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은 매일매일 환기를 해도 퀘퀘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런 곳인데 벌써 세달간 방치해뒀으니 그 냄새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창문을 모두 열어젖히고 대기마법으로 공기를 순환시켜도 찜찜한 건 내 코에 남아있는 잔형 때문이겠지. 그렇게 생각해야한다. 만약에 절대로 안빠질 냄새가 되었다면 죄수 선배들한테 너무 미안해진다.
"메리다... 우리 귀여운 막내가 길드에는 어쩐 일일까..."
"몰라... 니가 가서 물어봐. 나는... 논문을..."
"안돼... 내 인상이... 너무 험악해서..."
일단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면 그냥 직접 물어보는게 나을텐데 말이다.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내외하시는 수줍은 선배님들을 하나둘 수거해서 제자리에 앉혔다.
"죽기 싫어서 도망쳤어요. 스승님이 데려다주셨거든요."
"그 미친 영감탱이가?"
"네. 저주받아서."
내 이야기에 근처에 있던 시체들이 알아서 벌떡 일어나더니 제자리도 돌아갔다. 갑자기 주위가 너무 훤해져서 어이가 없다.
"저주받으신 분이 막 돌아다니면 어떻게 하니 빨리 돌아가."
"아니, 타인한테 영향을 주는 저주는 아니랬는데요."
"아... 그래."
"이 인간들이. 하나뿐인 심부름꾼이 저주에 당했다는데 위로는 못 할 망정."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일 못한다고 빵만 먹이라고 하면 잼도 구해서 넣어주고, 아침마다 놀라지 말라고 스프도 넣어주고... 은혜를 원수로 값네 정말. 어이없어서 쳐다보고 있으니 나랑 비슷한 시기에 길드에 들어온 크리스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그런데 무슨 저주?"
"몰라. 이상한 천쪼가리 주면서 목숨줄이니까 잘 챙기고 있으라고 하긴 했는데."
"혹시 마스터가 던져놓고 간 이거때문 아닐까?"
선배가 가리키는 걸 쳐다보려니 크리스가 화들짝 놀라 눈을 가린다.
"뭔 줄 알고 함부로 쳐다봐. 너 정말..."
아. 그렇지. 또 봤다간 정말로 영혼까지 빨려서 죽을지도. 천천히 뒤돌아서서 주머니에 잘 넣어둔 보자기를 꺼내 뒤집어썼다. 그랬더니 선배들이 조용해졌다. 느낌에 이쪽을 보는건 아닌 것 같으니 아무래도 내가 보면 안될 그걸 보고있는 것 같다.
"묘하다, 묘해. 저것은 우리가 쓸 마법진이 절대로 아니다."
"맞아. 옥사나 놈들이나 쓸 마법진이다. 우리처럼 크게 노는 사람들은 절대로 저런건 안 쓰지. 아니면 크로노스에서나 쓸지도 몰라."
다른 관점으로 들으니까 또 새롭네.
"땡. 베르너입니다."
"오냐오냐 하니까 선배들한테 사기도 치려고 그러냐."
"아닌데. 진짠데. 내가 금지마법 조사 위원회 담당자잖아요."
"그렇지. 그랬지... 정말 베르너냐?"
"네. 베르너 출신 마법사가 꾸며놓은 공방에서 발견한 거니까요."
내 말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그러더니 누군가 하나 용감하고 무식한 선배가, 내 짐작으로는 하루가 멀다하고 논문으로 영감님한테 매타작을 당하는 올리 선배가 벌떡 일어난 것 같다. 그리고 머지않아 쨍그랑 소리가 시원하게 울렸다.
"아이고, 이 미친놈아!"
"올리 이 새끼 내가 언젠가는 일 칠줄 알았다!"
아이고. 스승님. 올리 선배가 증거품 깼어요. 걱정할 새도 없이 갑자기 목이 졸렸다. 아무것도 없는데.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뒤집어쓰고 있던 천이 멀리 날아가있었다. 온 몸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옭아매 움직일 수도 없는데. 제발 누가 뒤좀 봐.이 미친 인간들아. 뒤에 사람 있다고.
"아무것도 없잖아. 괜히 깼네. 다시 붙이자."
"이 미친 놈아. 그게 확인하고 싶어서 깼냐?"
"넌 좀 맞아야 해. 아르카나님이 왜 쫓아다니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리와 이자식아."
"얼마나 놀랐으면 그 말 많은 애가 아무말도 없어. 오늘 잘 됐다. 그 미친 성격 고칠때까지 맞자!"
그 말을 하자마자 선배들이 흠칫 하더니 전부 고개를 돌린다. 인간들아. 보고만 있지 말고 좀 살려줘. 눈물이 차올라 점점 앞이 희미해져가는데 움직일 생각도 않고 뭐 하냐고. 그래. 내가 언제 남한테 목숨 구걸했냐. 내가 알아서 자주적으로 살아남겠다. 겨우 움직이는 손가락을 까딱여 바닥에 떨어져있는 보자기를 불러왔다. 깃털처럼 팔랑이며 날아와 내 머리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러자마자 언제 그랬냐는듯 옭아매던 기운이 사라지고 목도 풀렸다. 숨. 숨 쉬자. 금쪽만큼 귀한 공기. 열심히 숨을 쉬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붙잡는다.
"메리. 방금 뭐였어?"
"뭐, 이 배신자야. 동기 사랑이랄 때는 언제고. 꺼져."
쳐내고 마저 열심히 공기를 만끽하는데 선배들이 금방이라도 나한테 마법을 쓸 것 처럼 손을 꼭 쥐고 다가온다. 뭐야. 이거 무슨 상황이야.
"메리 오메르드. 방금 뭐였냐고 물었어."
"몰라요. 뒤돌아 서 있었는데 어떻게 알아. 선배들이야말로 뭐했는데요."
덮어쓰고 있던 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팔을 양쪽으로 벌리자 선배들이 공기에 밀려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부서진 인형이 있었다. 인형의 눈이 마지막까지 팽글거리다 나를 향했다. 오 이럴수가. 나 지금 또 저주받은건가. 그런것 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올리 선배. 저거 이번 사건 관련 현장에서 나온 증거."
"아니. 그거 말고. 너 뭐야."
"메리 오메르드. 아르카나 제자인데요. 선배들 밥 챙기는 노예."
"이름 말고. 대체 너 뭔데 그런 저주를 받고도 멀쩡해?"
무슨 저주인데. 영감탱이도 안 알려준 저주를 6개월차 신입이 어떻게 알아. 멀뚱히 서서 눈만 깜빡이고 있으려니 보자기가 흘러내린다. 다시 주섬주섬 뒤집어쓰고 인형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일단 저것 좀 치워주실래요. 조금 죽을 것 같아서."
선배님들이 손가락을 튕기자 바로 흔적도 안 남기고 사라졌다. 설마 없앤건 아니겠지. 저거 중요 증거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의자를 불러내더니 억지로 앉힌다. 그리고 손가락을 펴서 눈 앞에 흔든다.
"이거 몆 개?"
"장난하냐."
"정상인데. 그럼 혹시..."
그러더니 마력 감별할때나 쓰는 막대를 가져다 내 옆구리에 푹 찔렀다.
"아 왜 그러는데 진짜! 집단 폭력이냐? 나 황녀님한테 이른다? 응? 나 에스메랄다 님이랑 친하다!"
"정상인데..."
"왜지? 왜 영혼을 쥐어짤 기세로 뽑아당겼는데 멀쩡하지?"
선배들이 한데 모여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아 그래서 내가 무슨 짓을 당한건데. 왜 안 알려주는데. 아무리 선배 보기를 우습게 알아도 그쪽에다 난리를 칠 수는 없으니 크리스를 얌전히 노려보았다.
"뭔데. 왜 그러는데."
"어... 그러니까... 방금 인형에서 빠져나온 저주마법이 네 영혼을 뽑아내려고 했는데 실패한 것 같아..."
아... 영혼... 내 소중한 영혼 말이지. 가 아니잖아! 아 이런 올리 이 미친 인간아! 바로 주변에 굴러다니는 솜방망이를 집어들고 올리선배한테 뛰어들었다. 성질변형으로 낭창낭창하게 휘게 만들어 마구 휘둘렀다. 옆에 있는 선배들은 같이 맞으면서도 아픈줄도 모르고 끙끙거린다. 그러더니 내 멱살을 잡고는 흔들어댄다.
"아 왜! 왜? 왜! 왜 멀쩡하니? 왜 안죽었어? 말좀 해봐!"
"이 미친 놈들이 이제 막내보고 죽으래? 난 안죽어! 아직 못 죽어! 아아아아악!"
답답한 마음에 멱살을 붙잡은 마일스 선배를 냘려버리고 소리질렀더니 죄수들의 조망권을 위해 하나 남겨둔 창문이 깨졌다. 모두가 조용히 창문을 쳐다봤다.
"아... 마스터가 혼신을 다해 탈출방지 마법을 걸어둔 창문이..."
늘 반죽음 상태로 계시던 펠릭스 님의 말에 모두가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도둑처럼 창문을 뛰어넘어 자유를 만끽했다.
"오! 태양! 나의 자유!"
"오메르드! 오늘이 몇년 며칠이냐!"
"107년 1월 23일이요."
"벌써 해가 지나갔나... 오늘을 오메르드 해방일로 부르자!"
"야아아아!!!"
단순한 인간들... 힘들게 산다. 그나저나 내 영혼을 뽑아가려 했단 말이지.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해봐라. 내가 영혼을 뽑아서 물레방아로 찧어주마. 선배들과 간부들은 내 저주에 대해 까맣게 잊은 듯 펄쩍펄쩍 뛰며 짹짹이를 보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아무도 깨진 창문을 고칠 생각을 않네. 하긴 우리 학파는 창문이 깨지면 수리마법을 쓰느니 새 창문을 다는 사람들이다. 내가 부쉈으니 내가 직접 고치고 흘러내리는 보자기를 추슬러 망토처럼 묶었다. 그랬더니 선배들이 몰려와 나를 짊어지고 달린!!!다!!! 이 미친 인간들아!
"만세! 만세!"
"만세는 무슨 만세야, 미친 놈들아! 내려줘!"
"만세! 오메르드 만세!"
선배들이 힘을 모아 부양마법으로 나를 허공에 던졌다. 화살처럼 위로 쑥 솟구쳐 날아가는 새와 눈이 마주쳤다. 새가 깜짝 놀라 푸드덕거리다 떨어진다. 나도 떨어진다.
"나 아직 비행마법 못 해! 못 한다고!"
"만세!"
"야!!!!"
무섭다고! 하한번만 하라고! 몇번 하는건데! 위아래로 출렁이는 마나에 실려서 움직이다 보니 흐름이 느껴지고, 그 틈에 내 마나를 집어넣어서 움켜쥐니 내가 공중에 멈춰섰다. 아래를 쳐다보고 있으니 선배들이 만세 하고 또 외친다. 죽어라 인간들아.
"으아아아아!! 다 죽여버릴거야!! 블리자드!!!!"
"만세!!!! 에취!"
하루 종일 돌아다닐 때마다 찬사를 듣고 있자니 미칠 것 같다. 아니, 에스메랄다는 어떻게 이러고 살지? 어릴 때부터 듣고 살면 적응이 되나? 황제 일가들은 일상 생활이 가능한가? 정말 믿을 수가 없는 부류들이다. 간부님들이 찾아와 고맙다며 악수를 하고 글썽이는데 내가 다 미안하더라. 진작에 깨 줄걸. 근데 왜 그렇게 쉽게 깨졌지. 아무래도 스승이 멍청하게 파괴방지 마법을 안 걸어놨나보다. 일단 탈출 방지 마법은 복구해뒀으니 시간날때 들러서 파괴 방지 마법도 걸어둬야겠다.
나 아직 공격마법은 하나도 못 배웠는데 무슨 크로노스 마냥 잡기만 늘어간다. 내가 이러려고 아르카나에 들어왔나... 일단 스승이 가만히 있으랬는데 사고를 쳤으니 보고서를 소상히 적어 올려야겠다. 지하실에 인형이 수두룩했는데 누가 잘못 건드렸다가 저주마법에 당하면 죽을 지도 모르니까. 이런걸 짹짹이로 보내면 분명히 바쁜 와중에도 길드로 돌아와 응징하고 갈 테니 정성스럽게 글로 옮겼다. 전생에는 달필이었는데 왜 이번 생에는 글씨가 이렇게 못생겼는지. 대충 알아볼 수 있으면 됐지. 부엉부엉마법에 편지를 맡기고 보자기 망토 위에 망토를 덮었다.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지. 놓쳤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메리가 쓰러졌다. 태어나서 한번도 앓아본 적 없는 메리가. 차마 어머니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할 수가 없어 자청해서 당직도 서고, 야근도 했다. 잔업은 널렸고 아무도 하고싶어하지 않는 책상업무니까. 쓰러진 메리에 관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조치하라는 지시서를 펼쳐놓고 한참을 넋놓고 있었다.
"알버트. 괜찮나?"
"... 괜찮습니다."
"전혀 안 괜찮은 것 같네. 퇴근한 지 얼마나 되었나?"
눈을 피했다. 남작님. 기왕이면 다른 데서 눈치좀 키워주시면 안될까요. 대답을 미루고 있으니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는 먼저 가봐야겠네. 늦으면 줄리에타가 잔소리를 늘어놔서 말이지. 대부인께서 걱정하시지 않게."
"네. 먼저 들어가십쇼."
문이 닫히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서류를 쳐다보았다. 달력을 보니 벌써 그날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다. 그러고보니 내일이 황녀님의 책봉식이니 벌써 2월이다. 편지를 보내려 해도 시종이 없어 애만 태우고 계실 어머니. 혼자서 우릴 키우느라 고생하셨는데, 다 커서 이런 일로 슬프게 해 드릴 수는 없지. 서류를 쥐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정문 바로 앞에 붙어있는 게시판에 지시서를 붙여놓고 건물을 나섰다.
오랜만에 도착한 저택은 어머니께서 그간 받은 월급을 어찌나 살뜰하게 쓰셨는지 무너져가던 곳을 전부 수리해 어릴적 추억 속의 저택으로 돌아와있었다. 겨우 한 달이었는데. 감상에 젖어 서 있으니 집사가 반겨왔다.
"어서오십시오, 도련님.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네? 이 시간까지요?"
"아가씨께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 뒤로 한숨도 못 주무시고 계십니다."
"연락하지 그랬어요."
"마님께서 그러지 말라셨습니다."
급히 어머니 방으로 뛰어갔다. 문을 여니 난로가에 앉아 벽에 걸려있는 초상화를 보고 계셨다.
"왔구나."
"어머니."
바로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았다. 수척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원망이 아닌 걱정이 가득했다. 당연히 그랬을텐데. 왜 나는 부담스러워 했던걸까.
"죄송해요. 제가 메리를 지켰어야 했는데."
"아니다. 아니야. 건강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메리, 메리가..."
눈앞에서 쓰러지던 메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메리가, 내가 죽던 그날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내가 꼭 지켜주려고 했는데. 어머니 곁에 있으니까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아서 이를 악 물었다. 그랬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메리는 무사하단다. 클로드님이 위험해서 수도에는 올 수 없지만, 길드에서 요양해야 한다 말씀하셨단다. 걱정말고 푹 쉬렴, 알버트. 내 아들."
"집에도 못 오면 전혀 괜찮지 않은 거잖아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내가 대신..."
"알버트!"
어머니가 소리치며 어깨를 붙잡아 세우셨다.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메리가 그런 이야기 들으려고 널 지켜줬다고 생각하니?"
"하지만..."
"네가 저주받았다면 오히려 더 위험했을거라 그러셨다. 메리는 꼭 무사히 돌려보내겠다 하셨으니 제발 무리하지 말아라, 알버트."
메리는 무사할 수 있는건가? 나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되는거지?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검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주저앉아서 어머니에게 안겼다. 힘들다. 너무 힘들다.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느라 지쳤다. 메리의 확신에 가득찬 대답이 듣고싶었다. 우리는 무조건 살 수 있다고.
"전하. 오메르드입니다."
"들라."
책봉식 이후 황녀는 이전까지의 자신을 연기하던 것을 모두 벗어던졌다. 상의도 없이 멋대로 진행해버려 빅토리아가 또 쓰러질 뻔한 일이 있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힘없는 황녀에서 하틴 왕가의 힘을 물려받은, 진정한 후계로서의 자질을 제대로 드러내보인 에스메랄다는 이제 더이상 성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더는 직접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했을텐데."
"리클렌 영식의 부탁으로 방문했습니다."
케이스에 담겨있는 반지를 건넸다. 호위기사가 눈을 빛냈다. 유감입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건이라. 에스메랄다는 반지를 만져보곤 손에 끼웠다.
"요새 영식이 나를 피하는 듯해."
"전하께서 생신 선물로 범인의 목을 찾지 않으셨습니까. 이 넓은 프라우에서 어떻게 찾겠습니까? 당연히 일에만 몰두해야지요."
전혀 화나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해도 무섭지 않은걸. 황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인간.
"그렇지. 영식이 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
"예..."
"그럼 가보게. 참. 이제 당분간은 그대 같은 하급자가 취급할 수 있는 자료는 없을테니 본업에 집중하게."
"알겠습니다. 프라우의 치안을 위해 노력하겠나이다."
귀찮구나. 대충 손을 휘젓고 황녀는 다시 서류더미로 빠져들었다. 나도 집무실을 나왔다. 하, 무슨 황제가 사는 집에 이렇게 벌레가 많아. 그리고 황녀 집 벌레면 황녀한테만 관심주면 안될까. 정문을 나서자마자 날아오는 화살을 기둥 뒤에 숨어 막고 검을 뽑아들었다. 달려드는 암살자들의 손을 날려버렸다. 귀찮게들 군다. 소란에 경비병들이 뛰어와 암살자들에게 창을 찔러댄다. 아. 메리 보고싶다. 메리가 있었으면 마법으로 다 날려버렸을텐데. 지금은 나 혼자니까 어쩔 수 없지. 도망치려는 암살자를 붙잡아 대충 복면을 입에 물렸다.
"감히 황녀전하의 처소에 숨어든 놈들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심문해 정보를 알아내라."
"예, 기사님!"
아. 아직 기사 아닌데. 뭐 어때. 언젠가는 될텐데. 괜히 사람한테 칼을 휘둘러 기분이 나빠졌다. 나를 기다리던 마차에 흉수들을 태워 보내고 나는 기사단까지 뛰었다. 마침 순찰갔던 선배들이 돌아왔는지 말에서 내렸다.
"너는 아무리 종자라지만, 기사가 채신머리 없이 뛰어다니냐."
"기사 되면 말 타고 다닐게요."
"꼭 그래라. 하틴 기사단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별로 뛰지도 않았는데 땀이 축축하게 묻었다. 손을 내리니 빨간 피가 흥건하다. 아, 아까 튀었나. 아니면 나도 모르게 어디 다쳤나. 목을 더듬어보니 멀쩡하다. 선배들이 황당해하며 수도가로 걷어찼다. 아, 아프다. 유진 선배가 물을 한 통 퍼 머리에 부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왔길래 피를 뒤집어썼어."
"황녀전하 집무실에 다녀왔어요. 조용하길래 괜찮나 싶었더니, 나오는 길에 덮치더라구요."
"다친 곳은 없겠지. 오메르드니까."
"당연하죠."
오메르드가 겨우 그정도로 다치면 이름 값도 못 한다고 욕 먹는다. 수건을 뒤집어쓰고 연병장으로 가니, 선임기사 선배들이 슬픈 얼굴로 단장 집무실에 끌려가고 있었다.
"당분간 보직 해임이라서요. 저 뭐 하면 돼요?"
"훈련하고, 범인 신고 들어오면 쫓아가고, 순찰하고. 시키고 싶어도 너는 파트너도 없고, 담당 기사가 단장님이셔서 못 한다."
아, 단장님. 진짜 당신 도와주는거 하나도 없으시다. 우울하게 선배들 옆으로 가 검이나 휘두르다 집에 가는, 녹봉값 아까운 인생을 살아야겠지. 그러면 월급도 지금까지보다 적게 나올테고... 메리도 지금은 쉬는 중이니 다시 가세가 기우는구나. 오메르드 인생이 뭐 이렇지. 그럼 그간 선배 후배 동기들이랑 못 나눈 대화도 나누고, 인사도 좀 하고... 그러면 되겠지. 아무생각 없이 단장님 집무실 창문을 쳐다보니 엄청 아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계신다. 아. 다행이다. 아직 종자라서 다행이다. 절대로 당분간 종자로 살자.
"선배. 저 훈련 봐주세요!"
