에 등장했던 그날 이후로 칩거하던 소피아 고트가 처음으로 나타난 연회다. 우리 마리아가 오늘 연회에서 제일 예뻤다는 소리는 못 듣더라도 또래 영애들 사이에서 힘좀 쓴다는 얘기는 듣겠지. 나도 이제부턴 미친년 처럼 돌아다니지도 못하는데 무시당하진 않을 것 같다. 다행이네. 소피아 고트는 마리아와 이야기하다 내 옆에 서있는 티모시 오라버니를 보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웃지마. 내 오라버니야.
"아, 참. 오라버니. 선물은요?"
"여기있다."
오라버니가 상자를 건넸다. 내가 어깨에 한껏 힘 주고 있으니 고트 영애도 목을 빼고 쳐다본다.
"마리아. 열 일곱번째 생일 축하해. 선물 받아."
덥석 안겨준 상자를 열더니 마리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전부터 그렇게 가지고 싶다고 노래하던 소린 왕국의 부채다. 마리아의 부모님은 소린을 싫어해 절대로 사주지 않을거라며 벌써 몇 달째 서러워했다.
"티모시 오라버니랑 같이 골랐어. 어때?"
"정말, 정말 예뻐. 고마워 비키!"
"세상에. 이 정도 물건은 나도 처음봐요."
"소린에서도 왕족들한테나 납품하는 장인이 만든 거니까요."
소피아 고트마저 놀랐다. 당연히 예뻐야지. 우리 오라버니가 그거 구하는데 얼마나 썼는데. 공납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우기고 우겨서 담당자와 관계자에게 돈을 먹이고, 장인한테는 몇배로 쳐 줬다. 헛기침을 하는 오라버니에게 마리아가 활짝 웃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냐. 비키의 친구의 생일선물이라면 당연히 구해줘야지."
보자보자 하니까... 뿌듯하게 웃지 마세요 오라버니. 당신 지금 황녀랑 스캔들 난 중인데 내 친구한테 그렇게 상냥하게 대하면 일 더 커지잖아. 내가 슬쩍 옆구리를 꼬집고 나서야 표정을 수습하고는 평소의 무뚝뚝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네. 그렇게만 계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힌트 다 필요 없고, 차라리 빈센트 오라버니랑 올 걸 그랬어. 이미 소피아 고트는 눈치채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보고있다. 망했어, 망했다고. 이제는 오라버니도 날 안 도와준다.
"그건 그렇고, 마리아. 신기한 구경거리도 있을 거라면서. 언제쯤 보여줄건데?"
"음... 지금쯤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마리아도 신경쓰이는듯 살짝 찌푸린 얼굴로 무대쪽을 바라봤다. 설마 영지로 사람 보냈다고 바람잡이까지 빼돌렸나. 설마. 오르타 공작이 아무리 조심성이 대단하다 못해 소심하다고는 해도 자기 권력이 달린 일을 포기하는 사람은 아니다. 역시나, 머지않아 무대 위에 한껏 멋낸 중년 마법사가 올라왔다.
"특별한 날을 맞이한 영애를 위해 오늘 제국 최초의 마법인형을 소개합니다!"
광대처럼 과장된 동작으로 인사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에 미리 깔아둔 천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는지 주저앉은 인형이 나타났다. 관절이 멋대로 꺾여있는 인형을 향해 한번 손을 휘두르자 인형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팽그르르 돌던 눈동자가 정면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뻣뻣하게 움직인 인형이 예의바르게 인사한다.
"이 아이의 이름은 엘피도. 저의 30년간의 연구의 정수가 담긴 인형이지요. 엘피도가 오늘 밤 여러분의 기억속에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길 것입니다."
인형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았다. 갈피를 못 잡고 움직이던 눈동자와 마주쳤다. 순간 싸늘한 기운이 맴돌아 섬뜩해 나도 모르게 오라버니의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도 반사적으로 내 손을 쥐었다.
"빅토리아. 왜 그러니?"
"눈을 마주쳤어요."
"괜찮아. 인형일 뿐이란다."
내 손을 토닥이면서도 눈은 무대에서 떼지 않았다. 인형이 우아하게 춤을 추다 상대도 없이 홀로 왈츠를 추었다. 구역질이 올라오지만 드러낼 수 없었다. 내 손을 쥔 티모시 오라버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손을 놓고 팔짱을 끼며 오라버니에게 기댔다.
"정말 감쪽같아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래. 그렇구나."
모두가 신기해하며 박수를 친다. 어지럽게 울리는 박수 속에서 이 상황에 떨고 있는 것은 나와 오라버니 둘 뿐이었다. 겨우 오라버니에게 기대어 끔찍한 시간을 버티고 나서는 무슨 정신으로 저택까지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수도는 때 아닌 인형극 열풍이다. 그 마법사의 인형극을 보지 못해 안달 난 귀족들도 많았다. 그 중에 자신의 연회에 마법사를 초대하지 못한 사람들은 평범한 인형극으로 대신하려는 듯 길거리의 예술가들을 불러오기도 했다. 세상이 미쳐가나. 평민들이나 보는 천박한 예술이라고 무시하던 건 언제인지 기억도 못 하나. 다행히도 나는 그날 이후로 파티는 전면 사절중이라는 점이다. 정말로 피곤하기도 했고, 그 엘피도라는 인형을 다시 한 번 봤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사건 조사로 바쁘고, 어머니는 그 공백을 메우느라 집안 온갖 대소사에 치이는 중이신데 혼자 편히 지내려니 미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아가씨. 가만히 좀 계셔보세요."
"만날 사람도 없는데 그렇게 꾸며서 어디에 쓰니."
"아름다움은 수많은 관리에서 오는 법이예요."
"글쎄. 고트 영애는 어릴때도 그렇게 예쁘더라."
"자꾸 비교하지 마시라니까요?"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빗어야 한다, 향유를 발라야 한다 난리를 피우니 사실 쉬어도 쉬는 기분도 안 들어.
"그리고, 곧 빈센트 도련님이 다시 떠나시잖아요."
"뭐? 왜?"
"어제 식사시간에 또 다른 생각 하셨죠! 오르타 공작령에 파견된 조사단을 지원하러 간다고 하셨잖아요."
아 맞다. 왜 오라버니가 가야 하냐고 화내면서 에스메랄다한테 편지할거라고 날뛰다가 혼났지. 요 며칠 얌전하게 굴지 않았으면 또 무리한다고 엄청 혼나고 지금쯤 침대에 누워서 좌측 샐리 우측 클라렌스의 감시를 받고 있었을거다. 이틀 건너 한번씩 오는 짹짹이에서 아무리 뒤져도 모르겠다고 징징거리더니 결국 쫓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싫다. 우리 오라버니 쉬지도 못했는데."
"어쩔 수 없지요. 황제폐하께서도 빨리 처리하셨으면 하는 눈치신데."
그래. 얼른 치워버리자. 그리고 빛나는 내일 찾자. 은근슬쩍 손톱 관리 도구를 들고오는 샐리를 뿌리치고 냉큼 책상 앞에 앉았다. 아무리 짹짹이가 온다고 해도 그건 그거고, 오라버니가 간다고 하면 또 편지를 보내줘야지. 아껴뒀던 좋은 잉크를 꺼내서 첫문장을 적어보았다.
사랑하는 내 메리에게.
안녕 얘들아. 너희들의 비공식 물주이자 주인님인 빅토리아란다. 일 하고 있기는 한 거니? 왜 아직도 결론을 못 내고 있어? 너희가 제대로 안 해서 빈센트 오라버니가 거기까지 가야 하잖아. 똑바로 안해?