"입단하고 반년동안 책상에만 붙어서 훈련도 못 했지? 얼른 가자. 못 따라오면 쫓아낸다."
"네!"
"가지 마! 돌아와!"
단장님께서 애타게 부르셨지만 황명이 먼저니까. 마지막 가는 길 인사 올리고 선배들을 따라 뛰어갔다. 따라간 곳에는... 분명히 기사단에 입단해놓고 병사들처럼 무식한 훈련을 하고 있는 선배님들이었다. 지옥... 여긴 지옥이다... 하틴 기사단이 충원을 엄청 열심히 하는 이유를 알겠다. 세상에. 이럴수가. 선배님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 계신가요... 대체 왜 사람만 훈련하면 되지 왜 말이랑 같이 뛰는데! 왜 말보다 빠른데! 죽어 그러다 죽어!
"이게 뭐예요!"
"너는 저거 보지 마라. 저건 숙련자용 코스야. 우리 막내는 초보자용 코스로 가야지."
그곳에는 입단 후로 한번도 본 적 없는 동기님 후배님들이 있었다. 열심히 연병장 양쪽을 오가고 있다. 아. 지금이라도 에스메랄다한테 쳐들어가서 원위치 시켜달라고 하고 싶어졌다. 양팔이 붙잡힌 채로 가여운 동지들의 곁에 끌려가며 생각했다. 나도 얼른 사표내고 나가는 게 더 장수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여기서 비비고 있는게 장수할 수 있는가. 아무래도 아무런 뒷배경도 없는 것보다는 죽더라도 뭐가 있는 편이 다른 나한테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때려치고 나갔다가는 빅토리아한테 죽을때까지 구박받고, 그 형들한테 치이느니 차라리 몸이 고된게 나을 것 같아서 버티는게 아니다. 절대로.
다들 미안. 사실 내 잘못이야. 내가 오르타 공작을 좀 자극했거든. 별것도 아닌 거로 자랑한다고 했더니 발끈해서 가져온게 인형이네. 근데 나도 좀 많이 놀랐으니까 봐줘.
벌써 3월이다. 그 내가 사교계에서 잠시 발을 뺀지도 벌써 네달이나 지났다. 날도 풀렸고, 그간 내 또라이같던 행적도 어느정도 잊혔을거다. 에스메랄다의 책봉식까지도 무리해서 참가하지 않았으니, 탄신 연회라도 참가해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은혜도 모른다고 욕먹겠지. 요새 유행을 적당히 따르면서 편한 옷으로 골라입고, 진상품은 티모시 오라버니에게 맡겼다. 마리아 생일때는 안 도와줘도 잘 고르더니, 에스메랄다 선물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난감해하는 게 웃겼다. 안그래도 황녀가 그 귀한걸 선물해줬으니 난감할 만도 하지. 그나저나 아직 범인은 못 잡아서 오라버니들은 연회도 못 가고 마냥 철야다.
"어머니도 가실거죠?"
"얘도 참. 내가 가서 무얼하니? 그 시간에 이 밀린 영지 서류나 봐야겠다."
메리가 쓰러지고 나서 부터는 아버지도 끌려가서 그 나이에도 열심히 현장업무를 뛰시는 중이다. 그럼 내가 집안 대표로 참석해야하네. 갑자기 너무 부담스러운데. 나 남들처럼 얌전하게 연회 가는건 처음이라 옆에 누가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어머니도 안 가니 에스코트를 받아야 하는데 누구한테 부탁하지?
"참, 아가. 줄리에타한테서 편지가 왔단다."
"피뇨르 영애가요?"
뭐지. 나 걔한테 편지 보낸 적 한번도 없는데. 어쨌든 우리 알버트가 신세지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당분간은 좀 어울려볼까. 집사가 봉투를 개봉해 건넸다. 살짝 열어보니 여자 글씨 치고는 제법 힘있게 썼다.
"비키. 네 오라비들이 바빠서 참석하지 못하는데, 아드리앙에게 에스코트를 부탁할까?"
"아드리앙이요? 아마 벌써 에스코트할 레이디가 있을 걸요."
내가 아드리앙이랑 같이 들어가면 기껏 얌전해지기로 한 의미가 없어요 어머니. 난 그 인간 앞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그리고 그 곁에 있으면 내가 말라죽을거다.
"그리고 전 알버트랑 같이 가려구요."
"오메르드 공자?"
어머니. 방금 목소리 좀 떨린 것 같은데요. 읽던 서류도 내려놓고 다그치시면 좀 무서운데. 이럴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무구하게 대응하는 수밖에.
"네. 메리가 그렇게 되서 많이 힘들어하더라구요. 친구라고는 저 하나 뿐이니까 달래줘야죠."
"마리아와는 서운해졌니? 요새 오메르드와 친하게 지내는구나."
"유일하게 먼저 다가온 친구들이예요. 단 한번도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한 적 없어요."
보통은 저런 애들이 등처먹으려고 오긴 합니다만, 저는 제가 잘 하는거니까 괜찮아요. 아 그런데 괜히 말했다. 어머니 표정이 더 어두워지셨다. 괜찮아요. 괜찮아. 다 내 부하들이예요. 옆에서 눈치만 살살 보던 클라렌스가 기어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지금 당장 준비 시작하셔도 늦어요."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제가 황녀 전하한테 아버지라도 좀 퇴청시켜달라고 부탁해볼게요."
"아서라. 그러다 경을 친다."
"괜찮아요. 제가 황녀 전하의 하나뿐인 친구라서."
어머니는 그 말에 언제 우울했는지 모를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다. 눈빛에서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뚝뚝 떨어진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지요? 이렇게 되려고 여러번 죽었어요.
"오는 길에는 꼭 아버지 모셔올게요!"
"아직 범인이 안 잡혔다니 조심하고."
"네."
서재를 나오며 바로 편지를 열어보았다. 역시. 줄리에타랑 데먼한 척 하면서 깨는 다 볶고 있었구나. 루이스 차노트. 언제쯤 대공을 만나게 해주려는지 한참 기다렸어. 오늘 연회에서 안면몰수하고 몰아붙이려고 했는데 한발 빨랐네. 겉치레 인사글을 쓱 훑으며 마지막 문장을 보고 편지를 구겼다.
"샐리. 지난번 마리아 생일때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겠지?"
"당연하죠! 이번에는 클라렌스도 많이 늘었으니 더 아름답게 꾸밀 수 있어요!"
"그래. 난 오늘도 너희만 믿는다."
믿음이 너무 과했다. 완벽을 넘어섰다. 샐리는 대체 어디까지 발전하려는 걸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코르셋까지 입고 가는데 조금 봐주면 안됐던걸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겠는데 주렁주렁 달아 놓은 보석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치여 죽겠다. 안돼. 겨우 이런 거로 죽을 수는 없지. 여섯번 죽은 빅토리아들이 웃는다. 알버트는 자기 말도 없고, 그렇다고 마차를 빌릴 정도로 배짱이 크지도 않으니 아마 대충 걸어가려고 하겠지. 그 전에 분명히 기사단 정복을 입고 가려 할테니 붙잡아야한다. 근무일도 아닌데 직장에서 입는 옷 입고 직장에 가면 기분 이상할텐데 나도 참 이상한 사람이야.
"아... 가기 싫다. 안 가면 황녀님한테 죽겠지."
"알버트.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누누히 말 했는데도!"
"하지만요, 어머니..."
아. 그래. 오메르드가의 유일한 상식인이자 비 오메르드가 아직 살아계셨지. 어머니가 손좀 봐 주셨는지 옷도 제대로 입고 있다. 내가 보낸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을 입고 불편한지 자꾸 소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마차가 멈춰서자마자 클라렌스가 얼른 문을 열었다.
"알버트."
"비키?"
"아까워서 못 입을 줄 알았는데. 잘 어울린다."
조금 칭찬해줬다고 대번에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도 못 마주친다. 으이구. 저래서 어떻게 큰 일을 맡기나. 역시 대업은 메리한테 맡겨야 하는데. 기다려도 움직일 생각은 않고 있어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 받으러 왔어."
그 말에 부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알버트를 쏘아보곤 등을 밀었다.
"알버트. 레이디가 먼저 부탁할 때까지 뭐 하고 있니?"
"어, 그러니까... 리클렌 공자님들은?"
"우리 오빠들은 나처럼 한가하지 않아서. 그리고 아는 또래는 너 뿐이고."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빨리 안 잡아서 팔이 떨어지면 넌 죽는다. 그제야 달려와 얼른 마차에 올라타 손을 잡았다. 그래도 눈치가 늘기는 하는구나. 다행이다. 언제까지 저렇게 사나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사내아이같은 누이와 함께 자라 여성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 잘 모르는 아이입니다. 영애가 부디 이해해줘요."
"괜찮아요. 벌써 몇 번째 함께 가는걸요. 배웅 감사합니다, 부인."
클라렌스가 허리를 숙이며 얼른 문을 닫았다.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고 오메르드 저택에서 한참 멀어지고 난 뒤에야 팔뚝을 찰싹 때렸다.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거니?"
"음... 옛날에는 나였고 지금은 그 이후의 나?"
"겨우 그거 뿐이니."
"... 인생의 구원자?"
"그런 줄 알면 좀 알아서 도와주고 그래라. 어떻게 내가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 하니?"
어깨를 마구 때리며 잘 좀 하라고 계속 주입했다. 클라렌스가 옆에서 날 붙잡으며 말렸다.
"빅토리아! 보석 떨어져!"
"후우. 제발, 우리 잘 좀 살아보자 알버트."
"으, 응."
"네가 내 속 안 긁어도 오늘 많이 힘들단 말이야. 난 차노트 대공을 만나야 하니까, 너는 어디서 나랑 밀회라도 즐기는 척 하고 있어. 안 들키게 조심하고."
"야! 내가 왜 너랑!"
"나도 너랑 그러기 싫다. 근데 아드리앙 모문보다는 네가 낫지 않겠니..."
아드리앙은 절대로 안돼. 내 말에 알버트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더니 결의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나, 열심히 할게!"
"아냐. 적당히 해... 부탁이야."
실랑이를 하는 사이 벌써 황성이다. 마차가 가장 앞에 자리한, 개인 마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건물에 도착했다. 이제 말괄량이는 안녕이다. 가볍게 심호흡하며 알버트의 손을 잡았다.
"놀라지 마. 나 이제부터 제국 최고의 레이디가 될거니까."
"네가?"
알버트가 대놓고 비웃는 사이 바깥에 서 있던 근위병이 마차 문을 열었다. 알버트도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에스코트한다. 마차에서 내리자 시종이 우리 이름을 외쳤다. 오랜만에 연회에 나타나서 그런지 모두들 나를 한번씩 쳐다본다. 눈길도 주지 않고 똑바로 걸어 들어갔다. 멀리 상석에 앉은 에스메랄다와 눈이 마주쳤다. 지루했는지 부루퉁하던 얼굴이 펴졌다.
"우선 황녀 전하께 인사드리러 가죠."
걷는 것도 잊고 나를 쳐다본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정말 생각도 못한 것 같다. 내가 각오하라고 했을텐데. 팔짱낀 팔로 허리를 지긋이 눌렀다.
"우리가 뭐라고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뵈러가요."
"난 황녀 전하의 하나뿐인 친우예요. 당연히 가장 먼저 뵈러 가야죠."
"원하시는대로."
알버트는 이제 조금 정신을 놓은 듯하다. 그래도 제대로 걸어서 에스메랄다의 앞에 도착했다. 빅토리아는 그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갈고닦은 예절을 늘어놓았다.
"알란타의 미래이신 에스메랄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대마저 그럴텐가. 내게 편히 대해도 좋다 하지 않았는가."
"어찌 감히... 지금까지의 저는 잊어주세요. 오늘부터는 전하를 훌륭하게 보필할 빅토리아 리클렌이 되겠습니다."
"호오. 기대하겠네. 그나저나, 결국 자네 오라비는 오지 않은듯 해."
에스메랄다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루드비히 황자가 허둥댔다. 황자도 참 귀엽긴.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함께 왔어야 했는데 퇴청을 막고 있다고 연락이 와서..."
"감히 누가 퇴청을 막는단말이냐!"
너요 너. 네가 그랬잖아. 놀리려고. 항의할거야. 황제한테 항의할꺼야 이 악덕 고용주야. 이제 알버트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신차려. 저거 너야. 저래서 기사는 어떻게 하나. 누나는 정말 네가 걱정스럽다.
"대신 오라버니께서 선물을 보내셨어요. 받아주세요."
"됐네. 선물은 범인의 목으로 달라고 했거늘."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아 정말. 네가 받고 안받고는 상관 없어. 난 주고 갈거다. 에스메랄다는 잠시 내 눈을 쳐다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손짓했다. 단상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서자 알버트가 침을 꿀꺽 삼키고 내 손을 잡아 에스코트했다. 그리고 황녀의 앞에 서서 상자를 내밀었다.
"오라버니와 제가 고심끝에 골랐습니다. 부디 받아주세요."
"그대가 수고했다면 당연히 받아야지."
"유용하게 쓰였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게."
보이지 않게 덜덜 떨고있는 알버트의 손을 잡고 있으니 내가 에스코트를 받는건지, 알버트를 에스코트 하는 중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어찌어찌 계단을 내려와 홀의 외곽으로 이동했다. 알버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있으려니 아무래도 앉아서 쉬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자리좀 피해 있으라고 시켰지, 정말로 상태가 나빠지라고 하진 않았는데.
"알버트. 오랜만에 걸었더니 지치네요. 테라스에서 잠깐 쉬어요."
"그래.. 요. 저쪽 테라스가 바람이 적당히 들어서 좋을거예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잠깐 이야기도 해요."
"응..."
정신차려. 우리 지금 내외하는 중인데. 거의 끌다시피하며 테라스로 들어가 의자에 앉혔다. 알버트는 그제야 안색이 좀 나아져서 숨을 깊게 내쉬었다. 옆에 앉아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서 언제 승진하고, 언제 기사단장이 될거니."
"그 전에 죽을것 같아요. 살려주세요."
"걱정 마. 죽기 전에 알아서 조절해줄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렇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바로 이전 생에는 지겹게 봤는데. 매일같이 초대받지 못한 파티를 기웃거리면서... 아무도 내 편은 없고 사방이 적이었다. 지금은 어설프고 모자라긴 해도 내편이 곁에 있어주니까. 알버트의 어깨에 기대고 콧노래를 불렀다.
"제국 최고의 레이디가 될거라더니."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러지 말자. 서로 어색하잖아."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문 너머로 머리가 불쑥 들어왔다. 대체 분위기 파악 못하는 게 누구냐.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세상에. 내 딸랑이 줄리에타 피뇨르다. 알버트의 안색이 다시 새카매졌다.
"여, 영애."
"오랜만이네요 공자. 어머! 제가 혹시 방해했나요?"
"아닙니다."
직장 상사 딸이라고 네가 고생한다. 메리한테 내가 잘 돌봐준다고 약속했으니까 책임져줘야지.
"오랜만이예요 영애. 마리아의 생일 이후로 처음이죠?"
"네! 정말 오랜만이예요. 그동안 연회에 안 나오고 뭐하셨어요?"
부담스럽게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쳐다보는 줄리에타랑 마주보고있으려니 속이 불편하다.
"그간 부족했던 것들을 조금 공부하고, 어머니를 도왔지요."
"영애... 너무 완벽해지시면..."
"무슨 일로 오셨어요? 빈 테라스라고 착각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또 쓸데없는 찬양을 하려 든다. 내가 왜 너랑 말 안섞으려고 하는데... 그것만 줄이면 내가 공식 딸랑이 시켜줄 텐데. 그제야 줄리에타는 입을 가리고 깜짝 놀라 소근거렸다.
"우리 공자님께서 영애가 전에 부탁하신 걸 가져오셨대요. 움직이기 힘들어서 직접 와주셨으면 한대요."
아, 차노트 경. 아버지를 물건이라고 둘러대시면 어떻게 해요. 이 눈치없는 영애가 어디서 소문내지 않게 하려고 그런 것 같은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뭘 들고 나오는 척을 해야 하지? 우선은 따라가는 게 먼저다.
"어쩌죠, 알버트?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아, 오메르드 공자님! 요새 아버님께서 공자가 없어 힘들어하신답니다. 어서 승진해서 힘이 되어주세요."
"네..."
줄리에타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벌써 지쳐보이는 알버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 힘들면 기사단에라도 가서 잠깐 쉬고 있어. 영애들 피해서 도망쳤다고 해."
"응... 늘 고마워."
"아니야.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네. 앞으로는 아드리앙이랑 다닐게."
알버트가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그래. 너도 애쓴다. 줄리에타가 초조한지 기웃거린다. 얼른 그녀를 따라 나섰다.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그녀의 말에 적당히 응대하며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 들어갔다. 대체 얼마나 더 가야하나 싶을 때, 문을 열자 복도의 끝에 루이스 차노트가 서 있었다. 줄리에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헤실거렸다. 얼마나 좋으면.
"오셨습니까."
"네. 힘든 부탁이었을텐데, 감사합니다."
"아니요. 그렇진 않았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줄리에타의 어깨를 안고 복도를 가로질러 나갔다. 음. 나 솔직히 돌아나갈 자신 없는데. 어떻게든 나갈 수 있겠지. 우선은 제일 큰 문제부터 해결하자. 힘차게 문에 노크했다. 방 안에서 잠긴 목소리가 대답했다.
"들어오게."
휴게실로 준비된 듯한 편안한 방 안에 차노트 공자와 많이 닮은 중년이 앉아있었다. 클로비스 하틴 차노트. 제국의 북방을 지키는 첫번째 기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숨이 찰 정도로 무섭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를 쳐다봤다. 그 정도로 날 경계하는 사람들은 수도없이 많았으니까. 이정도는 괜찮다. 별 것 아니다. 그렇게 되뇌일수록 마음이 차분해졌다.
"영애가 나와 만나고 싶다 했다지?"
"네. 제가 차노트 공자께 부탁드렸습니다."
"그래. 용건이 무언가?"
"저를 도와주세요. 대신 차노트를 지켜드리겠습니다."
내 황당한 말에 대공은 웃지 않았다.
"영애가? 리클렌이 차노트를?"
"눈치채셔서 만나주시는 것 아나신가요?"
어디 떠보려고 들어? 내가 당신 나이까지는 못 살아봤어도, 그 배는 살았어. 웃음기를 지웠다.
"누가 보냈나."
"정계에 너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제가 누군지 아시면서."
"황녀전하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찼다. 지금 피가 바짝바짝 마를테지.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영광스러운 황실의 일원은 둘째치고 목숨부터 걱정해야 할 거다. 그러게 왜 그랬어. 적당히 황제가 주선해주는 가문이랑 결혼하지 뭐 오래 살아보겠다고 난리를 피워서.
"어찌 하면 좋겠나."
"수도에 머무세요.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실겁니다."
"황녀께서..."
"걱정마세요. 아는 사람은 전하 한분 뿐이십니다. 폐하께서도 모르고계세요."
"그러다 영애가 큰 일을 당할 수도 있네."
"괜찮아요. 전하께서 시키신 일이니까. 부지런한 손발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요."
큰일이다. 이제 곧 마이어 부흥파가 들고 일어날텐데,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네. 그래도 처가여서 다행이다. 지금껏 영지에 박혀서 외부에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차근차근 알리바이를 만들어가야지.
"우선은 연회장에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춰주세요. 오늘은 황녀 전하께서 오래 머무실 예정이라 하시니 가서 황가를 지지한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세요."
"영애. 모두가 당신처럼 순수하게 생각한다면 좋을텐데 말이야."
"걱정 마세요. 황제파의 총수인 리클렌이예요. 힘없는 영애라고 무시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눌러드리죠."
힘없는 이라고 말 할때 당신 웃으려고 한거 다 봤다. 이럴수가. 그 촌구석까지 내가 구제불능 천둥벌거숭이였던 게 소문이 났었나.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거기에 드나드는 가문은 소트와 피뇨르 말고는 거의 없을텐데. 줄리에타가 내 발등을 찍을리는 없고, 소트인가.빌어벅을 놈들
"정 걱정되시면 오라버니들께 도움을 요청할까요?"
"아니. 사양하겠네."
고지식한 빈센트 티모시 공자께서 아시면 오히려 큰일나겠지. 걱정마세요. 내 부하들이 차근차근 아래부터 뒷공작을 할테니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받을테니 저는 일단 물러나겠습니다. 다음번에 줄리에타 편으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네."
공작이 먼저 자리를 떴다. 내가 들어온 문으로 공작이 나가고 이제 고민이 시작됐다. 켕기는 것들이 돈은 또 엄청 긁어모아댄다. 그래서 그 돈으로 찔리는 것들을 무마한다. 소트도, 오르타도 다 그렇다. 다행이다. 내가 돈이 없지는 않아서. 미리 한몫 당겨두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했어. 이제 또 당분간은 두통에 시달리면서 살얼음 위를 걸어야지. 빨리 금지마법 사건이 해결되면 좋겠다. 오라버니 목걸이를 좀 빌리고 싶네. 장갑 안에 낀 에스메랄다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런 마법이 걸려있지 않은 평범한 반지지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는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떻게 돌아가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까. 고민하며 내가 들어온 반대편의 문을 쳐다봤다. 한참 들어왔으니, 못해도 후원 근처로 나오겠지. 문을 열고 나가니 다시 복도가 있었다.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곳인지 촛불 하나 없다. 창가로 들어온 달빛에 의지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벽을 훑었다. 명화가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정말 의외의 그림이 붙어있었다. 아나이스 황후. 오래전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알려진, 또다른 삶의 어머니.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미움살 일을 한 적이 없던 황후. 에스메랄다로 살며 황후의 사후 이 초상화를 두번다시 보지 못해 온 성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는데, 이런 곳에 옮겨져 있었나. 이게 뭐라고. 겨우 커다란 종잇장인데 눈을 떼기 힘들었다. 가까스로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숙여 인사했다. 안녕. 마지막이예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넓은 연병장에 처음보는 사람이 혼자 서 있었다.
"누구..."
밤하늘을 빼닮은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방금 전까지 훈련중이었던 듯 숨을 몰아쉰다. 혹시 들켰나. 아니면 누군가의 세작이라고 생각하나. 필요 이상으로 뛰는 심장을 달래려 마음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이쪽은 기사단의 구역입니다. 오신길로 돌아가십시오."
"제, 가 길을 잘 모르겠어서요."
"모셔다드릴까요?"
"아... 네."
땀투성이인 손을 내밀다 화들짝 놀라며 손수건을 꺼내 그 위에 펼쳤다. 그리고 놀라지 않게 검을 멀리 치웠다. 그냥 안내만 해 줘도 괜찮은데... 얼떨결에 손을 잡고 기사단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잘 아시겠지요?"
보통 영애들이 여기서 기사들을 기다리곤 하니 넘겨짚나보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속상하지만 길을 알고 있기는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고개숙여 인사했다.
"그럼 이만..."
"잠깐만요!"
"네?"
"그, 오해하지 마시고... 오메르드 경을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알버트 경이요?"
"네."
기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을 열고 안쪽을 들여다봤다. 얼핏 알버트가 의자에 앉아서 누군가와 떠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쟤는 내가 좀 쉬랬더니 아주 편하게 놀고있네.
"알버트. 레이디께서 찾아요."
"레이디? 누구.... 아!"
그제야 헐레벌떡 뛰어나온다. 그 와중에 매무새는 가다듬어서 바로 돌아가도 문제는 없겠다.
"쉬고 계시라 했더니 놀고 계셨네요."
"죄송합니다. 선배님들이 붙잡아서..."
"괜찮아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전하께서 걱정하실테니 돌아가요.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
기사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그리고는 알버트가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간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사람인데,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네. 누구였더라. 아니 본 적 있던가? 잘 모르겠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길을 잘못 들어서."
"세상에..."
딱한 눈으로 쳐다보는 알버트의 손등을 때렸다.
"안내받아서 도착했는데 돌아가는 길은 안 알려주더라."
"그 사람들이 너무했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눈빛이 불순한 게 아닌 것 같지만. 이제 일이 어떻게 풀릴 지 가늠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까 그 기사 머리색도 이랬지.
"아까 그 기사, 누구야?"
"리스 경?"
"이름이 리스라는 거야, 성이 리스라는 거야?"
"이름. 리스 에들턴. 왜?"
에들턴? 귀족은 아닌가. 처음 들어보는 가문이다. 한때 소드마스터까지 가봤던 적 있는 내가 보기에도 지금 이 못난 알버트만큼 될 성 부른 떡잎이다. 처음 만나긴 했지만 인성도 나빠보이지는 않고.
"괜찮아 보이네. 못해도 소드마스터는 될 것 같아. 친하게 지내."
"정말? 진짜? 나는?"
"너도."
이번에도 죽지만 않는다면. 죽기 직전에 소드마스터가 됐으니까. 알버트를 보고 있자니 오늘따라 마음에 안 든다. 이제 진저랑 블론디는 그만 보고싶다. 리스 에들턴처럼 조금 차분한 색을 보고 싶다.
"절대로 죽지 말아야지. 꼭 소드마스터 되서 집안도 일으키고, 메리도 고생시키지 말아야지."
"그건 힘들 것 같은데."
"헉, 왜!"
글쎄. 네가 메리보다 유능할것 같지는 않다. 옆에서 방정떠는 알버트를 무시하고 연회장으로 이끌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갔을 때, 황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차노트 공작이 보였다. 시키는 대로 잘 하네. 역시 기사들한테는 단순하게 시켜야 하나. 모든 기사들이 피뇨르 남작 반만 따라가면 좋을텐데.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머, 리클렌 영애. 유행 따위는 지겹다시더니, 결국 따라하시네요?"
샬럿 노먼. 나는 네가 정말 싫다. 내 결심을 와르르 무너트리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귓가에 연신 진정하라고 조잘거리는 알버트를 밀어내고 똑바로 쳐다봤다. 샬럿이 기세에 밀려 움찔한다.
"영애는..."
"노먼 영애. 지금 입고 계신 드레스, 분명 지난해에 리클렌 영애가 입었던 드레스와 비슷하지 않나요? 하긴, 고트 영애도 영향을 받을 정도인데."
줄리에타, 네가 날 위해! 내 감동이 마를 새 없이 또 한마디를 쏘아댄다.
"역시 고트 영애는 어떤 드레스던지 잘 어울리세요. 저런 복고풍 디자인까지 훌륭하게 소화해낼 줄이야. 물론 저는 그때 리클렌 영애가 입었던 옷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피뇨르 영애. 저한테 정말... 관심이 많으셨네요."
"그럼요. 저는 영애의 옷장 속 모든 드레스를 알고 있을거예요."
그건 좀 무서운데. 내가 하고싶던 말은 아니지만 샬럿이 한마디도 못하게 쏘아붙여대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와중에 부들부들 떠는 샬럿은 내버려두고 줄리에타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간 앓으셨는데, 괜찮아지셨나요?"
"걱정해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리고 빅토리아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리클렌과 피뇨르 간에 서먹하지 말아요."
줄리에타는 대번에 벅차다 못해 울 것 같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손을 잡고 살짝 토닥였다.
"피뇨르 남작께서도 저를 딸처럼 대하시는걸요."
"그, 그럼 영애도 줄리에타라고 불러주세요."
"그럼요."
도저히 표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부채를 쫙 펴서 얼굴을 가리고는 두어걸음 물러섰다. 내가 제 약혼자를 울리는 줄 알고 저쪽에서 기다리던 차노트 공자가 쫓아온다.
"영애. 누가 보면 내가 영애한테 화내는 줄 알겠어요."
"알, 알겠어요! 안 울게요!"
"줄리에타. 무슨 일이예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리고 당신은 기가막힌 타이밍에 오지 마. 어지럽다, 어지러워. 알버트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그냥, 너무 감동해서..."
"줄리에타. 조금 쉬는 게 좋겠어요."
루이스 차노트가 째려보는 것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아. 버티는 줄리에타를 끌고 테라스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까지도 샬럿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영애. 더 하실 말씀이라도?"
"그, 그럴 리가!"
"그럼 저는 이만. 아직 외가에 인사드리지 못해서요."
"그래. 아버님이 네가 언제 오는지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계신다. 같이 가자, 빅토리아."
아, 아드리앙. 왜 네가 여기에. 가문 대표로 참석했으니 어쩔수 없지만 적어도 너는 만나고싶지 않았어. 알버트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올려다봤다. 바라는 게 아주 많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가...요. 알버트."
말없이 따라가주는 네가 고맙다. 역시 너밖에 없나봐. 앞서가는 아드리앙을 따라간 곳에는 눈썹을 잔뜩 들어올리고 알버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외가 어른들이 모여계셨다. 아, 싫다. 밖에서 별 세면서 시간이나 때울걸.
"오랜만에 뵙습니다, 모문 후작님."
"섭섭하구나, 빅토리아. 전처럼 할아버지라고 부르거라."
"네, 외할아버님."
막 도망치려는 황자를 붙잡아 그 옆에 나를 앉혔다. 졸지에 파트너와 떨어진 알버트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버렸다.
"음! 잘 어울리는구나!"
"인사가 늦었습니다. 빅토리아 리클렌입니다, 황자 전하."
"아니네. 나도 그대가 온 줄 몰랐으니 괜찮아."
이래서 싫었다. 모문이 황제를 너무 사랑하는 건 알겠지만, 나까지 그쪽에 엮어주지 못해 안달이니까. 지금쯤 도망쳤어야 하는데. 황자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제 누이가 내 오라비를 좋아하는 티를 그렇게 내는데 하하호호 웃기는 그렇겠지.
"오라버니께서 신세를 지고있습니다."
"아니네. 티모시 경이 뛰어나니 당연히 등용해야지."
"며칠째 얼굴도 안 비추고 일만 해서 할 일도 제대로 못하는 줄 알았답니다."
좀 보내줘라. 웃으며 지긋이 쳐다보자 떨리는 눈동자로 슬쩍 시선을 피한다. 아직 소심한 성격이 도망가지는 않았구나. 서러운 표정을 은근히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모두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전하."
"그, 랬구나."
"예, 전하."
"일이 얼마나 바쁜걸까요? 편지 한 장도 못할 정도인지..."
황자의 안색이 창백해져갈 무렵 모문 후작이 내 입을 틀어막을 셈으로 폭탄을 던졌다.
"그래. 그나저나, 오메르드 공자는 아직도 가지 않고 무얼 하는게냐?"
"알버트 공자를 제가 모셔 왔으니, 갈 때도 함께 가야지요. 요새 프라우의 영애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가 좋은 분인지 모릅니다."
"오메르드가 말이냐?"
영 믿기지 않는다는 듯 턱을 쓰다듬는다. 네. 믿기지 않겠지만, 이 오메르드같지 않은 남자가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그렇게 좋댑니다. 저는 좀 차분한 사람이 좋은데 말이지요. 아드리앙 모문이 정색을 한다.
"그래봤자 잠깐이다. 너는 아직 약혼자도 없으니 처신을 똑바로 해야지."
그건 너나 잘 하지 그래. 황녀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면 나중에 아무도 결혼하자는 소리 안 한다.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알버트의 팔을 끌어안았다.
"내 친구가 그렇게 미우신가보지요? 모문 공자."
"그래. 외모 빼고 봐줄만 한 것도 없는 네가 오메르드와 붙어 지내니 고모님께서 걱정이 많으시겠구나."
"어머니 건강은 제가 알아서 챙길테니, 공자는 외숙부 건강이나 챙기시지요."
제임스 모문, 하워드 모문, 아드리앙 모문. 나이값도 못하고 황가에 매달리는 사람들과 얽혀서 좋을 것 없다. 저런 가문에서 어머니같은 정상인이 났다는 게 믿겨지지 않아. 오늘도 놀라움이 가득하다. 이 불쌍한 황자를 어떻게 구할까 고민하는데 알버트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에스메랄다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있었다.
"전하. 황녀께서 찾으시는 듯합니다."
"누님이?"
그제야 뒤를 돌아본다. 이 황자도 요령이 없었지.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넘쳐나서는 신나서 일어난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봐. 나는 누님께 가봐야겠네. 그간 제국의 수호에 힘썼으니 편히 즐기다 가시게."
"예, 전하."
분위기를 타고 슬쩍 일어나 황자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은근슬쩍 모문 일가에게도 인사하고 뒤로 빠졌다. 내가 외가를 이렇게 홀대한 것을 알면 어머니께서도 상처받으시겠지만 이해는 해주실거다. 아마. 어머니도 모문이 오메르드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정도 기피받는 것은 잘 아시니까.
"알버트."
"어, 네."
"오늘따라 날이 참 기네요. 내일도 업무가 있을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요."
에스메랄다가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도 안되는 건 안되는거다. 냉정하게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황녀의 탄신연회가 끝났다. 앞으로 6월의 건국제까지 커다란 공식행사가 없다. 그 이야기는 기사단 훈련 집중기간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성벽 아래 연병장의 병사들만큼 처절하게 연병장을 달렸다. 5등 안에 들지 못하면 죽는다. 꼴찌로 들어오면 두배로 죽는다.선두에서 달리다 심장이 터져 죽든, 순위 안에 못 들어서 달리다 달리다 탈진해 죽든 죽는 건 마찬가지니 기왕이면 덜 고통스럽게 죽겠어.
"으아아아아악!"
"저거, 애들 미친다. 적당히 돌려라."
"아니 무슨 기사 해먹겠다는 것들이 체력이 아가씨들만도 못해요? 영애들은 그 무거운 옷들을 겹겹이 입고도 연회 내내 표정하나 안 변하는데. 그냥 쟤네들이 글렀어."
아냐. 걔네 멀쩡한거 아니야! 얼굴에 덮은게 있어서 안보이는거야! 억울함이 북받쳐올라 힘이 솟는다. 결국 1등으로 도착해 그대로 엎어졌다. 아, 죽겠다. 심장은 둘째치고 폐가 터지겠다. 하늘이 노랗게 빙빙 도는 와중에 2등으로 도착한 놈이 내 옆에 벌러덩 드러누워 헥헥거린다. 아이고, 아버지. 저 곧 만나러갑니다. 힘들어 죽겠는 것보다 목말라 죽겠는 게 더 심하다. 굼벵이처럼 기듯 일어나 손을 휘저었다.
"물, 물..."
"저놈은 선배를 시켜먹으려 들어."
물을 달랬더니 물을 뿌려버리는 미친 선배들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든다. 벌떡 일어나보니 먼지를 뒤집어써 새치가 잔뜩 생겨버린 에들턴이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세워달라고? 이 양심없는 사람. 나도 내 몸이 무겁다! 나도 물 한바가지 퍼다가 부어주고싶었지만 머리속에 빅토리아의 말이 스쳐지나간다.
'친하게 지내...'
친하게 지내... 친하게 지내... 머리속에서 울려퍼지는 메아리가 그랬다가는 네 목숨이 끝장난다고 속삭인다. 팔을 걷어차고 물을 부은 나를 눌러앉히고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
달라붙은 모래를 털어내고 구석의 수도가로 향했다. 죽겠는 건 죽겠는거고, 땀냄새 나서 미치겠다. 나는 5위 안에 들었으니 이제 개인훈련 해도 괜찮으니까. 펌프를 눌러 물을 틀어놓고 그 아레 서서 5등 안에 못 들은 안타까운 동기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다시 끝없는 무한경쟁 레이스에 들어갔다. 아, 프란님. 저 어린양들을 구원하소서.
씻고 나니 에들턴이 수건을 내민다. 머리에 덮어쓰고 그늘을 찾아 선배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이 징그러운놈들. 한번정도는 낙오도 하고 그래라. 동기들 불쌍하지도 않냐?"
"동정으로 일부러 져주면 제 몸이 괴롭습니다."
"져주면 동기들이 좋아할까요? 저는 최선을 다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에들턴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얘는... 이 사람은 얼마나 정직한걸까. 탄신연회때 비번인데 그 시간까지 훈련한 걸 생각하면 정말 말도 못하게 고지식하고 원칙주의자인 모양이야. 선배님들이 에들턴의 얼굴을 보고 기겁을 해댄다.
"야. 너 평민이 그런얘기 하면 저기 있는 귀족들 난리나. 지금 우리 기수 귀족님들 안 나오셔서 다행인 줄 알아라."
"저도 귀족인데요."
"네가 무슨... 아 오메르드도 자작가였지."
"아, 진짜 선배!"
내 짜증에도 꿈쩍않던 선배님은 저 멀리서 걸어오는 세 유력가문 공자들을 보고는 자세까지 고쳤다. 진짜 드러워서 내가 출세한다.
"알버트 오메르드. 리스 에들턴. 레오 디쳇. 제이슨 고트. 칼 피뇨르. 이기적인 후배님들은 이제 저 불쌍한 자들을 위해 연병장 대열에서는 빠지겠습니다. 대신 입단 전까지 하던 수련은 깔끔하게 잊고 105기의 시범을 지켜보며 따라하도록 합니다."
동기들은 불안해했지만 나는 단장님 사무실에서 시중들면서 본게 있어서 마음편히 체념했다. 내일은 꼭 편안한 옷이랑 편안한 신발 챙겨와야지.
"그럼 오늘은 퇴청해도 됩니까?"
"그래. 내일 제2연병장으로 시간 맞춰 오도록."
"네. 가보겠습니다."
연병장 가로 돌아가 기사단 건물을 한번 올려다봤다. 오늘도 단장님은 궐련을 태우고 계신다. 꾸벅 인사드리고 돌아가려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나는 사무능력이 좋지만 직급이 딸려서 오늘도 일찍 퇴근을 하지. 역시 최대한 승진은 미뤄야겠다. 얼른 마굿간에 들러서 말을 찾아 떠나려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불쌍한 동기들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서운 목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친하게 지내...''
끈질기게 메아리치는 목소리에게 결국 항복했다. 말을 세워놓고 건물로 들어가는 동기들을 붙잡아세웠다.'
"잠깐만! 할 말이 있어요."
"무슨일이세요?"
대답없이 고개만 돌리는 도련님들 사이에서 에들턴만 대답한다. 이래서 귀족들이 문제다.
"내일은 아마 대련이나 비슷한 수준의 무식한 훈련을 할지도 모르니 편안한 옷을 준비해오시는 게 좋을겁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헉. 덜 말라서 촉촉한 검은 머리카락에 빛이 반사되서 파란 눈동자가 더 반짝인다. 갑자기 그런 공격 하기 없기다 당신. 속으로 심장을 붙잡고 쓰러졌다. 여기 있는 인간들 중에서 내가 제일 못생겼어. 얼른 도망쳐야지. 집안에 하나뿐인 소중한 말님의 허리를 걷어차고 얼른 성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으니 잠깐 들러야겠다. 지금까지의 상황 보고도 해야하니까. 평소 가는 길과 달리 고삐를 당기지 않으니 알아서 리클렌 가로 잘 간다. 으이구, 이녀석. 똑똑하기도 하지.
리클렌 가는 뭐든 최고만 사용한다. 오랜만에 마시는 고급 차가 너무 낯설다. 그래. 나도 원래 이런 차를 마시던 사람이지. 마음의 눈물을 흘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가볍게 사뿐한 느낌이니 아마 빅토리아겠지. 시중을 들던 시녀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응접실에서 눈을 마주치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니? 사레들릴 뻔 했다. 콜록거리는데 태연하게 맞은편에 앉는다.
"... 누가 들으면 내가 꼭 사고쳤을 때만 널 찾아오는 줄 알겠다.
"대부분 그래서 찾아오긴 했지."
"아냐... 문병도 오고..."
"너 때문에 쓰러졌지."
부정할 수가 없다.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혹시나 잘못한 것이 있나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사고를 치고 싶어도 훈련하느라 지쳐서 그럴 시간도 없었어. 조용히 두손을 모으고 앉아있으니 빅토리아는 불안해하는 눈치다.
"숨기지 말고 빨리 말해."
"아냐. 그냥 얘기도 좀 하고, 요즘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고도 하려고."
"알버트..."
감동해서 제 앞에 있던 간식들을 내 앞으로 밀어준다. 밖에서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한참 나더니 문앞에서 멈췄다. 문을 빼꼼 열고 클라렌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가씨. 말씀하신 간식들이 준비되었습니다."
"응. 가지고 들어와."
쏙 들어와 발로 문을 툭 차 닫았다. 문 밖에서 다른 시녀가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당당하게 들어와 테이블에 티세트를 올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수고했으니까 먹어."
"네!"
본격적으로 차까지 한잔 따라준다. 솔직히 나는 그냥 들러리고, 너희 편해서 좋은거지? 그래. 너희도 숨 좀 돌려야지.
"그래서, 요새는 어떻게 지내는데?"
"본격적으로 훈련 시작했어. 네가 죽도록 노력하래서 1등했어."
"잘했어. 여기, 상."
입에 초콜렛이 들어왔다. 아, 달고 맛있다. 단장님 비서 할 때는 자주 먹었었는데... 아니지. 내가 그 지옥에 다시 들어갈 수는 없지.
"그리고 이제 윗 기수 선배들이랑 같이 정식 훈련을 하는 것 같아. 우선은 나 포함 다섯이야."
"다섯? 누구야?"