그래도 너희가 잠깐이나마 수도에 돌아왔을 때는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늘 즐거웠는데. 근데 눈앞에 안 보이니 섭섭하면서도 귀찮은 일은 안 생겨서 참 좋다. 오르타 공작령은 어떻니? 그곳은 늘 기후가 온화하다던데. 여기는 매일같이 눈이 오고있어. 덕분에 연회에 안 갈 핑계도 생기고 좋아.
그나저나, 메리. 내가 지난번에 마리아의 연회에서 이상한 걸 봤어. 인형인데, 사람처럼 움직이더라고. 마법사가 조종한다고 하던데 난 잘 모르겠더라. 그 마법사가 요새 수도를 돌아다니고 있어. 엄청 소름끼치니까 얼른 처리하고 와서 나랑 같이 있어. 나 밤에 자꾸 생각나서 잠도 못 자겠다. 진짜 너랑 같이 있으면 사람들이 알버트인 줄 알고 물러가는 것도 좋고, 알버트랑 같이 있는 기분도 나서 좋단말이야. 빨리와.
참. 알버트한테도 안부 전해줘. 내 손수건에 때 묻은 채로 돌아오면 죽는다고도 전해주고. 그럼 몸 조심히 돌아와.
"알버트. 우리 빨리 처리 못하면 빈센트 리클렌이든, 빅토리아 리클렌이든 둘 중에 하나가 우릴 죽일거야."
편지를 전해주던 빈센트 리클렌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귀찮아 죽겠지만 사랑스러운 동생님의 부탁이라 할수없이 오기는 했는데, 요새 빅토리아가 자꾸 장난질을 쳐서 마음에 안 들게 된 알버트까지 봐야 하니 얼마나 화가 날까. 우리가 미안합니다. 얼른 처리하고 싶은데 천성이 마법사인 나랑 이제 막 종자가 된 알버트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나... 정말 죽을지도..."
"걱정마. 내가 죽더라도 너는 살게 해줄게."
"메리..."
울지 마라. 내가 어깨를 안아주니까 와락 안겨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토닥여주고 일어났다. 아무리 슬퍼도 일은 해야지. 지금까지 샅샅히 뒤졌지만 못 뒤진 곳이 딱 하나. 공작성이다. 황명을 받고 온 조사단을 이렇게 박정하게 대할 줄은 몰라서 크로노스님도 안 모시고 왔는데 말이다. 그래도 오늘 리클렌 백작가의 사람이 왔으니 열어줘야 할 거다.
"스승님. 이제 영주성도 털어볼 수 있어요."
"잘 됐다. 얼른 처리하자."
"그런데 요새 수도에 기묘한게 돌아다닌다는데요."
편지를 건네니 우리 영감탱이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야. 내뺐다. 여기에는 증거밖에 없겠어."
"그렇죠? 망했네, 망했어. 그러니까 내가 올리비아님 모시고 오자 했잖아요."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너무 잘 해서 아직도 현장을 못 찾았네."
중얼거리는 소리를 용케 듣고 사부가 끔찍한 살상마법을 던져댄다. 내가 당신 시종 한 지도 벌써 반년이야. 태연하게 막아내고 바닥에 흩어져있는 서류를 모았다.
"얼른 가요. 의심되는 장소는 따로 있잖아요."
"그래. 가자."
우리 중에 가장 신분이 높고, 끝발도 좀 날려주는 빈센트 리클렌님을 앞세워서 공작성으로 쳐들어갔다. 기사들이 호들갑을 떨며 막아섰지만, 멋진 빈센트님이 꺼내든 칼에 모두가 찍소리 않고 물러났다. 스승님은 자기가 찍어둔 자리로 달려가고, 나는 대충 돈 바른 멋이나 구경하자는 심정으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멀리서 스승이 공을 쳤는지 악을 질러댄다. 내가 그러게 아닌것 같다니까. 알버트의 등을 팡팡 두드리면서 비틀거리다 벽을 짚었는데 그대로 쑥 밀려들어간다. 알버트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는 나를 급하게 끌어안고 그대로 계단을 굴렀다. 다행히도 계단은 길지 않았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붙잡고 앉아서 올려다본 지하실에는 사방에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주저앉아있는 인형들이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눈동자들이 순간 전부 멈추더니 우리를 쳐다본다. 알버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뒤에서 나를 감싸듯 안았다.