"디쳇 후작 레오 경, 제이슨 고트, 칼 피뇨르. 그리고 리스 에들턴."
"쟁쟁하네. 너랑 에들턴 빼고."
"응. 그렇... 뭐?"
비겁하다. 물어보려니까 입에 초콜렛을 넣네. 아, 근데 진짜 맛있다. 먹을거로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다니. 음식은 죄가 없으니까 참는다.
"친하게 지내. 그 사람들이 네 목숨줄이다, 하고 어떻게든 들러붙어."
"안그래도 오늘 점수 좀 따고 왔어."
"아이 착하다."
뿌듯한 얼굴로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면서 앞에 스콘까지 놓아준다. 먹을거 고마워. 근데 대접이 왜이래 이거. 꼭 어릴 때 처음 메리한테 장난감 양보했을 때 칭찬받던 기분이네.
"나 네 동생 아니다."
"그래도. 언제 철 드나 했더니, 이제 들었네. 그런데 에들턴 까지 통과할 줄은 몰랐어."
"2등이였어. 평민 탈출하려고 정말 열심히 하는 것 같더라."
"음... 에들턴. 에들턴... 아 기억났다."
얼굴을 찌푸리곤 팔걸이를 두드린다. 뭐가 그렇게 거슬리길래. 클라렌스는 빅토리아의 찻잔의 식은 차를 따라내고 새 차를 부었다.
"누군지 아시겠어요?"
"당연하지. 알벼트. 그 사람 절대로 탈락 안 하게 잘 데리고다녀. 낙오하면 그대로 때려치고 파트론으로 떠날거야. 그리고 거기서 기사단장까지 올라가."
"파트론이면 우리 일에 방해는 안 되지 않아?"
"매우 방해가 된단다. 무조건 잘 해줘. 절대로."
"응. 뭐... 평민이라 그런지 조금 눈치가 없긴 한데, 잘 돌보면 될 것 같기도 하고."
"네가 할 말은 아니다."
빅토리아가 영 못마땅한 눈으로 또 쳐다본다. 왜 얘는 나랑 메리를 저렇게 쳐다보지? 정말. 오메르드도 할 때는 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내가 전생에 메리로 살 적에 얼마나 훌륭한 마법사였는데. 황녀 전하가 잘 싸운다고 포상까지 약속했었다. 결국 죽었지만.
"제발 잘 해줘. 디쳇 후작이랑 같이 잘 봐주라고."
"응.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다 이유가 있겠지."
"그래, 그거야. 너는 메리랑 다르게 잘 납득해서 좋다."
"우리 애가 의심이 많아서 미안해. 그런데 마법사라는 사람들은 다들 그래."
"우리 오라버니는 안그래."
그건 너라서 그래. 나한테는 그렇게 매서울수가 없다. 우울해. 너무 우울해. 내 추억속의 아름다운 티모시 리클렌과의 추억이 매일매일 하나씩 흩어진다. 이제 아름다운 추억도 몇개 안 남았다.
"메리는 어떻게 지낸대?"
"몰라. 걔는 소식 없는게 도와주는거니까."
"그렇긴 한데, 나한테까지 아무 말도 없으니까 섭섭하네."
"걱정마. 메리는 유능한 아이여서 진작에 마법같은 건 다 떼고 지금 놀고 있을거야."
"그런가?"
내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었나. 마법 한정으로는 노력도 하고, 재능도 있긴 했던 것 같다.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럼 문제는 재능도 그닥이고, 노력만 하는 나인가.
"문제는 나지. 아, 머리야. 이제 에스메랄다한테 디쳇 후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해야겠네. 역시 황녀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니까 반응이 달라."
"응. 디쳇 후작은 반란 전까지 죽은듯이 영지에 있었는데 말이야."
"좋은 일로 만들어야지. 적어도 올해 황제폐하의 탄신연회 전까지 에스메랄다의 입지를 다져야해."
"나는 잘 모르겠어. 시키는 대로 잘 할테니까 열심히 해."
"그래.기왕이면 네 편도 좀 많이 만들고. 반란당시에 반란군들이 이쪽 사정을 잘 알던 걸 보면 기사단에 작손의 끄나풀이 있어. 찾아봐."
헉. 갑자기 팔굽혀펴기 10번 합시다에서 운동장 10바퀴 돌기로 난이도가 올라가는게 어디있어. 당황스럽네. 그렇다고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하다, 난감해. 그런데 내 기억으론 디쳇이 끄나풀 눈치채는데 일가견이 있었지. 나는 아무리 봐도 도저히 모르겠으니까 진짜 열심히 친해져야겠다.
그리고 내 일신의 평안함을 위해 칼 피뇨르와도 친해지자.
"에들턴 한테 잘 해줘. 정말 그 사람 크게 될 거거든."
"얼마나 크게 되길래?"
"파트론으로 떠나면 제국 황제까지 오를거야."
헉. 황제. 그정도야? 에스메랄다는? 우리 목숨은?
"떨지 마. 귀족들이 평민이라고 훈련도 제대로 참가 안 시키고 따돌려서 떠난거니까. 하나라도 붙어있으면 몰래 떠날 일도 없지."
말은 쉽지. 친해져야 하는 사람은 나인데. 나로 살아봤다고 너무 막 말하네. 평생 한마디 말 붙여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랑 친해져야 하다니. 그런데 그러면 제이슨 고트만 왕따되나? 나 고트를 왕따시킬 만큼 용기는 없는데. 아 진짜 큰일이다. 어떻게하지. 내가 네명이나 책임져야하나.
"제이슨 고트도 잘 봐줘. 그 사람 삐뚤어지면 작손이랑 손 잡을지도 모르니까."
"헉. 고트가 작손이랑. 너무 무섭다."
"생각만 해도 섬칫하니까 네가 열심히 해야해."
"응. 나 열심히 할게!"
"착하다."
빅토리아의 쓰다듬을 받으며 전투적으로 초콜릿을 먹었다. 동기 사랑, 목숨 사랑. 인생 3회차 경력으로 열심히 살아보자.
디쳇 후작이 하틴 기사단에 입단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내가 고급정보를 얄려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던 에스메랄다가 그제야 급히 그를 소환했다. 십 오년만에 하나 남은 외가 사람과 만나는 기분은 어떨까. 내가 에스메랄다였다면 어떤 기분일까. 너무 오래전이라 그런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유쾌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레오 디쳇. 황후의 사망소식으로 충격받은 선대 후작 부부가 앓다 사망한 뒤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던 그가 외부활동을 시작한 것은 분명히 에스메랄다의 책봉식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속의 그는 소극적인 루드비히를 싫어했다. 늘 당당하던 에스메랄다를 지지했지만, 황녀라는 이유로 대놓고 보일 수는 없었다. 그 시절에도 늘 황위를 이양받았으면 하던 사람이니 지금은 오죽할까. 아마 어떻게 해서든 에스메랄다의 힘이 되어주려 할 것이다. 몇 없던 혈육을 모두 잃고 충격받았던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은 에스메랄다 뿐이었으니까.
"빅토리아. 디쳇 후작께서 연회에 참석하시겠다는 답장을 보내셨단다."
"우리 가문 초대장을 골라주시다니, 영광이네요. 준비하는 우리는 힘들지만."
평소처럼 집사에게 맡기고 밀린 영지 업무나 하려던 어머니는 갑자기 일어나 진두지휘를 시작하셨다. 드레스를 맞추는 것도 잊고 열심이신 어머니를 위해 클라렌스를 보내 재단사를 닥달했다. 권력과 돈의 힘은 위대했고, 드레스는 무사히 내 손에 들어왔다.
"준비는 완벽한데, 그러면 뭐 해요. 주인이 없는 걸."
"그게 걱정이구나. 네 오라비들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아드리앙 오라버니라도 불러와야 할 것 같구나."
"안돼요. 차라리 제가 전하께 가서 제발 하루만 보내달라고 부탁드릴게요."
내 손을 꼭 잡고 간절하게 바라보셨다. 기필코 우리 집 남자들을 되찾아오리라. 굳은 결심을 하고 일어나려는데 서재 문이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빈센트!"
"오라버니!"
오빠! 어머니는 체통도 잊고 일어나 오라버니가 맞는지 확인까지 하셨다. 저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은 누가 뭐라해도 틀림없는 빈센트 오라버니다. 퇴청은 안 시켜도 잘 먹이고 재웠는지 야위지는 않았네.
"아버지와 형은 어쩌고?"
"형님은 잠시 길드에 들렀다 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집사와 이야기중이세요."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하루 앞으로 다가온 연회 걱정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시던 어머니가 쓰러지듯 다시 의자에 앉았다. 다행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또 큰일이다. 이번에는 남자들이 입을 옷이 없으니.
"어머니. 오라버니랑 아버지 맞춰놓은 옷이 있던가요?"
"맙소사! 샐리! 당장 재봉사에게 연락하거라!"
"네, 마님!"
서둘러 나가는 샐리를 멍하니 쳐다봤다. 큰일이네. 왜 하필 우리 가문 연회를 첫 연회로 정한건데. 아무래도 이건 에스메랄다가 꾸몄다. 이미 늦었으니 일단 부딪혀보자. 아니면 내가 에스메랄다와 친하다고 하니 그냥 골랐을지도 모르지. 쉬어야겠다며 나가는 빈센트 오라버니와 아버지께 간다는 어머니를 보내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 머리아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후작님께서는 분명히 요새 잘 나가는 황녀 지지세력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오시는 걸거라구요!"
"조용히 해..."
티모시 오라버니. 빨리 와요. 와서 내 고민을 들어줘. 아, 고민 해야 무슨 소용일까. 나가자. 나가서 놀자.
"클라렌스. 나갈 준비 좀 도와줘."
"어디 가시게요?"
"살롱에 가자. 아무 생각 않고 떠들고 싶어."
"네, 아가씨."
간단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때까지도 큰 오라버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길드에 가서 뭘 하고 있는거야? 설마 메리를 만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거면 오늘 안에 돌아오기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요새 메리는 자진해서 사형수들과 같이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안에 들어가있으면 바깥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으니까. 걔는 아직 마법에 미치지는 않았으니 하루에 한번씩 나오기는 하겠지만.
아. 마차 답답하다. 직접 말 타고 다니고 싶다. 위험하다고 절대로 허락 안 해주겠지. 클라렌스가 타는 거나 구경해야 한다는 게 너무 슬프다. 클라렌스더러 집에 돌아가면 승마나 하라고 부추기며 실랑이를 하는 사이 살롱에 도착했다. 살롱 '이른 새벽의 햇살'은 내 또래 귀족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만큼 머리아프게 생각할 일이 없어 편하다.
"어서오세요, 리클렌 영애. 짐은 제게 맡겨주세요."
"아냐. 내 하녀한테 들려보낼거야. 클라렌스. 오찬시간에 늦지 않게 데리러 와. 그 전에는 오라버니도 돌아오시겠지."
"네."
클라렌스는 같이 못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눈빛으로 인사하고 사라졌다. 쟤 정말 언제쯤 자기 직업에 익숙해질까. 이래서 평민들이란. 아니지. 이러면 안 되지. 평민은 죄가 없다. 이게 다 돈 바르는 것 좋아하는 귀족들 잘못이다.
"빅토리아!"
무섭다. 내가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고 한 이후로 가는 곳마다 줄리에타 피뇨르가 있다. 침착하자. 웃으며 인사하자 벅찬 얼굴로 나를 제 모임으로 이끈다. 내가 등장하자마자 영애들의 얼굴이 굳어버렸잖아. 미안해요 영애들.
"리클렌 영애가 살롱에 오신 건 처음이네요."
"저책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내일 연회 준비로 시끄럽기도 해서."
"내일이 연회였죠?"
줄리에타가 나 대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들은 참석하세요?"
"네. 방금 막 돌아오셔서 뵙고 왔어요."
내 말에 영애들의 눈이 뒤집혔다. 얼굴 색을 바꾸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돌변했다.
"빈센트 공자님 말고 티모시 공자님도 귀가하셨나요?"
"당연하죠. 아버님도 돌아오셨어요. 아버님 이름으로 연 파티인데, 가문 사람들이 없으면 곤란하니까요. 그런데 어찌 공자님들은 많이 안보이죠?"
원래 영애들 위주이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더 사람이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는데 영애들이 대답도 않고 불편한 기색이다. 조용히 주위를 둘러봐도 정말 남자라고는 약혼자와 같이 온 사람들 뿐이다.
"오늘 '그 레이디'가 왔으니까요."
그건 또 누구지요. 초심자를 조금 배려해주었으면 하는데. 줄리에타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소곤거렸다.
"프라우 안의 살롱들을 순회하듯 돌아다니는 영애가 있어요. 어느 가문 사람인지 아무도 모르는 신비한 분인데,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날마다 골라서 대화하지요."
"아! 소문의 그..."
"네. 그래서 다들 그 영애에게 도전하러 간거죠. 다른 영애들은 다 버려두고."
어린애들 사이에서 뭐 하겠다는건지. 속상해서 말도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무는 걸 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다 아프다. 줄리에타 피뇨르 이 약혼자밖에 모르는 사람은 신경도 안 쓰고 있지만. 줄리에타의 말동무들은 망아지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지 어떻게든 해주길 바라는 눈치고. 쉬러 왔더니 여기도 가시방석이다. 그래. 내가 해결해주마.
"어디에 있어요?"
"가보시게요?"
"궁금해서요. 얼마나 아름답기에 전부 홀려있는지."
"저쪽. 상아로 장식되어 있는 문 너머에요."
내가 일어나도 영애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이해는 한다. 저 안에 당신들의 적이 있으니. 그런데 용사가 적진에 가는 길에 응원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꿋꿋하게 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수의 또래 영식들이 테이블 하나를 비워둔 채 주위에 늘어서 있었다. 그 테이블에는 탐스러운 금발을 늘어뜨린 영애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때 이 연회, 저 파티 할 것 없이 얼굴을 들이밀고 다녔던 나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귀족 동지들 덕에 절절한 배신감이 사무친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애가 있으면 당연히 소문좀 내고 그랬어야지. 에스메랄다가 좋다고 쫓아다니던 하워드 모문마저 있을 정도니 인기가 얼마나 좋은 지는 알겠다. 다만 그 출신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움이 걸렸겠지.
그리고 저 사람이 바로 내가 찾던 프라우의 꽃이라는 걸 알겠다. 감히 귀족사회에서 입에 올릴 수 없는 그 칭호를 받아간 여자다. 그 여자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꽃을 바라보았다. 감히 그 유명한 리클렌의 망나니 빅토리아 리클렌을 무시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정말 처음 뵙네요. 리클렌 영애."
생긴 것 만큼이나 목소리도 곱다. 프라우의 꽃이 대답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창피한 귀족 동지들이 웅성거린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제 친구들이 당신 때문에 슬퍼하고 있어요. 관심을 끄는 행동은 자제헤주세요."
"관심, 이라. 제가 관심을 끌고 싶었던 건 당신같은 분이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없이 앞서 나가는 그를 따라갔다. 갑자기 나온 그를 보고 영애들이 다들 의아해하다 내가 따라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란다. 특히 줄리에타가 얼마나 놀랐는지 채신머리 없게 입까지 벌리고 있다. 웃으며 부채로 입을 가리자 그제야 입을 다문다. 뭐. 별 일 없을거다. 그렇게 작은 티룸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 귀여운 시종이 전해준 편지는 잘 받았어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오티."
프라우의 꽃. 정체불명의 여자.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대화상대를 고르는 완벽한 예절을 구사하는 여자. 먼저 앉아 자연스럽게 스스로 차를 우려냈다.
"그런 깜찍한 편지도 보낼 줄 알았나 했더니, 이제는 배우보다 더 능숙하게 연기하네요."
"귀족으로 태어나서 이정도는 기본이지. 그간 내가 너무 격식이 없었던 것이니 개의치 말아."
"그랬지. 자유를 대가로 방종한 삶을 살아 언제 스러질 지 모르는 등불 앞의 짚인형이었어."
듣자듣자 하니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네. 그렇다고 저 버릇을 고쳐보자니 저것도 꽃이라고 좋아하는 고위 귀족들이 너무 많다. 바보같은 인간들. 오티는 백합도 장미도 아니다. 그녀는 디기틸리스다. 자신을 위해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에게 거짓 환상을 보여줘 나락으로 이끌것이다.
"듣기 싫다. 할 말 있으면 빨리 끝내."
"인형들을 찾고있다지?"
대체 어느 입 가벼운 귀족이 재잘거렸을까. 이렇게 늦게 소란을 피운 걸 보니 알게 된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용의자가 대충 좁혀지지. 기밀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면서 어느정도 지위는 있는 자들 중 하나일테다. 그중에서도 작위도 높고, 어디 자리 하나 꿰 찬 사람이겠지.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는 몰라도..."
"진짜 인형을 가지고 다니는 마법사의 다음 행선지를 알고있다면?"
당장 머리에 꽂고 있던 장식을 뽑아 내려놓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않는다. 그렇다면. 목걸이를 풀어 내려놓았다. 빙긋 웃기만 한다. 아주 내 밑천을 제대로 털어먹으려고 드네. 하는수없이 귀걸이와 브로치까지 떼어냈다. 난 이제 전쟁터에서 갑옷 뺐긴 모양새가 되버렸는데 좋다고 집어든다.
"계절도 모르고 활짝 핀 튤립을 따라가요. 그 끝에 보일거야."
"겨우 그 한마디 듣자고 다 내줬다니..."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고급 정보야. 이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해."
"헛소리."
더 같이 있다간 드레스까지 뺏기고 빈털터리로 돌아가게 생겼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려는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찾지 마. 내가 필요해지면 언제든 찾아올테니."
"그럴 일 없으니까 바짝 엎드리고 지내는 편이 좋을거야. 그리고 그 짧은 말도 고치도록 해."
안 그러면 내가 그 혀를 잘라버릴테니까. 여자로 태어나 프라우의 꽃과 엮이게 될 줄은 몰랐다. 제발 이 소식이 오라버니들 귀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할 텐데. 황성에 갖혀 지낸다는 게 이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다. 저 혼자 즐거워 웃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오니 모두가 나를 주목한다. 소문대로 이야기가 끝나고 금붙이들을 모두 내주고 나왔는지 확인하는거겠지. 줄리에타만 사색이 되어 쫓아왔다.
"빅토리아!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예요?"
"별 것 아니예요. 불쌍하게 살기에 보태라고 나눠줬어요."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그간 혼자 쌓아온 우정이 갑자기 터져나와서 벅찬 건 잘 알겠는데, 혼자서 우애넘쳐서 나한테까지 강요하지는 말아주었으면 하는데. 대답하지 않고 문 앞에서 대기중이던 클라렌스에게 손짓했다. 아무생각 없이 나를 쳐다보다 창백해져 쪼르르 달려온다.
"아가씨!"
"괜찮아. 도둑맞은 것 아니야."
"그래도..."
"기분 전환은 충분했으니 돌아가자."
"네..."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만. 이 귀찮은 연기를 그만두는 날에 저 건방진 콧대에 언젠가 주먹을 날려줄거야. 내 결심이 무색하게도 살롱에서 달려나온 시종이 편지를 건넸다.
"그분께서 전해드리라셨습니다."
"오티가?"
하라는 대답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버린다. 지금 날 무시하는건가.
"거기 당신! 아가씨가 질문했잖아요!"
"편지에 궁금한 것이 다 적혀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냥 보내. 예의상 물어본거야."
"하지만..."
그냥 좀 가자. 입을 다물어버리니 마차 문을 연다. 올라타자마자 벽에 기댔다. 다시는. 절대로 만나지 말자. 더러운 인간 같으니. 살롱에 처음 간다고 나름 아끼던 장신구를 하고 왔는데 그대로 다 털려버렸다. 스트레스 받네. 아. 건강해져야 가족들 눈치 안 보고 돌아다닐 수 있는데. 한참 저택을 향해 달리다 마부쪽 창을 열어젖혔다.
"상점가로 가자. 이 꼴로 집에 돌아갔다가는 파티가 시작되기도 전에 어머니가 쓰러지시겠어."
오랜만에 돈 좀 쓰고 돌아다니면 안심하시겠지. 아. 다시는 살롱따위 가나 봐라. 내가 돈이 없어, 신분이 미천해? 파티도 아닌데 차려입고 여자들 사이에 서서 선택을 기다릴 수준은 아니다. 그저 돌아다니다 얼굴 곱고 능력 좋은 사람 하나 낚아채 내 힘으로 작위라도 사주면 될 일이다. 그러니 다시는 살롱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말자. 내가 또 드나들면 황자랑 연회에서 춤을 춘다.