"미쳤어 이건."
인형과 눈을 마주친 순간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세상에.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소름끼치는 방에 저주마법을 걸어? 급하게 이동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내 실력으론 알버트와 같이 이동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이딴 곳에 혼자 남았다간 미쳐버릴거다. 마법이라고는 내가 장난처럼 쓰던 부양마법밖에 모르는 알버트의 눈을 가리고 있는 힘을 다해 짹짹이를 불러냈다. 주위에서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 대신 새들이 날개를 휘젓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간신이 손짓을 하자 새들이 일제히 계단으로 빠져나갔다. 짹짹이들이 스승을 발견해 이곳까지 끌고오길. 석상처럼 굳어있던 알버트가 어느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손을 더듬어 나를 붙잡았다.
"괜찮아. 스승님이 구하러 올 거야."
"메리. 절대, 절대로 밑에 보지 마."
"응?"
왜, 하지 말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한번 하게 되지 않나? 나도 모르게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밑에는... 머리속에서 시끄럽게 경종이 울린다. 절대로 사람이 들어오면 안 되는 마법진이다. 글자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구토감이 올라왔다. 내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스승님이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메리! 이 팔푼이가 대체 어딜 간... 이런 미친."
스승님이 급히 내 눈을 가렸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지나가고 탁한 지하실 냄새가 아닌 흙냄새가 났다. 바닥을 짚고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 투박하게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하나,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손이 하나. 왼쪽을 돌아보았다. 스승이 심각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다.
"한달 쯤 되었지?"
"그렇습니다."
"어떤가. 효과가 좋지?"
"예. 덕분에 업무 효율이 증진되었습니다."
티모시 리클렌과 독대하는 것도 벌써 여러번이다. 이제 그는 내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지 않고, 나는 그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과한 장난을 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내가 현 사건에 대해 상의하려 부른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더이상 이 만남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실을 은폐하려 들었다. 내가 자신을 좋게 보고 있으니 아주 좋은 기회이긴 했다. 물론 나는 내 옛 오라버니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나는 그대가 용의선상에 오를 줄은 정말 몰랐다."
"대체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하실 셈입니까?"
"그대가 더는 억울해하지 않을 때까지."
그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표정을 꾸민다. 언제까지 이 연기를 해야 할까. 이제 슬슬 티모시 리클렌도 내가 정말 마음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려 한다. 그 전에 해결되야 할텐데. 갑자기 바깥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황녀전하. 급한 소식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아 짜증난 척 하며 전령을 쳐다봤다. 그 뒤에 따라온 길드 소속 마법사가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로 말했다.
"오르타 공작의 성에서 금지 마법의 사용 흔적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발견 과정에서 오메르드 영식과 영애가 저주 마법에 당했다고 합니다."
"큰일이로군. 회의를 열어야겠어. 피뇨르 남작과 길드측 대표만을 부르게."
리클렌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통신마법을 사용했다. 쓸데없이 사람을 불러 시끄럽게 할 때가 아니다. 소란을 잠재울 거리를 찾아오라 보냈더니 오히려 일을 키워오다니. 대체 오메르드로만 살아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오메르드같을 수가 있는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먼저 이동겠네. 그대는 길드에 들러 자세한 상황을 듣고 보고하게."
이 끔찍한 소식을 빅토리아가 알아야 하는데. 그래야 그 한가한 탕아가 어떻게든 대첵을 세울 텐데 말이다. 뒤에서 시종들이 만류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내 발로 걸어 회의장에 도착했다. 비치된 종이에 간단한 사건의 나열을 적었다. 오메르드. 오르타 공작성 지하. 저주마법. 멍청한 아이는 아니니 이정도면 충분히 이해하고 처리할테다. 가볍게 한번 접어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가 내용이 보이지 않게 잘 접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른 오전에 허겁지겁 달려온 피뇨르 남작과 올리비아 로슈민에게 가볍게 눈인사했다. 뒤이어 들어오는 티모시 리클렌에게 웃어주고 바르게 앉았다.
"다들 모였군. 회의를 시작하게."
"예, 전하."
이전 사건으로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보다 더 무거운 분위기다. 그럴만도 하다. 제국의 귀족이 저주마법에 당했고, 심상치 않은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아직 그 인형들이 무엇인지, 어느 용도로 사용될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 지난 삶에서도 밝혀지지 않았었다. 지난 삶의 나는 독학으로 겨우 마법을 깨쳤기에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회의장에 모인 사람 중 둘 뿐인 마법사인 티모시 리클렌이 심각한 투로 물었다.
"올리비아 님. 아직도 저주 마법을 연구합니까?"
"학문으로서만. 절대로 마법의 구현방법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올리비아 로슈민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제자도 없이 들어와 직접 마법으로 열심히 부채를 부쳤다. 옆에서 피뇨르 남작이 부러워하며 손부채를 부쳤다.
"그래도 제 부관과 오메르드 영애여서 다행입니다."
"무엇이 다행인가. 그들이 죽길 바라기라도 한 겐가?"
어디 감히 내 전생을 욕해. 오메르드를 감쌌더니 피뇨르 남작이 시선을 가만히 두지를 못한다.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에 리클렌 영식이 한숨을 쉰다.
"남작께서 오메르드 영식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심술부리지 마십시오, 전하."
"그대를 봐서 넘어가도록 하지."
피뇨르 남작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 오메르드여서 다행이기는 하다. 그들은 운이 따르지 않으면서 여간해서는 죽지도 않는 이들이니. 사태는 심각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이 회의를 한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우리는 오르타 공작을 잡아들일 힘이 없고, 그는 벌써 수도 내에서 병력을 그러모으며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귀족들이 반란이라도 벌이려는 것이냐며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그들도 목숨이 아까우니 쥐죽은듯 몸을 낮추고 있다.
"올리비아 고모님. 위험한 건 알지만, 오르타 공작에 대해 조사해주세요."
로슈민의 기둥, 크로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전하가 건국왕의 후손에게 명령하지 못할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샅샅히 알아내드리지요."
이 세상의 모든 마법을 안다는 크로노스의 수장이 조사한다면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모두 알아올테다. 그럼 그의 혈통에 대해 알게될테니 황실이 뒤집어지겠지. 그러면 내 죽음에서는 한발자국 벗어나게 된다.
"오르타 공작은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직 수도에는 소식이 퍼지지 않았지?"
"예."
"그렇다면 잠자코 있어라."
"그도 다 알고 있을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움직일 수도 없다. 내가 황제는 아니지 않느냐."
내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후계자로 공표받지도 못한, 아래로 남동생이 있는 황녀. 내 권한이란 황성 내에서나 조금 뽐낼까, 귀족사회로 간다면 어림도 없다. 지금만 해도 나를 어떻게 회유해 제 집안에 시집오도록 하려는 빌어먹을 놈들도 있으니. 사랑에 빠진 영애같은 눈으로 티모시 리클렌을 쳐다보았다. 그가 태연하게 시선을 피했다.
"피뇨르 남작. 그대는 기사들이 술렁이지 않도록 잘 다독이게.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가는 골치아파질테니."
"명심하겠습니다."
"너무 술렁이면 국경 수비대로 배치해버리게. 그곳의 기사들도 쉴 때가 되었지."