하틴 기사단이 제국 내 기사단 중 제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보통은 그게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훈련량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것은 106기 동지들도 마찬가지다. 기사단에 합격할 정도면 기본은 되어 있다는 이야기니 이제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구타인지, 대련인지 모를 훈련을 받고있자니 아주 죽을맛일 거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선배님들을 보고있자니 지난 내전이 떠올라 추억에 잠길 정도지만 동기들은 온몸을 목검으로 두들겨맞으며 바닥을 뒹군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마법사 주제에 최전방에서 주먹질도 하고...
"알버트 리클렌. 훈련이 쉽나?"
"아닙니다!"
"딴생각도 하고, 할 만 한가본데."
선배님들의 말에 동기들이 험악한 눈으로 노려본다. 아냐. 절대 아니야. 힘들어. 노골적으로 헉헉대며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그런데도 목검들이 죽어라 쫓아온다. 아닌 척 하자고 얻어맞아 멍 들기는 싫으니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피하다 벌떡 일어났다.
"할 수 있습니다!"
"이놈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막 기어오르네."
"아닙니다!"
그러지 마세요. 저는 연약한 신입이구요, 단장의 종자로 들어왔어요. 아직 보직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건가요. 저는 아직 명목상 기사도 아닌데요.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니 선배님들이 얼굴을 찌푸린다.
"잘 한대도 아니래."
"저... 차라리 단장님 보좌하러 갈게요. 그냥 보내주세요."
"선배님들을 젖히고 상급기사가 되겠다고?"
열심히 갈구던 105기 선배님들 뒤에 서계시던 100기 선배님들이 재미있어 죽겠다며 웃는다. 좀 웃지 말았으면... 그냥 때려치고 서부로 갈까... 서부 산악지대 수비대로 갈까...
"오메르드 경. 저쪽에서 단장님이 보고계세요."
에들턴, 고마워!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감동에 젖은 얼굴로 피뇨르 남작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정복 안주머니에 넣어둔 사직서가 보고싶다.
"오메르드 만큼 못 따라온다고 질투하거나 하지는 마라. 너희들도 잘 하고 있다. 저놈이 오메르드 인 걸 어쩌겠어. 출발선이 다른데. 사실상 너희들이 정기사가 될 유력후보들이다."
잠깐. 왜 너희들에 나는 빠져있지요? 손을 번쩍 들었지만 무시당했다.
"훈련 결과는 착실하게 기록되고 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짓만 하지 않는다면 당연하게 발탁되겠지. 원래대로라면 알려주면 안 되지만, 저 괴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말해주는거다."
"잠깐만요, 선배님. 알렉스 선배님. 저는 왜 승진대상이 아니지요? 그건 둘째치고 수습기사도 아니고 종자로 들어왔는데 내가 왜 같이 훈련을 하고 있는거지?"
선배님은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어째서일까. 왜지.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데 뒤에서 너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메르드. 여기서 뭐 하고 있나?"
"리클렌 공자님?"
"상급기사가 수련생들이랑 놀면 재미있나? 따라와."
잠깐만요. 내가 상급기사라니요. 저 분명히 종자로 들어왔는...데... 그러고보니... 내가 본 그 많은 서류들의 기밀등급이... 갑자기 뒷목이 막 당긴다. 내가 왜 상급기사로 들어왔나. 내 나이가 몇인데. 내 실력을 어떻게 믿고.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가며 동기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살려줘. 난 싫어! 아무도 잡는 시늉조차 않는구나.
"안녕 여러분. 나는 지옥으로 갑니다..."
"오메르드 경! 돌아와야 해요!"
에들턴만 그렇게 슬플 수가 없는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고마워 에들턴. 내가 돌아온다면 너는 꼭 챙겨줄게. 죽을 때까지 챙겨줄게. 그렇게 끌려간 곳에는 그렇게 보고싶던 사람이 서 있었다.
"메리!"
"알버트!"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갔다. 메리도 환하게 웃으면서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방금 전까지 훈련한 걸 보면 꿈은 아닌데.
"알버트. 꿈은 아닌데 실물도 아니야."
"뭐?"
"인형이야."
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야. 내팽개치고 뒤로 물러났다. 메리가 엄청 충격받은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벌떡 일어나 발길질을 해댄다. 아니, 하는 행동은 우리 메리가 맞는데.
"가족이 봐도 어색하지 않다면 모르는 사람은 정말 감쪽같이 속겠습니다."
"그래. 마법사들도 신경쓰지 않으면 별 것 아니라고 넘어갈 정도니까."
나를 둘러싸고 마법사들이 머리를 맞댄다. 이 미친 족속들이 대체 뭐라는거야. 그래서 저 메리가 진짜 메리라는 거야, 아니면 인형이라는거야? 머리 아파. 오메르드로 살면서 생각이란걸 너무 안 했나봐.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라는거야.
"바보야. 네 머리로는 고민해도 소용 없어."
"너 대체 누구야?"
"네 누나."
머리를 세게 후려치고 마법사들 무리로 쪼르르 달려갔다. 대체 뭐라는거야. 잘 기억도 안 나는 전생을 더듬어 마법사들의 대화를 열심히 훔쳐들었다. 빈센트 리클렌은 내가 미쳤나 싶은지 혀를 찼다. 안 미쳤어요. 나도 전생에 마법좀 썼다고.
"팔푼이가 노력 꽤나 했구나. 저주마법만 쏙 빼고 본질을 꿰뚫어보다니."
"아, 하하."
"그나저나, 저주마법으로 영혼을 복제해서 인형에 집어넣는다면 정말 큰 일이 일어나겠습니다."
"그래. 이번이야 별볼일 없는 마법사 나부랭이가 걸렸지만, 잘못해서 고위귀족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아주 큰일이 나겠어."
"나부랭이라뇨? 위대한 마법사 클로드 준의 제자인데."
"오냐."
"친구가 수도에 인형술사들이 횡횅한다고 하던데, 그게 다 저주인형은 아니겠지만 그중에 반만 되도 위험할거라구요. 대첵을 세워요 스승님."
"날 뭘로 보고. 네가 인형을 보낸 순간 딱 떠올랐다."
"오오, 역시 아르카나. 계획이 뭡니까?"
"크흠. 그건..."
아. 조금 더 들어야하는데 누가 나 건드렸냐. 고개를 팩 돌리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는데 내 눈앞에 보이는 건 피뇨르 남작님이다. 올리려던 손을 공손하게 내리고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훈련 할당량은 다 채운거지? 그럼 돌아가서..."
훈련 할당량? 전에 서류에서 본 적 있는데. 너무 오래되서 기억이 잘...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팽팽 돌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면 서류무덤에서 죽어야해. 차라리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훈련을 하고 말지. 기억해내라... 빅토리아 리클렌으로 살았던 인생에 빈센트 리클렌이 가끔 수도에 돌아왔던 기간을 기억해내! 그래! 빈센트 오라버니는! 아니지, 형님은! 1년에 두달씩 돌아와서 훈련을 받았다!
"아닙니다! 저 아직 한달밖에 못 채웠습니다! 아직 한달 더 훈련해야 합니다!"
"그런가... 자네가 그립구먼. 칼질만 잘 해서 승진한 놈들이라 영 시원찮아. 그냥 다음으로 미루면 안되나?"
나한테 매달리면 어쩌라구요. 까라면 까야하니까 그냥 미뤄야 하나... 에들턴이 꼭 돌아오라고 했는데. 평민이라고 왕따당하지 않게 내가 잘 돌봐줘야하는데. 나도 빅토리아처럼 확 쓰러져버릴까. 그랬다가 심신미약으로 해고당하면 어떻게하지?
"안 됩니다. 단장이 되셔서. 모범을 보이셔야죠."
빈센트 리클렌님 감사합니다. 저 살아남으면 꼭 동부로 갈게요.거기서 평생이라도 살게!
"알겠네, 알겠어."
"그럼 저는 마저 훈련하러..."
"잠깐만! 알버트!"
불러놓고 방치하더니 왜 이제와서 매달려. 내가 진짜 동생이니까 참지, 남이였으면 별써 돌아갔다.
"어머니께 연락 못해서 죄송하다고 전해줘. 요즘 수용소에서 지냈거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빅토리아한테 답장 일부러 안 한거 아니니까 제발 용서해달라고도... 전해줘..."
리클렌가의 두 남자를 보며 말꼬리를 흐리더니 갑자기 줄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며 들어올렸는데 평범한 인형처럼 돌아와있었다. 아 뭐야. 말좀 하고 마법을 풀던가 해라. 정말 심장 떨어지겠네.
"인형은 내가 보관한다. 제자놈이 가끔 이거로 연락할 것 같거든."
"네. 대신 각 학파장님들께도 말씀드려놓겠습니다."
"그러던지. 아, 마르셀 남작. 아무래도 귀족들을 이용해서..."
너무해 메리. 폭탄 던져놓고 도망치는 게 어디있어. 티모시 리클렌이랑 빈센트 리클렌을 내가 어떻게 감당하라고. 빈센트 리클렌이 한걸음 다가왔다. 죽을지도 몰라. 얼른 뒤돌아서서 꾸벅 인사하고 훈련장으로 도망쳤다. 둘째 리클렌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못들은 체 하고 도망치기로 했다. 저 둘이 들었으니까 나는 알려주러 안 가도 되지 않을까? 그랬다가는 직접 안 알려줬다고 더 난리나겠지. 싫다. 내가 메리 하고 싶다.
부리나케 뛰어가보니 선배님들과 동기들은 시원한 그늘에 앉아서 내가 오는걸 구경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자세를 바로잡는다. 뭐야. 내가 아무리 저기서 제일 등급이 높기는 해도 후배인데...
"선배님! 돌아왔습니다!"
"알버트 오메르드."
아 왜 여기까지 쫓아와요. 당신 동부 수비대로 빠졌잖아요. 하틴 기사단은 외부인 출입 금지 아니였나. 문지기는 뭐하고 있나. 침을 꿀꺽 삼키며 각오하고 몸을 돌렸다.
"네, 리클렌 경."
"오메르드가 왜 자꾸 내 동생한테 달라붙을까. 특히 네 누이. 메리 오메르드가."
시비도 한두번이여야 참지, 가문 때문에 자꾸 이러면 곤란하다는걸 왜 다들 모를까. 내가 오메르드 자작가 역사상 가장 인내심 깊은 후손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다. 벌써 마음속으로는 칼을 뽑아도 스무번은 더 뽑았다. 물론 뽑아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텐데. 빅토리아가 우리한테 자꾸 연락하는거라고. 오메르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애에게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말해요. 우리는 어차피 상관 없으니까. 아마 아쉬운 건 댁 동생이겠고요. 자꾸 한 말 또 하고, 또 하지 마요. 아시잖아요? 오메르드. 그럼 수고하고요."
다음에 한번만 더 그래봐라. 체면이고 뭐고 신경 안 쓰고 뒤엎어버린다. 쿵쿵거리며 그늘로 들어가 철푸덕 앉으니 모두 슬금슬금 피한다. 피하던가. 원래 드러워서 피하는 오메르드니까. 그와중에 분위기 파악이 좀 늦는 리스 에들턴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왜요. 에들턴 경."
"속여서 미안해요. 사실 경 빼고든 다들 알고있었어요."
"배신자들."
"미안해요. 선배님들이 시키셔서..."
"괜찮아요."
선배들이 까라는데 까야지. 버텼다가는 파트론으로 가버릴지도 모르잖아요. 잘 했네. 이렇게 보니 참 귀족이 아니라 그런지 가끔 규칙이나 관습에 헤매기는 하는데 참 착하고 순진하네. 원래 이바닥은 서로 속이고 속이는 세상인데. 그냥 두면 누구한테 속아 알거지로 쫓겨나게 생겼다.
"그럼 용서해주는거죠?"
헉. 지난 여성으로서의 삶이 내 영혼 지분 비율이 너무 커서 설렜다. 뭐 어때. 착하고 잘생겼고 능력좋고 내 이상형이네.
"당연하지요. 에들턴 경은 사과했잖아요."
사과 안한 너네들은 얄짤없다. 눈길도 안 주고 무시하니 헛기침만 열심히 한다. 그렇게 뻣뻣해서 곧 내전 터지면 목숨줄이나 잘 붙잡을지 모르겠네. 제이슨 고트는 몰라도 레오 디쳇이랑 칼 피뇨르는 무조건 살려야하는데. 디쳇 후작이 죽으면 빅토리아가 날 죽일거고, 칼 피뇨르가 죽으면 단장님이 날 죽일거다.
"상급 기사가 되면 밑에 부하를 들일 수 있다던데."
내 말에 칼 피뇨르가 벌떡 일어났다.
"미안했습니다 오메르드 경."
"아뇨. 경은 단장님 때문에라도 절대 말 못했을테니까요."
내 말에 다시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돌린다. 당신 아버지가 막나가는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나머지는 자존심이 있어서 사과는 못 할거다. 제이슨 고트는 나같은 거지한테 사과할 생각은 전혀 안할테고, 디쳇 후작은 나이 차도 심한데다 체면이 있지 아직 작위도 못 받은 나한테 사과 절대 안 할거다. 내가 작위를 받아버리면 메리의 입지가 불안해져서 최대한 미루려고 하는데 이럴 때마다 정말 짜증난다.
"훈련 끝나면 정식 편성 해주시겠죠?"
"4월에 정기 개편이 있어요. 신입 기사들은 대부분 평가결과로 나눈다던데, 경은 직접 고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좋겠는데 말이죠. 기왕이면 편한 사람들이랑 같이 일하는게 좋으니까요."
리스 에들턴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저는 누구든 좋으니 평민이라고 따돌리지만 않았으면..."
아직 정식 기사가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평민이라고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실력도 사실상 1등에 가까우니 정식으로 채용된 후에 어떨 지는 눈치없는 그라도 빤히 보이는 모양이다. 불쌍한 리스 에들턴. 내가 만약에 저 사람의 인생을 살았다면 벌써 파트론으로 도망쳤다.
"에들턴 경. 앞으로는 편히 부르세요."
"네에? 네! 그럼 저도 편하게 불러주세요!"
귀엽다 정말로.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어. 검을 꾹 쥐고 가까스로 참아냈다. 휴. 정말 위험했다. 떼로 몰려오는 동기들이 보인다. 이제 끝없는 레이스가 끝난 모양이지. 당분간은 북적이겠다. 그러면 저기서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는 단장님의 시선도 좀 나아지겠지. 그만큼 레오 디쳇이 날 노골적으로 쳐다볼 것 같지만. 나한테 뭐 불만 있는건가.
"디쳇 경. 하실 말씀이라도?"
"아닙니다."
아닌것 같은데. 할 말 엄청 많은 것 같은데. 서둘러서 물어볼 필요는 없지. 아직 황가와 접촉도 하지 않았고, 내전도 터지지 않았으니.
"이제 당분간은 군중 속에서 전투하는 훈련을 할 것 같죠?"
"이 훈련에서 서로 호흡이 잘 맞는 사람끼리 편성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해요."
칼 피뇨르는 이름값 했다. 나름 훈련생이 알기 힘든 정보도 가지고 있고. 그런데 지금까지는 이런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입 딱 다물고 있었단말이지. 뭐 좋아. 지금부터라도 잘보이겠다는 것으로 알겠어. 은근슬쩍 옆에 붙어서 친한 척 해도 봐주지.
"그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랑 협공해봐야겠네요."
"안돼요! 가지마세요!"
"아니 그래도 피하면서 움직이다보면 어쩔수 없이 멀어지게 되는데..."
"제가 등 뒤 확실하게 지켜줄테니까 제발 가지 마세요..."
"그렇게까지 부탁한다면..."
네 말대로 할테니까 제발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줘. 죄책감이 마구마구 쌓이고 있다고요. 차마 외면할 수가 없다. 한다고. 할게요. 대답하고 나서야 빙긋 웃으면서 손을 내미는데 아주 악마다. 요물이 따로 없다.
"잘 부탁해요. 알버트 경."
"네... 리스 경."
벅찬 얼굴로 손을 열심히 흔들어댄다. 아 귀엽다. 가까스로 손을 떼냈다. 아. 당분간 손 씻지 말까. 그래. 씻지 말자. 라고 생각한 순간에 감히 어떤 망할 놈이 손을 잡았다.
"제이슨 고트입니다."
아... 진짜 빅토리아 부탁만 아니었으면 바로 손목을 날려버렸을텐데. 요새 네 누이가 빅토리아랑 사이가 좋으니까 그걸 봐서라도 참는다. 절대로 고트 공작가 자금력에 고개숙인 건 아니다. 절대로.
내전에서 살아남으려면 드림팀을 꾸려야한다. 내가 올 해 안에 간부급까지 올라갈 자신이 없으니 적어도 발목은 잡지 않을 사람들로 골라서 같은 조가 되어야지. 내가 종자인 줄 알았을 때는 단장님 옆에 딱 달라붙어있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상급기사라니 이거 영락없이 전장에서 굴러야 판이다. 메리도 없는 전쟁에 무슨 낙으로 칼을 휘두르나.
"대체 내 뭘 믿고 상급기사로 채용하셨는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말이죠."
"경이 오메르드여서 그런겁니다. 오메르드는 대대로 수련기사따위는 해본 적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어머니께서는 그런 건 잘 모르시니."
대체 우리 집안 뭐 하는 사람들이지. 운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고, 성격 이상한 것 말고 또 뭐 있다는 건가. 나보다 디쳇 후작이 우리 집안을 더 잘 아네. 모른다고 삶이 불편하지는 않겠지. 내가 저쪽에 매달리는 것 처럼 보이면 곤란하니까. 궁금해 죽을 것 같아도 참자. 정 못참겠으면 영지에 들러서 집사한테 물어봐야지.
"꾸물거리지 말고 대열 맞춰 서!"
만만한 에들턴 두고 왜 내 등을 걷어차지요? 진짜 어이가 없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다같이 햇볕 아래 나가 줄을 맞춰 섰다. 105기 선배님들은 공손한 얼굴로 100기 선배님들을 쳐다보셨다.
"올해도 쓸모없는 놈들이 많이도 합격했네. 여기서 최대한 걸러낼것이다. 자신없는 겁쟁이나 실력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면 자진사퇴하고 돌아가도록."
그렇게 협박한다고 누가 포기할까. 다들 작위 계승과는 멀리 떨어져서 이 길 말고는 답이 없는 사람들인데. 대선배님은 한숨을 푹푹 쉬면서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단상 뒤로 풀쩍 뛰어내려 사라졌다.
"그럼 얘들아. 막내들 교육좀 시켜라."
하늘같은 대선배님 가시는 길에 인사까지 올리고 선배님들은 목검을 하나씩 들고 우리 앞에 마주섰다. 그리고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멍하니 서있던 맨 앞줄 동기들이 무참히 두들겨맞는 광경을 보다 나도 검을 들었다. 저렇게 얻어맞지는 말아야지. 상급기사 체면이 있지.
"알버트 경. 제가 뒤는 확실하게 지켜드릴게요."
"리스 경만 믿을게요."
고개를 끄덕이더니 훈련할 때처럼 집중하는 눈빛으로 돌변했다. 앞서 뛰어나가서 머리를 감싸기 급급한 동기를 구해주며 검을 쳐낸다. 저기. 지켜준댔잖아요. 내가 지켜야하게 생겼다. 얼른 쫓아가서 에들턴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드림팀이고 뭐고 일단은 시험이나 열심히 치러야지.
"디쳇 후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라하라."
어마마마를 닮은 연한 갈색 머리칼이 바로 눈에 띤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장례식 때였으니 벌써 십 오년이나 지났다. 레오 디쳇은 그날 이후로 한번도 영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수도가 싫을 법도 했다. 고모였던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던 후작부부는 영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모든 친지가 비명횡사한 이 땅에 다시 돌아올줄이야. 적어도 내란이 일어난 후에야 올 줄 알았다.
"고개를 드세요."
하나 남은 내 사촌은 벅찬 눈빛을 숨기지도 않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게 뭘 기대하는지 너무 잘 알기에 민망할 정도다.
"오랜만입니다 디쳇 후작."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전하. 불충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아닙니다. 상심했을 그대를 보살피지 못한 황실의 책임도 있지요."
아바마마도, 나도 어마마마를 잃은 충격에 디쳇 가의 비극은 신경쓰지 못했다. 몇번이고 반복된 일이었지만 늘 감정을 추스리기 힘들었다. 기억속의 앳된 레오 디쳇은 여리고 상처투성이였지만 돌아온 그는 몰라보게 달랐다. 세월이 그를 이렇게 만들어줬겠지.
"아직도 기억합니다. 모후께서 그대를 귀히 여기셨지요.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과하지 않은 선에서 뭐든 들어줄테니."
"무엇이든이라면..."
"황위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무어라도 못 해드릴까요?"
그는 한 맺힌 듯 피를 토하는 것 처럼 말했다.
"황위에 올라주십시오. 그리고 꼭 황후 폐하의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겨우 그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만났습니까?"
당연한 이야기다. 나는 단 하나뿐인 알란타 제국의 후계자고, 반드시 황위에 오른다. 그리고 복수한다. 내 확신에 찬 대답에 그는 만족한 것 같다. 그의 목표는 그게 끝이 아닌 것 같지만.
"전하께서 가장 고귀한 자리에 오르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는 허수아비나 하라는 이야기를 고상하게 돌려서 말하는 건 아니다. 숙청을 제 손으로 하겠다는 이야기다. 외척으로서 해야하는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되고나면 디쳇은 영영 사라지겠지. 그렇게 두기에는 돌아가신 어마마마께 죄송하다. 일단은 내가 아무런 권력이 없으니 멋대로 생각하게 내버려둬야겠지만 조만간 바로잡아야한다. 어떻게 내 주위에 수족이 될 사람중에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들까.
"일단 그대는 자리부터 잡으세요. 그 상태로는 쓸 곳도 없습니다."
답답할 노릇이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알량한 작위 하나 믿고 이곳까지 걸어들어오다니. 돌아가는 길에 어디서 칼 맞고 죽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레오 디쳇이 나가고 한참동안 서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디쳇 후작 부부의 죽음은 과연 병사인가.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조사가 어려웠다.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마법사도 없던 황녀가 얼마나 할 수 있었을까. 귀에 흘러들어온 근거없는 소문들을 하나둘 모았을 뿐이다. 그들의 죽음이 황실 때문이 아니라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동생의 죽음이 슬프다 해도 그때문에 앓아누울 건장한 성인은 많지 않다.지금껏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있던 그가 눈치챘을까.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다.
이 용의주도한 반역도당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손발이 제 몸을 미끼로 던지는 것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는 것은 각오한 것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곧 리클렌 가의 파티 시간이다. 티모시 리클렌의 빈 자리가 오늘따라 더 크게 느껴진다.
"어서오세요, 후작."
"초대 감사합니다. 부인."
"아니예요. 우리 리클렌과 디쳇은 예로부터 돈독한 사이였답니다."
어머니. 처음 듣는 말입니다. 후작부인으로 산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셨다는 것은 잘 알겠어요. 디쳇 일가가 그렇게 된 건 안타깝지만 아들이 모자라서 영치에 박혀있다고 혀를 차던게 얼마 전인데 말이지요.
"클라렌스. 나는 절대로 저렇게는 못 할것 같아."
"아니요 아가씨. 아가씨는 마님 소생이 확실하셔서 분명 하실 수 있어요. 지금도 잘 하고 계세요."
"혼나."
나는 권력을 등에 업고 언제나 솔직한게 매력이라고 생각해. 영애들 사이로 들어가자니 나에게 과도한 관심을 주는 줄리에타가 무섭고, 그렇다고 혼자 있으려니 도끼눈을 하고 쳐다볼 어머니가 무섭다. 오라버니는 어디에 계시나. 얼른 춤이나 추고 몰래 숨어있고 싶은데. 내 나이도 나이인지라 또래들 사이에서 수다떠는 건 너무 지친다. 모처럼 편하게 있으려니 눈앞에 생각도 못한 사람이 서있다. 아니, 왜 눈앞에 옥사나가 있을까.
"안녕하세요. 그레트헨 백작님."
"아, 안녕. 네가 메리의 친구?"
"네. 빅토리아 리클렌입니다. 우리 메리가 마탑에 신세를 지고 있어요."
"신세는 무슨. 네 후원금 덕분에 길드도 조금은 숨통이 트였단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예요."
내가 통 크게 쓰긴 했지. 어지간히 먹였다가는 가서 배우라는 마법은 못 배우고 구박만 당할까봐 신경써서 먹였으니까. 돈 먹은 사람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뿌듯해져 절로 웃음꽃이 핀다. 아무리 귀족이라는 것들이 무늬만 귀족이라는 파트론이라지만 나름 백작인 사람이 무례할 정도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마주하지 못할 것도 없어 태연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아가씨. 재능이 있어보이는데 마법 배워볼래?"
그게 무슨 소리람. 내가 재능이 없는 건 태어난 순간부터 알고있었는데.
"오라버니께서는 백작님과 전혀 다르게 알고있었는데요."
"티모시가? 그럴리가 없는데."
지금까지 마법사로서 자질을 보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혹시 늦게 재능을 깨우치는 경우도 있는건가? 하지만 생각으로 끝내야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티모시 오라버니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옥사나님. 막내에게 괜한 바람을 불어넣지 마세요. 지금 모습만 봐서는 전혀 모르시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말괄량이였습니다. 안그래도 종횡무진하는데 날개까지 달아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흐응. 너와 둘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상상이 안 되는걸."
"이해하셨지요?"
어쩐지 조금 상처받는 기분이다. 말괄량이이기는 했지만 그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라버니는 샐리가 애써 꾸며준 머리를 쓰다듬고는 옥사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사라져버렸다. 오라버니도 참 윗사람들 때문에 많이 힘들구나.
"메리다... 우리 귀여운 막내가 길드에는 어쩐 일일까..."
"몰라... 니가 가서 물어봐. 나는... 논문을..."
"안돼... 내 인상이... 너무 험악해서..."
일단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면 그냥 직접 물어보는게 나을텐데 말이다.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내외하시는 수줍은 선배님들을 하나둘 수거해서 제자리에 앉혔다.
"죽기 싫어서 도망쳤어요. 스승님이 데려다주셨거든요."
"그 미친 영감탱이가?"
"네. 저주받아서."
내 이야기에 근처에 있던 시체들이 알아서 벌떡 일어나더니 제자리도 돌아갔다. 갑자기 주위가 너무 훤해져서 어이가 없다.
"저주받으신 분이 막 돌아다니면 어떻게 하니 빨리 돌아가."
"아니, 타인한테 영향을 주는 저주는 아니랬는데요."
"아... 그래."
"이 인간들이. 하나뿐인 심부름꾼이 저주에 당했다는데 위로는 못 할 망정."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일 못한다고 빵만 먹이라고 하면 잼도 구해서 넣어주고, 아침마다 놀라지 말라고 스프도 넣어주고... 은혜를 원수로 값네 정말. 어이없어서 쳐다보고 있으니 나랑 비슷한 시기에 길드에 들어온 크리스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그런데 무슨 저주?"
"몰라. 이상한 천쪼가리 주면서 목숨줄이니까 잘 챙기고 있으라고 하긴 했는데."
"혹시 마스터가 던져놓고 간 이거때문 아닐까?"
선배가 가리키는 걸 쳐다보려니 크리스가 화들짝 놀라 눈을 가린다.
"뭔 줄 알고 함부로 쳐다봐. 너 정말..."
아. 그렇지. 또 봤다간 정말로 영혼까지 빨려서 죽을지도. 천천히 뒤돌아서서 주머니에 잘 넣어둔 보자기를 꺼내 뒤집어썼다. 그랬더니 선배들이 조용해졌다. 느낌에 이쪽을 보는건 아닌 것 같으니 아무래도 내가 보면 안될 그걸 보고있는 것 같다.
"묘하다, 묘해. 저것은 우리가 쓸 마법진이 절대로 아니다."
"맞아. 옥사나 놈들이나 쓸 마법진이다. 우리처럼 크게 노는 사람들은 절대로 저런건 안 쓰지. 아니면 크로노스에서나 쓸지도 몰라."
다른 관점으로 들으니까 또 새롭네.
"땡. 베르너입니다."
"오냐오냐 하니까 선배들한테 사기도 치려고 그러냐."
"아닌데. 진짠데. 내가 금지마법 조사 위원회 담당자잖아요."
"그렇지. 그랬지... 정말 베르너냐?"
"네. 베르너 출신 마법사가 꾸며놓은 공방에서 발견한 거니까요."
내 말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그러더니 누군가 하나 용감하고 무식한 선배가, 내 짐작으로는 하루가 멀다하고 논문으로 영감님한테 매타작을 당하는 올리 선배가 벌떡 일어난 것 같다. 그리고 머지않아 쨍그랑 소리가 시원하게 울렸다.
"아이고, 이 미친놈아!"
"올리 이 새끼 내가 언젠가는 일 칠줄 알았다!"
아이고. 스승님. 올리 선배가 증거품 깼어요. 걱정할 새도 없이 갑자기 목이 졸렸다. 아무것도 없는데.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뒤집어쓰고 있던 천이 멀리 날아가있었다. 온 몸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옭아매 움직일 수도 없는데. 제발 누가 뒤좀 봐.이 미친 인간들아. 뒤에 사람 있다고.
"아무것도 없잖아. 괜히 깼네. 다시 붙이자."
"이 미친 놈아. 그게 확인하고 싶어서 깼냐?"
"넌 좀 맞아야 해. 아르카나님이 왜 쫓아다니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리와 이자식아."
"얼마나 놀랐으면 그 말 많은 애가 아무말도 없어. 오늘 잘 됐다. 그 미친 성격 고칠때까지 맞자!"
그 말을 하자마자 선배들이 흠칫 하더니 전부 고개를 돌린다. 인간들아. 보고만 있지 말고 좀 살려줘. 눈물이 차올라 점점 앞이 희미해져가는데 움직일 생각도 않고 뭐 하냐고. 그래. 내가 언제 남한테 목숨 구걸했냐. 내가 알아서 자주적으로 살아남겠다. 겨우 움직이는 손가락을 까딱여 바닥에 떨어져있는 보자기를 불러왔다. 깃털처럼 팔랑이며 날아와 내 머리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러자마자 언제 그랬냐는듯 옭아매던 기운이 사라지고 목도 풀렸다. 숨. 숨 쉬자. 금쪽만큼 귀한 공기. 열심히 숨을 쉬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붙잡는다.
"메리. 방금 뭐였어?"
"뭐, 이 배신자야. 동기 사랑이랄 때는 언제고. 꺼져."
쳐내고 마저 열심히 공기를 만끽하는데 선배들이 금방이라도 나한테 마법을 쓸 것 처럼 손을 꼭 쥐고 다가온다. 뭐야. 이거 무슨 상황이야.
"메리 오메르드. 방금 뭐였냐고 물었어."
"몰라요. 뒤돌아 서 있었는데 어떻게 알아. 선배들이야말로 뭐했는데요."
덮어쓰고 있던 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팔을 양쪽으로 벌리자 선배들이 공기에 밀려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부서진 인형이 있었다. 인형의 눈이 마지막까지 팽글거리다 나를 향했다. 오 이럴수가. 나 지금 또 저주받은건가. 그런것 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올리 선배. 저거 이번 사건 관련 현장에서 나온 증거."
"아니. 그거 말고. 너 뭐야."
"메리 오메르드. 아르카나 제자인데요. 선배들 밥 챙기는 노예."
"이름 말고. 대체 너 뭔데 그런 저주를 받고도 멀쩡해?"
무슨 저주인데. 영감탱이도 안 알려준 저주를 6개월차 신입이 어떻게 알아. 멀뚱히 서서 눈만 깜빡이고 있으려니 보자기가 흘러내린다. 다시 주섬주섬 뒤집어쓰고 인형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일단 저것 좀 치워주실래요. 조금 죽을 것 같아서."
선배님들이 손가락을 튕기자 바로 흔적도 안 남기고 사라졌다. 설마 없앤건 아니겠지. 저거 중요 증거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의자를 불러내더니 억지로 앉힌다. 그리고 손가락을 펴서 눈 앞에 흔든다.
"이거 몆 개?"
"장난하냐."
"정상인데. 그럼 혹시..."
그러더니 마력 감별할때나 쓰는 막대를 가져다 내 옆구리에 푹 찔렀다.
"아 왜 그러는데 진짜! 집단 폭력이냐? 나 황녀님한테 이른다? 응? 나 에스메랄다 님이랑 친하다!"
"정상인데..."
"왜지? 왜 영혼을 쥐어짤 기세로 뽑아당겼는데 멀쩡하지?"
선배들이 한데 모여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아 그래서 내가 무슨 짓을 당한건데. 왜 안 알려주는데. 아무리 선배 보기를 우습게 알아도 그쪽에다 난리를 칠 수는 없으니 크리스를 얌전히 노려보았다.
"뭔데. 왜 그러는데."
"어... 그러니까... 방금 인형에서 빠져나온 저주마법이 네 영혼을 뽑아내려고 했는데 실패한 것 같아..."
아... 영혼... 내 소중한 영혼 말이지. 가 아니잖아! 아 이런 올리 이 미친 인간아! 바로 주변에 굴러다니는 솜방망이를 집어들고 올리선배한테 뛰어들었다. 성질변형으로 낭창낭창하게 휘게 만들어 마구 휘둘렀다. 옆에 있는 선배들은 같이 맞으면서도 아픈줄도 모르고 끙끙거린다. 그러더니 내 멱살을 잡고는 흔들어댄다.
"아 왜! 왜? 왜! 왜 멀쩡하니? 왜 안죽었어? 말좀 해봐!"
"이 미친 놈들이 이제 막내보고 죽으래? 난 안죽어! 아직 못 죽어! 아아아아악!"
답답한 마음에 멱살을 붙잡은 마일스 선배를 냘려버리고 소리질렀더니 죄수들의 조망권을 위해 하나 남겨둔 창문이 깨졌다. 모두가 조용히 창문을 쳐다봤다.
"아... 마스터가 혼신을 다해 탈출방지 마법을 걸어둔 창문이..."
늘 반죽음 상태로 계시던 펠릭스 님의 말에 모두가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도둑처럼 창문을 뛰어넘어 자유를 만끽했다.
"오! 태양! 나의 자유!"
"오메르드! 오늘이 몇년 며칠이냐!"
"107년 1월 23일이요."
"벌써 해가 지나갔나... 오늘을 오메르드 해방일로 부르자!"
"야아아아!!!"
단순한 인간들... 힘들게 산다. 그나저나 내 영혼을 뽑아가려 했단 말이지.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해봐라. 내가 영혼을 뽑아서 물레방아로 찧어주마. 선배들과 간부들은 내 저주에 대해 까맣게 잊은 듯 펄쩍펄쩍 뛰며 짹짹이를 보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아무도 깨진 창문을 고칠 생각을 않네. 하긴 우리 학파는 창문이 깨지면 수리마법을 쓰느니 새 창문을 다는 사람들이다. 내가 부쉈으니 내가 직접 고치고 흘러내리는 보자기를 추슬러 망토처럼 묶었다. 그랬더니 선배들이 몰려와 나를 짊어지고 달린!!!다!!! 이 미친 인간들아!
"만세! 만세!"
"만세는 무슨 만세야, 미친 놈들아! 내려줘!"
"만세! 오메르드 만세!"
선배들이 힘을 모아 부양마법으로 나를 허공에 던졌다. 화살처럼 위로 쑥 솟구쳐 날아가는 새와 눈이 마주쳤다. 새가 깜짝 놀라 푸드덕거리다 떨어진다. 나도 떨어진다.
"나 아직 비행마법 못 해! 못 한다고!"
"만세!"
"야!!!!"
무섭다고! 하한번만 하라고! 몇번 하는건데! 위아래로 출렁이는 마나에 실려서 움직이다 보니 흐름이 느껴지고, 그 틈에 내 마나를 집어넣어서 움켜쥐니 내가 공중에 멈춰섰다. 아래를 쳐다보고 있으니 선배들이 만세 하고 또 외친다. 죽어라 인간들아.
"으아아아아!! 다 죽여버릴거야!! 블리자드!!!!"
"만세!!!! 에취!"
하루 종일 돌아다닐 때마다 찬사를 듣고 있자니 미칠 것 같다. 아니, 에스메랄다는 어떻게 이러고 살지? 어릴 때부터 듣고 살면 적응이 되나? 황제 일가들은 일상 생활이 가능한가? 정말 믿을 수가 없는 부류들이다. 간부님들이 찾아와 고맙다며 악수를 하고 글썽이는데 내가 다 미안하더라. 진작에 깨 줄걸. 근데 왜 그렇게 쉽게 깨졌지. 아무래도 스승이 멍청하게 파괴방지 마법을 안 걸어놨나보다. 일단 탈출 방지 마법은 복구해뒀으니 시간날때 들러서 파괴 방지 마법도 걸어둬야겠다.
나 아직 공격마법은 하나도 못 배웠는데 무슨 크로노스 마냥 잡기만 늘어간다. 내가 이러려고 아르카나에 들어왔나... 일단 스승이 가만히 있으랬는데 사고를 쳤으니 보고서를 소상히 적어 올려야겠다. 지하실에 인형이 수두룩했는데 누가 잘못 건드렸다가 저주마법에 당하면 죽을 지도 모르니까. 이런걸 짹짹이로 보내면 분명히 바쁜 와중에도 길드로 돌아와 응징하고 갈 테니 정성스럽게 글로 옮겼다. 전생에는 달필이었는데 왜 이번 생에는 글씨가 이렇게 못생겼는지. 대충 알아볼 수 있으면 됐지. 부엉부엉마법에 편지를 맡기고 보자기 망토 위에 망토를 덮었다.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지. 놓쳤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메리가 쓰러졌다. 태어나서 한번도 앓아본 적 없는 메리가. 차마 어머니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할 수가 없어 자청해서 당직도 서고, 야근도 했다. 잔업은 널렸고 아무도 하고싶어하지 않는 책상업무니까. 쓰러진 메리에 관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조치하라는 지시서를 펼쳐놓고 한참을 넋놓고 있었다.
"알버트. 괜찮나?"
"... 괜찮습니다."
"전혀 안 괜찮은 것 같네. 퇴근한 지 얼마나 되었나?"
눈을 피했다. 남작님. 기왕이면 다른 데서 눈치좀 키워주시면 안될까요. 대답을 미루고 있으니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는 먼저 가봐야겠네. 늦으면 줄리에타가 잔소리를 늘어놔서 말이지. 대부인께서 걱정하시지 않게."
"네. 먼저 들어가십쇼."
문이 닫히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서류를 쳐다보았다. 달력을 보니 벌써 그날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다. 그러고보니 내일이 황녀님의 책봉식이니 벌써 2월이다. 편지를 보내려 해도 시종이 없어 애만 태우고 계실 어머니. 혼자서 우릴 키우느라 고생하셨는데, 다 커서 이런 일로 슬프게 해 드릴 수는 없지. 서류를 쥐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정문 바로 앞에 붙어있는 게시판에 지시서를 붙여놓고 건물을 나섰다.
오랜만에 도착한 저택은 어머니께서 그간 받은 월급을 어찌나 살뜰하게 쓰셨는지 무너져가던 곳을 전부 수리해 어릴적 추억 속의 저택으로 돌아와있었다. 겨우 한 달이었는데. 감상에 젖어 서 있으니 집사가 반겨왔다.
"어서오십시오, 도련님.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네? 이 시간까지요?"
"아가씨께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 뒤로 한숨도 못 주무시고 계십니다."
"연락하지 그랬어요."
"마님께서 그러지 말라셨습니다."
급히 어머니 방으로 뛰어갔다. 문을 여니 난로가에 앉아 벽에 걸려있는 초상화를 보고 계셨다.
"왔구나."
"어머니."
바로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았다. 수척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원망이 아닌 걱정이 가득했다. 당연히 그랬을텐데. 왜 나는 부담스러워 했던걸까.
"죄송해요. 제가 메리를 지켰어야 했는데."
"아니다. 아니야. 건강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메리, 메리가..."
눈앞에서 쓰러지던 메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메리가, 내가 죽던 그날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내가 꼭 지켜주려고 했는데. 어머니 곁에 있으니까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아서 이를 악 물었다. 그랬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메리는 무사하단다. 클로드님이 위험해서 수도에는 올 수 없지만, 길드에서 요양해야 한다 말씀하셨단다. 걱정말고 푹 쉬렴, 알버트. 내 아들."
"집에도 못 오면 전혀 괜찮지 않은 거잖아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내가 대신..."
"알버트!"
어머니가 소리치며 어깨를 붙잡아 세우셨다.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메리가 그런 이야기 들으려고 널 지켜줬다고 생각하니?"
"하지만..."
"네가 저주받았다면 오히려 더 위험했을거라 그러셨다. 메리는 꼭 무사히 돌려보내겠다 하셨으니 제발 무리하지 말아라, 알버트."
메리는 무사할 수 있는건가? 나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되는거지?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검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주저앉아서 어머니에게 안겼다. 힘들다. 너무 힘들다.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느라 지쳤다. 메리의 확신에 가득찬 대답이 듣고싶었다. 우리는 무조건 살 수 있다고.
"전하. 오메르드입니다."