할 일이 없어 풀이 죽어 있다가 갑자기 얼굴이 펴서는 신나하는 남작을 두고 크로노스와 눈을 맞췄다. 첫 회의부터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무언가 눈치챈 것 같기도 하지만... 증거도 없이 추궁할 수는 없다.
"잠깐. 리클렌 영식."
"예, 전하."
"영애에게 전해주게. 아무래도 빅토리아가 걱정되어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폐하를 뵙고 설명해두겠네. 그대들만 믿지."
내가 움츠러들면 저들이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턱을 당겨 똑바로 앞을 바라본 채로 회의장을 나섰다. 시녀들을 모두 물리고 초대 황제의 초상이 걸려있는 복도를 지나 문을 열어젖혔다. 창 하나 없이 어두운 방에 누군가 앉아있는 발치만 보였다. 문을 닫고 세걸음 나아갔다.
"어땠느냐."
"제 예상대로입니다. 아바마마. 부디 결정을 내려주세요."
"어려운 일이구나."
"황실과 귀족을 넘어 백성들의 목숨까지 위험한 일입니다. 부디 허락해주세요."
한숨소리가 대답 대신 들려왔다. 하틴 왕조는 오버다이어 하틴으로부터 겨우 6대밖에 내려오지 않아 지지기반이 약하다. 그 사이에서 벌써 30년이나 황제로 살아온 아버지는 많이 지치셨다. 내가 독에 당하고, 루드비히가 밤중에 자객에게 당할 뻔 한 일을 겪으며 그 강하던 분은 사라지셨다. 마지막 책임으로 황위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 전부인 부황께 무리인 부탁인 것은 알았다.
"허락하실 수 없다면, 적어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에스메랄다. 나는 너를 잃고싶지 않구나."
"아바마마. 우리가 칼을 빼들지 않으면, 그들이 우릴 찌를겁니다. 어마마마를 기억하세요."
"아나이스..."
황후. 아나이스 디쳇 하틴. 죄 없이 죽어가야 했던 나의 어머니. 오르타 공작의 손에 새카맣게 죽어야 했던 어머니. 감히 그 이름을 제 딸에게 붙인 치욕을 잊을 수 없다.
"이리 오거라."
부황이 내민 손을 잡고 가까이 다가갔다. 아버지는 나를 곁의 의자에 앉히고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동자로 가만히 바라보셨다. 아버지도 잊지 않으셨다. 자신의 손에 낀 반지를 뽑아 내게 끼워주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셨다.
"해 보거라. 대신 뒤는 내가 지켜주마."
"폐하!"
"너마저 황후를 따라 가버리면 루드비히를 볼 낯이 없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다오."
"절대. 절대로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황위에 오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지켜보시는 아래 하틴의 영광을 널리 알리겠습니다."
"그래. 그리 믿으마."
그렇게 감추려 했던 무거운 소식이 프라우를 덮쳤다. 황실에서 나서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 와중에 준비된 행사에 사람들이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거운 드레스, 무거운 망토. 화려하게 치장된 방에서 한창 준비중인 시종들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얼굴의 수도 시민들도 하나둘 나와 무슨 일인지 구경을 시작했다.
"전하. 하루아침 사이에 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아시지 않습니까."
"그대는 이 사태를 뒤집을 수 있는 묘안이 있는가?"
"그렇다 해도."
"나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했네."
권력이 모자라다면, 더 큰 권력을 끌어오겠다. 그것으로도 모자라다면 다른 이와 손을 잡아서라도 그들을 무너트릴 것이다.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주저없이 타인에게 상해를 입히는 자들을 지배층에 돌아가게 두는 것 만큼은 두고볼 수 없다. 시종이 문 밖에서 시간이 되었다 알렸다. 내가 일어나자 리클렌도 따라 일어난다.
"보필하겠습니다."
"되었네. 일이나 열심히 하게."
"위험합니다."
위험하기는 하다. 원래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사방이 적이 되는 법이다.