"들라."
책봉식 이후 황녀는 이전까지의 자신을 연기하던 것을 모두 벗어던졌다. 상의도 없이 멋대로 진행해버려 빅토리아가 또 쓰러질 뻔한 일이 있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힘없는 황녀에서 하틴 왕가의 힘을 물려받은, 진정한 후계로서의 자질을 제대로 드러내보인 에스메랄다는 이제 더이상 성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더는 직접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했을텐데."
"리클렌 영식의 부탁으로 방문했습니다."
케이스에 담겨있는 반지를 건넸다. 호위기사가 눈을 빛냈다. 유감입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건이라. 에스메랄다는 반지를 만져보곤 손에 끼웠다.
"요새 영식이 나를 피하는 듯해."
"전하께서 생신 선물로 범인의 목을 찾지 않으셨습니까. 이 넓은 프라우에서 어떻게 찾겠습니까? 당연히 일에만 몰두해야지요."
전혀 화나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해도 무섭지 않은걸. 황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인간.
"그렇지. 영식이 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
"예..."
"그럼 가보게. 참. 이제 당분간은 그대 같은 하급자가 취급할 수 있는 자료는 없을테니 본업에 집중하게."
"알겠습니다. 프라우의 치안을 위해 노력하겠나이다."
귀찮구나. 대충 손을 휘젓고 황녀는 다시 서류더미로 빠져들었다. 나도 집무실을 나왔다. 하, 무슨 황제가 사는 집에 이렇게 벌레가 많아. 그리고 황녀 집 벌레면 황녀한테만 관심주면 안될까. 정문을 나서자마자 날아오는 화살을 기둥 뒤에 숨어 막고 검을 뽑아들었다. 달려드는 암살자들의 손을 날려버렸다. 귀찮게들 군다. 소란에 경비병들이 뛰어와 암살자들에게 창을 찔러댄다. 아. 메리 보고싶다. 메리가 있었으면 마법으로 다 날려버렸을텐데. 지금은 나 혼자니까 어쩔 수 없지. 도망치려는 암살자를 붙잡아 대충 복면을 입에 물렸다.
"감히 황녀전하의 처소에 숨어든 놈들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심문해 정보를 알아내라."
"예, 기사님!"
아. 아직 기사 아닌데. 뭐 어때. 언젠가는 될텐데. 괜히 사람한테 칼을 휘둘러 기분이 나빠졌다. 나를 기다리던 마차에 흉수들을 태워 보내고 나는 기사단까지 뛰었다. 마침 순찰갔던 선배들이 돌아왔는지 말에서 내렸다.
"너는 아무리 종자라지만, 기사가 채신머리 없이 뛰어다니냐."
"기사 되면 말 타고 다닐게요."
"꼭 그래라. 하틴 기사단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별로 뛰지도 않았는데 땀이 축축하게 묻었다. 손을 내리니 빨간 피가 흥건하다. 아, 아까 튀었나. 아니면 나도 모르게 어디 다쳤나. 목을 더듬어보니 멀쩡하다. 선배들이 황당해하며 수도가로 걷어찼다. 아, 아프다. 유진 선배가 물을 한 통 퍼 머리에 부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왔길래 피를 뒤집어썼어."
"황녀전하 집무실에 다녀왔어요. 조용하길래 괜찮나 싶었더니, 나오는 길에 덮치더라구요."
"다친 곳은 없겠지. 오메르드니까."
"당연하죠."
오메르드가 겨우 그정도로 다치면 이름 값도 못 한다고 욕 먹는다. 수건을 뒤집어쓰고 연병장으로 가니, 선임기사 선배들이 슬픈 얼굴로 단장 집무실에 끌려가고 있었다.
"당분간 보직 해임이라서요. 저 뭐 하면 돼요?"
"훈련하고, 범인 신고 들어오면 쫓아가고, 순찰하고. 시키고 싶어도 너는 파트너도 없고, 담당 기사가 단장님이셔서 못 한다."
아, 단장님. 진짜 당신 도와주는거 하나도 없으시다. 우울하게 선배들 옆으로 가 검이나 휘두르다 집에 가는, 녹봉값 아까운 인생을 살아야겠지. 그러면 월급도 지금까지보다 적게 나올테고... 메리도 지금은 쉬는 중이니 다시 가세가 기우는구나. 오메르드 인생이 뭐 이렇지. 그럼 그간 선배 후배 동기들이랑 못 나눈 대화도 나누고, 인사도 좀 하고... 그러면 되겠지. 아무생각 없이 단장님 집무실 창문을 쳐다보니 엄청 아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계신다. 아. 다행이다. 아직 종자라서 다행이다. 절대로 당분간 종자로 살자.
"선배. 저 훈련 봐주세요!"
"입단하고 반년동안 책상에만 붙어서 훈련도 못 했지? 얼른 가자. 못 따라오면 쫓아낸다."
"네!"
"가지 마! 돌아와!"
단장님께서 애타게 부르셨지만 황명이 먼저니까. 마지막 가는 길 인사 올리고 선배들을 따라 뛰어갔다. 따라간 곳에는... 분명히 기사단에 입단해놓고 병사들처럼 무식한 훈련을 하고 있는 선배님들이었다. 지옥... 여긴 지옥이다... 하틴 기사단이 충원을 엄청 열심히 하는 이유를 알겠다. 세상에. 이럴수가. 선배님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 계신가요... 대체 왜 사람만 훈련하면 되지 왜 말이랑 같이 뛰는데! 왜 말보다 빠른데! 죽어 그러다 죽어!
"이게 뭐예요!"
"너는 저거 보지 마라. 저건 숙련자용 코스야. 우리 막내는 초보자용 코스로 가야지."
그곳에는 입단 후로 한번도 본 적 없는 동기님 후배님들이 있었다. 열심히 연병장 양쪽을 오가고 있다. 아. 지금이라도 에스메랄다한테 쳐들어가서 원위치 시켜달라고 하고 싶어졌다. 양팔이 붙잡힌 채로 가여운 동지들의 곁에 끌려가며 생각했다. 나도 얼른 사표내고 나가는 게 더 장수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여기서 비비고 있는게 장수할 수 있는가. 아무래도 아무런 뒷배경도 없는 것보다는 죽더라도 뭐가 있는 편이 다른 나한테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때려치고 나갔다가는 빅토리아한테 죽을때까지 구박받고, 그 형들한테 치이느니 차라리 몸이 고된게 나을 것 같아서 버티는게 아니다. 절대로.
다들 미안. 사실 내 잘못이야. 내가 오르타 공작을 좀 자극했거든. 별것도 아닌 거로 자랑한다고 했더니 발끈해서 가져온게 인형이네. 근데 나도 좀 많이 놀랐으니까 봐줘.
벌써 3월이다. 그 내가 사교계에서 잠시 발을 뺀지도 벌써 네달이나 지났다. 날도 풀렸고, 그간 내 또라이같던 행적도 어느정도 잊혔을거다. 에스메랄다의 책봉식까지도 무리해서 참가하지 않았으니, 탄신 연회라도 참가해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은혜도 모른다고 욕먹겠지. 요새 유행을 적당히 따르면서 편한 옷으로 골라입고, 진상품은 티모시 오라버니에게 맡겼다. 마리아 생일때는 안 도와줘도 잘 고르더니, 에스메랄다 선물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난감해하는 게 웃겼다. 안그래도 황녀가 그 귀한걸 선물해줬으니 난감할 만도 하지. 그나저나 아직 범인은 못 잡아서 오라버니들은 연회도 못 가고 마냥 철야다.
"어머니도 가실거죠?"
"얘도 참. 내가 가서 무얼하니? 그 시간에 이 밀린 영지 서류나 봐야겠다."
메리가 쓰러지고 나서 부터는 아버지도 끌려가서 그 나이에도 열심히 현장업무를 뛰시는 중이다. 그럼 내가 집안 대표로 참석해야하네. 갑자기 너무 부담스러운데. 나 남들처럼 얌전하게 연회 가는건 처음이라 옆에 누가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어머니도 안 가니 에스코트를 받아야 하는데 누구한테 부탁하지?
"참, 아가. 줄리에타한테서 편지가 왔단다."
"피뇨르 영애가요?"
뭐지. 나 걔한테 편지 보낸 적 한번도 없는데. 어쨌든 우리 알버트가 신세지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당분간은 좀 어울려볼까. 집사가 봉투를 개봉해 건넸다. 살짝 열어보니 여자 글씨 치고는 제법 힘있게 썼다.
"비키. 네 오라비들이 바빠서 참석하지 못하는데, 아드리앙에게 에스코트를 부탁할까?"
"아드리앙이요? 아마 벌써 에스코트할 레이디가 있을 걸요."
내가 아드리앙이랑 같이 들어가면 기껏 얌전해지기로 한 의미가 없어요 어머니. 난 그 인간 앞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그리고 그 곁에 있으면 내가 말라죽을거다.
"그리고 전 알버트랑 같이 가려구요."
"오메르드 공자?"
어머니. 방금 목소리 좀 떨린 것 같은데요. 읽던 서류도 내려놓고 다그치시면 좀 무서운데. 이럴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무구하게 대응하는 수밖에.
"네. 메리가 그렇게 되서 많이 힘들어하더라구요. 친구라고는 저 하나 뿐이니까 달래줘야죠."
"마리아와는 서운해졌니? 요새 오메르드와 친하게 지내는구나."
"유일하게 먼저 다가온 친구들이예요. 단 한번도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한 적 없어요."
보통은 저런 애들이 등처먹으려고 오긴 합니다만, 저는 제가 잘 하는거니까 괜찮아요. 아 그런데 괜히 말했다. 어머니 표정이 더 어두워지셨다. 괜찮아요. 괜찮아. 다 내 부하들이예요. 옆에서 눈치만 살살 보던 클라렌스가 기어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지금 당장 준비 시작하셔도 늦어요."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제가 황녀 전하한테 아버지라도 좀 퇴청시켜달라고 부탁해볼게요."
"아서라. 그러다 경을 친다."
"괜찮아요. 제가 황녀 전하의 하나뿐인 친구라서."
어머니는 그 말에 언제 우울했는지 모를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다. 눈빛에서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뚝뚝 떨어진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지요? 이렇게 되려고 여러번 죽었어요.
"오는 길에는 꼭 아버지 모셔올게요!"
"아직 범인이 안 잡혔다니 조심하고."
"네."
서재를 나오며 바로 편지를 열어보았다. 역시. 줄리에타랑 데먼한 척 하면서 깨는 다 볶고 있었구나. 루이스 차노트. 언제쯤 대공을 만나게 해주려는지 한참 기다렸어. 오늘 연회에서 안면몰수하고 몰아붙이려고 했는데 한발 빨랐네. 겉치레 인사글을 쓱 훑으며 마지막 문장을 보고 편지를 구겼다.
"샐리. 지난번 마리아 생일때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겠지?"
"당연하죠! 이번에는 클라렌스도 많이 늘었으니 더 아름답게 꾸밀 수 있어요!"
"그래. 난 오늘도 너희만 믿는다."
믿음이 너무 과했다. 완벽을 넘어섰다. 샐리는 대체 어디까지 발전하려는 걸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코르셋까지 입고 가는데 조금 봐주면 안됐던걸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겠는데 주렁주렁 달아 놓은 보석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치여 죽겠다. 안돼. 겨우 이런 거로 죽을 수는 없지. 여섯번 죽은 빅토리아들이 웃는다. 알버트는 자기 말도 없고, 그렇다고 마차를 빌릴 정도로 배짱이 크지도 않으니 아마 대충 걸어가려고 하겠지. 그 전에 분명히 기사단 정복을 입고 가려 할테니 붙잡아야한다. 근무일도 아닌데 직장에서 입는 옷 입고 직장에 가면 기분 이상할텐데 나도 참 이상한 사람이야.
"아... 가기 싫다. 안 가면 황녀님한테 죽겠지."
"알버트.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누누히 말 했는데도!"
"하지만요, 어머니..."
아. 그래. 오메르드가의 유일한 상식인이자 비 오메르드가 아직 살아계셨지. 어머니가 손좀 봐 주셨는지 옷도 제대로 입고 있다. 내가 보낸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을 입고 불편한지 자꾸 소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마차가 멈춰서자마자 클라렌스가 얼른 문을 열었다.
"알버트."
"비키?"
"아까워서 못 입을 줄 알았는데. 잘 어울린다."
조금 칭찬해줬다고 대번에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도 못 마주친다. 으이구. 저래서 어떻게 큰 일을 맡기나. 역시 대업은 메리한테 맡겨야 하는데. 기다려도 움직일 생각은 않고 있어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 받으러 왔어."
그 말에 부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알버트를 쏘아보곤 등을 밀었다.
"알버트. 레이디가 먼저 부탁할 때까지 뭐 하고 있니?"
"어, 그러니까... 리클렌 공자님들은?"
"우리 오빠들은 나처럼 한가하지 않아서. 그리고 아는 또래는 너 뿐이고."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빨리 안 잡아서 팔이 떨어지면 넌 죽는다. 그제야 달려와 얼른 마차에 올라타 손을 잡았다. 그래도 눈치가 늘기는 하는구나. 다행이다. 언제까지 저렇게 사나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사내아이같은 누이와 함께 자라 여성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 잘 모르는 아이입니다. 영애가 부디 이해해줘요."
"괜찮아요. 벌써 몇 번째 함께 가는걸요. 배웅 감사합니다, 부인."
클라렌스가 허리를 숙이며 얼른 문을 닫았다.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고 오메르드 저택에서 한참 멀어지고 난 뒤에야 팔뚝을 찰싹 때렸다.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거니?"
"음... 옛날에는 나였고 지금은 그 이후의 나?"
"겨우 그거 뿐이니."
"... 인생의 구원자?"
"그런 줄 알면 좀 알아서 도와주고 그래라. 어떻게 내가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 하니?"
어깨를 마구 때리며 잘 좀 하라고 계속 주입했다. 클라렌스가 옆에서 날 붙잡으며 말렸다.
"빅토리아! 보석 떨어져!"
"후우. 제발, 우리 잘 좀 살아보자 알버트."
"으, 응."
"네가 내 속 안 긁어도 오늘 많이 힘들단 말이야. 난 차노트 대공을 만나야 하니까, 너는 어디서 나랑 밀회라도 즐기는 척 하고 있어. 안 들키게 조심하고."
"야! 내가 왜 너랑!"
"나도 너랑 그러기 싫다. 근데 아드리앙 모문보다는 네가 낫지 않겠니..."
아드리앙은 절대로 안돼. 내 말에 알버트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더니 결의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나, 열심히 할게!"
"아냐. 적당히 해... 부탁이야."
실랑이를 하는 사이 벌써 황성이다. 마차가 가장 앞에 자리한, 개인 마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건물에 도착했다. 이제 말괄량이는 안녕이다. 가볍게 심호흡하며 알버트의 손을 잡았다.
"놀라지 마. 나 이제부터 제국 최고의 레이디가 될거니까."
"네가?"
알버트가 대놓고 비웃는 사이 바깥에 서 있던 근위병이 마차 문을 열었다. 알버트도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에스코트한다. 마차에서 내리자 시종이 우리 이름을 외쳤다. 오랜만에 연회에 나타나서 그런지 모두들 나를 한번씩 쳐다본다. 눈길도 주지 않고 똑바로 걸어 들어갔다. 멀리 상석에 앉은 에스메랄다와 눈이 마주쳤다. 지루했는지 부루퉁하던 얼굴이 펴졌다.
"우선 황녀 전하께 인사드리러 가죠."
걷는 것도 잊고 나를 쳐다본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정말 생각도 못한 것 같다. 내가 각오하라고 했을텐데. 팔짱낀 팔로 허리를 지긋이 눌렀다.
"우리가 뭐라고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뵈러가요."
"난 황녀 전하의 하나뿐인 친우예요. 당연히 가장 먼저 뵈러 가야죠."
"원하시는대로."
알버트는 이제 조금 정신을 놓은 듯하다. 그래도 제대로 걸어서 에스메랄다의 앞에 도착했다. 빅토리아는 그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갈고닦은 예절을 늘어놓았다.
"알란타의 미래이신 에스메랄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대마저 그럴텐가. 내게 편히 대해도 좋다 하지 않았는가."
"어찌 감히... 지금까지의 저는 잊어주세요. 오늘부터는 전하를 훌륭하게 보필할 빅토리아 리클렌이 되겠습니다."
"호오. 기대하겠네. 그나저나, 결국 자네 오라비는 오지 않은듯 해."
에스메랄다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루드비히 황자가 허둥댔다. 황자도 참 귀엽긴.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함께 왔어야 했는데 퇴청을 막고 있다고 연락이 와서..."
"감히 누가 퇴청을 막는단말이냐!"
너요 너. 네가 그랬잖아. 놀리려고. 항의할거야. 황제한테 항의할꺼야 이 악덕 고용주야. 이제 알버트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신차려. 저거 너야. 저래서 기사는 어떻게 하나. 누나는 정말 네가 걱정스럽다.
"대신 오라버니께서 선물을 보내셨어요. 받아주세요."
"됐네. 선물은 범인의 목으로 달라고 했거늘."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아 정말. 네가 받고 안받고는 상관 없어. 난 주고 갈거다. 에스메랄다는 잠시 내 눈을 쳐다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손짓했다. 단상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서자 알버트가 침을 꿀꺽 삼키고 내 손을 잡아 에스코트했다. 그리고 황녀의 앞에 서서 상자를 내밀었다.
"오라버니와 제가 고심끝에 골랐습니다. 부디 받아주세요."
"그대가 수고했다면 당연히 받아야지."
"유용하게 쓰였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게."
보이지 않게 덜덜 떨고있는 알버트의 손을 잡고 있으니 내가 에스코트를 받는건지, 알버트를 에스코트 하는 중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어찌어찌 계단을 내려와 홀의 외곽으로 이동했다. 알버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있으려니 아무래도 앉아서 쉬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자리좀 피해 있으라고 시켰지, 정말로 상태가 나빠지라고 하진 않았는데.
"알버트. 오랜만에 걸었더니 지치네요. 테라스에서 잠깐 쉬어요."
"그래.. 요. 저쪽 테라스가 바람이 적당히 들어서 좋을거예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잠깐 이야기도 해요."
"응..."
정신차려. 우리 지금 내외하는 중인데. 거의 끌다시피하며 테라스로 들어가 의자에 앉혔다. 알버트는 그제야 안색이 좀 나아져서 숨을 깊게 내쉬었다. 옆에 앉아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서 언제 승진하고, 언제 기사단장이 될거니."
"그 전에 죽을것 같아요. 살려주세요."
"걱정 마. 죽기 전에 알아서 조절해줄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렇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바로 이전 생에는 지겹게 봤는데. 매일같이 초대받지 못한 파티를 기웃거리면서... 아무도 내 편은 없고 사방이 적이었다. 지금은 어설프고 모자라긴 해도 내편이 곁에 있어주니까. 알버트의 어깨에 기대고 콧노래를 불렀다.
"제국 최고의 레이디가 될거라더니."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러지 말자. 서로 어색하잖아."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문 너머로 머리가 불쑥 들어왔다. 대체 분위기 파악 못하는 게 누구냐.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세상에. 내 딸랑이 줄리에타 피뇨르다. 알버트의 안색이 다시 새카매졌다.
"여, 영애."
"오랜만이네요 공자. 어머! 제가 혹시 방해했나요?"
"아닙니다."
직장 상사 딸이라고 네가 고생한다. 메리한테 내가 잘 돌봐준다고 약속했으니까 책임져줘야지.
"오랜만이예요 영애. 마리아의 생일 이후로 처음이죠?"
"네! 정말 오랜만이예요. 그동안 연회에 안 나오고 뭐하셨어요?"
부담스럽게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쳐다보는 줄리에타랑 마주보고있으려니 속이 불편하다.
"그간 부족했던 것들을 조금 공부하고, 어머니를 도왔지요."
"영애... 너무 완벽해지시면..."
"무슨 일로 오셨어요? 빈 테라스라고 착각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또 쓸데없는 찬양을 하려 든다. 내가 왜 너랑 말 안섞으려고 하는데... 그것만 줄이면 내가 공식 딸랑이 시켜줄 텐데. 그제야 줄리에타는 입을 가리고 깜짝 놀라 소근거렸다.
"우리 공자님께서 영애가 전에 부탁하신 걸 가져오셨대요. 움직이기 힘들어서 직접 와주셨으면 한대요."
아, 차노트 경. 아버지를 물건이라고 둘러대시면 어떻게 해요. 이 눈치없는 영애가 어디서 소문내지 않게 하려고 그런 것 같은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뭘 들고 나오는 척을 해야 하지? 우선은 따라가는 게 먼저다.