"부황께서는 평생 이 자리에 계셨었네. 자식된 도리로 어찌 피하겠나."
문을 열자 웅장한 악기 소리가 울려퍼진다. 티모시 리클렌이 고개를 숙인다. 그의 배웅을 받으며 붉은 카펫 위를 걸었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진다. 인파들 속의 내 적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넣은 것 처럼 당당하게 걸었다. 카펫의 끝에 서서 아버지가 기다리신다.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머리에 어머니가 쓰셨던 티아라를 얹어주신다.
세상에 이런 책봉식이 어디에 있나. 하틴 왕조 최초의 후계자 책봉식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 쇼를 위한 광대가 나다. 나의 티아라도 없이, 보여주기 식의 진행이다. 고르고 고른 시동들이 금화를 던진다. 그 알량한 눈속임에 평민들은 속아넘어갔지만, 귀족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나마 안도한 듯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다다. 모두 기억해두겠다. 그대들의 가소롭다는 눈초리도, 새로운 희망을 바라는 생각도.
눈동자. 눈동자. 눈동자. 사방의 눈동자가 나를 쳐다본다. 달려도 달려도 소용없다. 시선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다. 넘어지는 순간, 발목을 옭아매고 나를 끌고간다. 비명을 지르는 순간 어깨가 흔들려 잠에서 깨어났다.
"메리. 정신차려라."
"... 스승님."
"이 미친놈들이 드디어 사단을 벌일 모양이다. 당분간 잠자코 길드에서 지내라."
"알버트는요?"
"수도로 보냈다."
"말도 안돼. 저주받은 사람을 어떻게!"
"정신차려. 그 애는 네가 돌봐서 괜찮았다. 네가 문제지."
역시 고개를 숙이면 안됐다. 쓸데없이 마법만 많이 늘어서 너무 많은 걸 봐버렸다. 딱히 어찌 할 도리가 없으니 그냥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스승님은 내 얼굴에 흰 천을 덮어씌우고 무언가 마법을 사용했다.
"많이 위험해요?"
"그래.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하다. 이 팔푼아. 내가 어디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지."
"죄송해요. 그래도 실수였어요. 스승님이 소리만 안 질렀어도..."
"말은 잘해요, 말은."
이마를 찰싹 때리고 스승님은 한숨을 쉬셨다.
"이 천덕꾸러기를 두고 어떻게 떠나나."
"얼른 가보셔야죠. 미친 놈이 수도를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그냥 둬요."
"너는 네 목숨은 걱정도 안 되냐?"
"뭐... 살만큼 살아 봤고."
"어린놈이 말은 잘 해."
정말 살만큼 살았는데. 두번째 삶이면 그냥 거저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나. 거기에 알버트랑 클라렌스, 에스메랄다까지 있으니 이거 참 너무 많이 살았다. 나는 모르는 삶이지만. 길드의 먼지냄새와 시약냄새가 이렇게 편안하기는 처음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혀를 찬다.
"얼씨구. 살 만 한가보다?"
"안 죽었으면 살 만 한거죠. 다녀오세요. 길드는 제가 지킬게요."
"무너트리지나 마라. 잘 때 얼굴에 이거 꼭 덮고. 갖혀있는 놈들도 관리하고."
"네. 스승님은 올리비아 님이랑 싸우지 마시구요."
"오냐."
어쩐일로 순순히 대답한대. 빛처럼 사라지는 영감님을 멀뚱히 쳐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모범수가 감옥에 돌아왔으니, 죄수들을 관리할 시간이다.
'연성재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7회] 2017년 4월 하반기 (0) | 2017.04.30 |
---|---|
[6회] 2017년 4월 상반기 (0) | 2017.04.20 |
[4회] 2017년 3월 상반기 (0) | 2017.03.18 |
[3회] 2017년 2월 넷째주 (0) | 2017.02.26 |
2017년 2월 셋째주 2회 제출 (0) | 2017.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