"어쩌죠, 알버트?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아, 오메르드 공자님! 요새 아버님께서 공자가 없어 힘들어하신답니다. 어서 승진해서 힘이 되어주세요."
"네..."
줄리에타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벌써 지쳐보이는 알버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 힘들면 기사단에라도 가서 잠깐 쉬고 있어. 영애들 피해서 도망쳤다고 해."
"응... 늘 고마워."
"아니야.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네. 앞으로는 아드리앙이랑 다닐게."
알버트가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그래. 너도 애쓴다. 줄리에타가 초조한지 기웃거린다. 얼른 그녀를 따라 나섰다.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그녀의 말에 적당히 응대하며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 들어갔다. 대체 얼마나 더 가야하나 싶을 때, 문을 열자 복도의 끝에 루이스 차노트가 서 있었다. 줄리에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헤실거렸다. 얼마나 좋으면.
"오셨습니까."
"네. 힘든 부탁이었을텐데, 감사합니다."
"아니요. 그렇진 않았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줄리에타의 어깨를 안고 복도를 가로질러 나갔다. 음. 나 솔직히 돌아나갈 자신 없는데. 어떻게든 나갈 수 있겠지. 우선은 제일 큰 문제부터 해결하자. 힘차게 문에 노크했다. 방 안에서 잠긴 목소리가 대답했다.
"들어오게."
휴게실로 준비된 듯한 편안한 방 안에 차노트 공자와 많이 닮은 중년이 앉아있었다. 클로비스 하틴 차노트. 제국의 북방을 지키는 첫번째 기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숨이 찰 정도로 무섭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를 쳐다봤다. 그 정도로 날 경계하는 사람들은 수도없이 많았으니까. 이정도는 괜찮다. 별 것 아니다. 그렇게 되뇌일수록 마음이 차분해졌다.
"영애가 나와 만나고 싶다 했다지?"
"네. 제가 차노트 공자께 부탁드렸습니다."
"그래. 용건이 무언가?"
"저를 도와주세요. 대신 차노트를 지켜드리겠습니다."
내 황당한 말에 대공은 웃지 않았다.
"영애가? 리클렌이 차노트를?"
"눈치채셔서 만나주시는 것 아나신가요?"
어디 떠보려고 들어? 내가 당신 나이까지는 못 살아봤어도, 그 배는 살았어. 웃음기를 지웠다.
"누가 보냈나."
"정계에 너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제가 누군지 아시면서."
"황녀전하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찼다. 지금 피가 바짝바짝 마를테지.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영광스러운 황실의 일원은 둘째치고 목숨부터 걱정해야 할 거다. 그러게 왜 그랬어. 적당히 황제가 주선해주는 가문이랑 결혼하지 뭐 오래 살아보겠다고 난리를 피워서.
"어찌 하면 좋겠나."
"수도에 머무세요.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실겁니다."
"황녀께서..."
"걱정마세요. 아는 사람은 전하 한분 뿐이십니다. 폐하께서도 모르고계세요."
"그러다 영애가 큰 일을 당할 수도 있네."
"괜찮아요. 전하께서 시키신 일이니까. 부지런한 손발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요."
큰일이다. 이제 곧 마이어 부흥파가 들고 일어날텐데,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네. 그래도 처가여서 다행이다. 지금껏 영지에 박혀서 외부에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차근차근 알리바이를 만들어가야지.
"우선은 연회장에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춰주세요. 오늘은 황녀 전하께서 오래 머무실 예정이라 하시니 가서 황가를 지지한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세요."
"영애. 모두가 당신처럼 순수하게 생각한다면 좋을텐데 말이야."
"걱정 마세요. 황제파의 총수인 리클렌이예요. 힘없는 영애라고 무시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눌러드리죠."
힘없는 이라고 말 할때 당신 웃으려고 한거 다 봤다. 이럴수가. 그 촌구석까지 내가 구제불능 천둥벌거숭이였던 게 소문이 났었나.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거기에 드나드는 가문은 소트와 피뇨르 말고는 거의 없을텐데. 줄리에타가 내 발등을 찍을리는 없고, 소트인가.빌어벅을 놈들
"정 걱정되시면 오라버니들께 도움을 요청할까요?"
"아니. 사양하겠네."
고지식한 빈센트 티모시 공자께서 아시면 오히려 큰일나겠지. 걱정마세요. 내 부하들이 차근차근 아래부터 뒷공작을 할테니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받을테니 저는 일단 물러나겠습니다. 다음번에 줄리에타 편으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네."
공작이 먼저 자리를 떴다. 내가 들어온 문으로 공작이 나가고 이제 고민이 시작됐다. 켕기는 것들이 돈은 또 엄청 긁어모아댄다. 그래서 그 돈으로 찔리는 것들을 무마한다. 소트도, 오르타도 다 그렇다. 다행이다. 내가 돈이 없지는 않아서. 미리 한몫 당겨두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했어. 이제 또 당분간은 두통에 시달리면서 살얼음 위를 걸어야지. 빨리 금지마법 사건이 해결되면 좋겠다. 오라버니 목걸이를 좀 빌리고 싶네. 장갑 안에 낀 에스메랄다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런 마법이 걸려있지 않은 평범한 반지지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는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떻게 돌아가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까. 고민하며 내가 들어온 반대편의 문을 쳐다봤다. 한참 들어왔으니, 못해도 후원 근처로 나오겠지. 문을 열고 나가니 다시 복도가 있었다.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곳인지 촛불 하나 없다. 창가로 들어온 달빛에 의지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벽을 훑었다. 명화가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정말 의외의 그림이 붙어있었다. 아나이스 황후. 오래전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알려진, 또다른 삶의 어머니.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미움살 일을 한 적이 없던 황후. 에스메랄다로 살며 황후의 사후 이 초상화를 두번다시 보지 못해 온 성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는데, 이런 곳에 옮겨져 있었나. 이게 뭐라고. 겨우 커다란 종잇장인데 눈을 떼기 힘들었다. 가까스로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숙여 인사했다. 안녕. 마지막이예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넓은 연병장에 처음보는 사람이 혼자 서 있었다.
"누구..."
밤하늘을 빼닮은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방금 전까지 훈련중이었던 듯 숨을 몰아쉰다. 혹시 들켰나. 아니면 누군가의 세작이라고 생각하나. 필요 이상으로 뛰는 심장을 달래려 마음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이쪽은 기사단의 구역입니다. 오신길로 돌아가십시오."
"제, 가 길을 잘 모르겠어서요."
"모셔다드릴까요?"
"아... 네."
땀투성이인 손을 내밀다 화들짝 놀라며 손수건을 꺼내 그 위에 펼쳤다. 그리고 놀라지 않게 검을 멀리 치웠다. 그냥 안내만 해 줘도 괜찮은데... 얼떨결에 손을 잡고 기사단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잘 아시겠지요?"
보통 영애들이 여기서 기사들을 기다리곤 하니 넘겨짚나보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속상하지만 길을 알고 있기는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고개숙여 인사했다.
"그럼 이만..."
"잠깐만요!"
"네?"
"그, 오해하지 마시고... 오메르드 경을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알버트 경이요?"
"네."
기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을 열고 안쪽을 들여다봤다. 얼핏 알버트가 의자에 앉아서 누군가와 떠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쟤는 내가 좀 쉬랬더니 아주 편하게 놀고있네.
"알버트. 레이디께서 찾아요."
"레이디? 누구.... 아!"
그제야 헐레벌떡 뛰어나온다. 그 와중에 매무새는 가다듬어서 바로 돌아가도 문제는 없겠다.
"쉬고 계시라 했더니 놀고 계셨네요."
"죄송합니다. 선배님들이 붙잡아서..."
"괜찮아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전하께서 걱정하실테니 돌아가요.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
기사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그리고는 알버트가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간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사람인데,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네. 누구였더라. 아니 본 적 있던가? 잘 모르겠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길을 잘못 들어서."
"세상에..."
딱한 눈으로 쳐다보는 알버트의 손등을 때렸다.
"안내받아서 도착했는데 돌아가는 길은 안 알려주더라."
"그 사람들이 너무했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눈빛이 불순한 게 아닌 것 같지만. 이제 일이 어떻게 풀릴 지 가늠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까 그 기사 머리색도 이랬지.
"아까 그 기사, 누구야?"
"리스 경?"
"이름이 리스라는 거야, 성이 리스라는 거야?"
"이름. 리스 에들턴. 왜?"
에들턴? 귀족은 아닌가. 처음 들어보는 가문이다. 한때 소드마스터까지 가봤던 적 있는 내가 보기에도 지금 이 못난 알버트만큼 될 성 부른 떡잎이다. 처음 만나긴 했지만 인성도 나빠보이지는 않고.
"괜찮아 보이네. 못해도 소드마스터는 될 것 같아. 친하게 지내."
"정말? 진짜? 나는?"
"너도."
이번에도 죽지만 않는다면. 죽기 직전에 소드마스터가 됐으니까. 알버트를 보고 있자니 오늘따라 마음에 안 든다. 이제 진저랑 블론디는 그만 보고싶다. 리스 에들턴처럼 조금 차분한 색을 보고 싶다.
"절대로 죽지 말아야지. 꼭 소드마스터 되서 집안도 일으키고, 메리도 고생시키지 말아야지."
"그건 힘들 것 같은데."
"헉, 왜!"
글쎄. 네가 메리보다 유능할것 같지는 않다. 옆에서 방정떠는 알버트를 무시하고 연회장으로 이끌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갔을 때, 황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차노트 공작이 보였다. 시키는 대로 잘 하네. 역시 기사들한테는 단순하게 시켜야 하나. 모든 기사들이 피뇨르 남작 반만 따라가면 좋을텐데.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머, 리클렌 영애. 유행 따위는 지겹다시더니, 결국 따라하시네요?"
샬럿 노먼. 나는 네가 정말 싫다. 내 결심을 와르르 무너트리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귓가에 연신 진정하라고 조잘거리는 알버트를 밀어내고 똑바로 쳐다봤다. 샬럿이 기세에 밀려 움찔한다.
"영애는..."
"노먼 영애. 지금 입고 계신 드레스, 분명 지난해에 리클렌 영애가 입었던 드레스와 비슷하지 않나요? 하긴, 고트 영애도 영향을 받을 정도인데."
줄리에타, 네가 날 위해! 내 감동이 마를 새 없이 또 한마디를 쏘아댄다.
"역시 고트 영애는 어떤 드레스던지 잘 어울리세요. 저런 복고풍 디자인까지 훌륭하게 소화해낼 줄이야. 물론 저는 그때 리클렌 영애가 입었던 옷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피뇨르 영애. 저한테 정말... 관심이 많으셨네요."
"그럼요. 저는 영애의 옷장 속 모든 드레스를 알고 있을거예요."
그건 좀 무서운데. 내가 하고싶던 말은 아니지만 샬럿이 한마디도 못하게 쏘아붙여대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와중에 부들부들 떠는 샬럿은 내버려두고 줄리에타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간 앓으셨는데, 괜찮아지셨나요?"
"걱정해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리고 빅토리아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리클렌과 피뇨르 간에 서먹하지 말아요."
줄리에타는 대번에 벅차다 못해 울 것 같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손을 잡고 살짝 토닥였다.
"피뇨르 남작께서도 저를 딸처럼 대하시는걸요."
"그, 그럼 영애도 줄리에타라고 불러주세요."
"그럼요."
도저히 표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부채를 쫙 펴서 얼굴을 가리고는 두어걸음 물러섰다. 내가 제 약혼자를 울리는 줄 알고 저쪽에서 기다리던 차노트 공자가 쫓아온다.
"영애. 누가 보면 내가 영애한테 화내는 줄 알겠어요."
"알, 알겠어요! 안 울게요!"
"줄리에타. 무슨 일이예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리고 당신은 기가막힌 타이밍에 오지 마. 어지럽다, 어지러워. 알버트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그냥, 너무 감동해서..."
"줄리에타. 조금 쉬는 게 좋겠어요."
루이스 차노트가 째려보는 것 따위 하나도 무섭지 않아. 버티는 줄리에타를 끌고 테라스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까지도 샬럿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영애. 더 하실 말씀이라도?"
"그, 그럴 리가!"
"그럼 저는 이만. 아직 외가에 인사드리지 못해서요."
"그래. 아버님이 네가 언제 오는지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계신다. 같이 가자, 빅토리아."
아, 아드리앙. 왜 네가 여기에. 가문 대표로 참석했으니 어쩔수 없지만 적어도 너는 만나고싶지 않았어. 알버트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올려다봤다. 바라는 게 아주 많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가...요. 알버트."
말없이 따라가주는 네가 고맙다. 역시 너밖에 없나봐. 앞서가는 아드리앙을 따라간 곳에는 눈썹을 잔뜩 들어올리고 알버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외가 어른들이 모여계셨다. 아, 싫다. 밖에서 별 세면서 시간이나 때울걸.
"오랜만에 뵙습니다, 모문 후작님."
"섭섭하구나, 빅토리아. 전처럼 할아버지라고 부르거라."
"네, 외할아버님."
막 도망치려는 황자를 붙잡아 그 옆에 나를 앉혔다. 졸지에 파트너와 떨어진 알버트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버렸다.
"음! 잘 어울리는구나!"
"인사가 늦었습니다. 빅토리아 리클렌입니다, 황자 전하."
"아니네. 나도 그대가 온 줄 몰랐으니 괜찮아."
이래서 싫었다. 모문이 황제를 너무 사랑하는 건 알겠지만, 나까지 그쪽에 엮어주지 못해 안달이니까. 지금쯤 도망쳤어야 하는데. 황자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제 누이가 내 오라비를 좋아하는 티를 그렇게 내는데 하하호호 웃기는 그렇겠지.
"오라버니께서 신세를 지고있습니다."
"아니네. 티모시 경이 뛰어나니 당연히 등용해야지."
"며칠째 얼굴도 안 비추고 일만 해서 할 일도 제대로 못하는 줄 알았답니다."
좀 보내줘라. 웃으며 지긋이 쳐다보자 떨리는 눈동자로 슬쩍 시선을 피한다. 아직 소심한 성격이 도망가지는 않았구나. 서러운 표정을 은근히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모두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전하."
"그, 랬구나."
"예, 전하."
"일이 얼마나 바쁜걸까요? 편지 한 장도 못할 정도인지..."
황자의 안색이 창백해져갈 무렵 모문 후작이 내 입을 틀어막을 셈으로 폭탄을 던졌다.
"그래. 그나저나, 오메르드 공자는 아직도 가지 않고 무얼 하는게냐?"
"알버트 공자를 제가 모셔 왔으니, 갈 때도 함께 가야지요. 요새 프라우의 영애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가 좋은 분인지 모릅니다."
"오메르드가 말이냐?"
영 믿기지 않는다는 듯 턱을 쓰다듬는다. 네. 믿기지 않겠지만, 이 오메르드같지 않은 남자가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그렇게 좋댑니다. 저는 좀 차분한 사람이 좋은데 말이지요. 아드리앙 모문이 정색을 한다.
"그래봤자 잠깐이다. 너는 아직 약혼자도 없으니 처신을 똑바로 해야지."
그건 너나 잘 하지 그래. 황녀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면 나중에 아무도 결혼하자는 소리 안 한다.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알버트의 팔을 끌어안았다.
"내 친구가 그렇게 미우신가보지요? 모문 공자."
"그래. 외모 빼고 봐줄만 한 것도 없는 네가 오메르드와 붙어 지내니 고모님께서 걱정이 많으시겠구나."
"어머니 건강은 제가 알아서 챙길테니, 공자는 외숙부 건강이나 챙기시지요."
제임스 모문, 하워드 모문, 아드리앙 모문. 나이값도 못하고 황가에 매달리는 사람들과 얽혀서 좋을 것 없다. 저런 가문에서 어머니같은 정상인이 났다는 게 믿겨지지 않아. 오늘도 놀라움이 가득하다. 이 불쌍한 황자를 어떻게 구할까 고민하는데 알버트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에스메랄다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있었다.
"전하. 황녀께서 찾으시는 듯합니다."
"누님이?"
그제야 뒤를 돌아본다. 이 황자도 요령이 없었지.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넘쳐나서는 신나서 일어난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봐. 나는 누님께 가봐야겠네. 그간 제국의 수호에 힘썼으니 편히 즐기다 가시게."
"예, 전하."
분위기를 타고 슬쩍 일어나 황자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은근슬쩍 모문 일가에게도 인사하고 뒤로 빠졌다. 내가 외가를 이렇게 홀대한 것을 알면 어머니께서도 상처받으시겠지만 이해는 해주실거다. 아마. 어머니도 모문이 오메르드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정도 기피받는 것은 잘 아시니까.
"알버트."
"어, 네."
"오늘따라 날이 참 기네요. 내일도 업무가 있을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요."
에스메랄다가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도 안되는 건 안되는거다. 냉정하게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황녀의 탄신연회가 끝났다. 앞으로 6월의 건국제까지 커다란 공식행사가 없다. 그 이야기는 기사단 훈련 집중기간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성벽 아래 연병장의 병사들만큼 처절하게 연병장을 달렸다. 5등 안에 들지 못하면 죽는다. 꼴찌로 들어오면 두배로 죽는다.선두에서 달리다 심장이 터져 죽든, 순위 안에 못 들어서 달리다 달리다 탈진해 죽든 죽는 건 마찬가지니 기왕이면 덜 고통스럽게 죽겠어.
"으아아아아악!"
"저거, 애들 미친다. 적당히 돌려라."
"아니 무슨 기사 해먹겠다는 것들이 체력이 아가씨들만도 못해요? 영애들은 그 무거운 옷들을 겹겹이 입고도 연회 내내 표정하나 안 변하는데. 그냥 쟤네들이 글렀어."
아냐. 걔네 멀쩡한거 아니야! 얼굴에 덮은게 있어서 안보이는거야! 억울함이 북받쳐올라 힘이 솟는다. 결국 1등으로 도착해 그대로 엎어졌다. 아, 죽겠다. 심장은 둘째치고 폐가 터지겠다. 하늘이 노랗게 빙빙 도는 와중에 2등으로 도착한 놈이 내 옆에 벌러덩 드러누워 헥헥거린다. 아이고, 아버지. 저 곧 만나러갑니다. 힘들어 죽겠는 것보다 목말라 죽겠는 게 더 심하다. 굼벵이처럼 기듯 일어나 손을 휘저었다.
"물, 물..."
"저놈은 선배를 시켜먹으려 들어."
물을 달랬더니 물을 뿌려버리는 미친 선배들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든다. 벌떡 일어나보니 먼지를 뒤집어써 새치가 잔뜩 생겨버린 에들턴이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세워달라고? 이 양심없는 사람. 나도 내 몸이 무겁다! 나도 물 한바가지 퍼다가 부어주고싶었지만 머리속에 빅토리아의 말이 스쳐지나간다.
'친하게 지내...'
친하게 지내... 친하게 지내... 머리속에서 울려퍼지는 메아리가 그랬다가는 네 목숨이 끝장난다고 속삭인다. 팔을 걷어차고 물을 부은 나를 눌러앉히고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
달라붙은 모래를 털어내고 구석의 수도가로 향했다. 죽겠는 건 죽겠는거고, 땀냄새 나서 미치겠다. 나는 5위 안에 들었으니 이제 개인훈련 해도 괜찮으니까. 펌프를 눌러 물을 틀어놓고 그 아레 서서 5등 안에 못 들은 안타까운 동기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다시 끝없는 무한경쟁 레이스에 들어갔다. 아, 프란님. 저 어린양들을 구원하소서.
씻고 나니 에들턴이 수건을 내민다. 머리에 덮어쓰고 그늘을 찾아 선배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이 징그러운놈들. 한번정도는 낙오도 하고 그래라. 동기들 불쌍하지도 않냐?"
"동정으로 일부러 져주면 제 몸이 괴롭습니다."
"져주면 동기들이 좋아할까요? 저는 최선을 다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에들턴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얘는... 이 사람은 얼마나 정직한걸까. 탄신연회때 비번인데 그 시간까지 훈련한 걸 생각하면 정말 말도 못하게 고지식하고 원칙주의자인 모양이야. 선배님들이 에들턴의 얼굴을 보고 기겁을 해댄다.
"야. 너 평민이 그런얘기 하면 저기 있는 귀족들 난리나. 지금 우리 기수 귀족님들 안 나오셔서 다행인 줄 알아라."
"저도 귀족인데요."
"네가 무슨... 아 오메르드도 자작가였지."
"아, 진짜 선배!"
내 짜증에도 꿈쩍않던 선배님은 저 멀리서 걸어오는 세 유력가문 공자들을 보고는 자세까지 고쳤다. 진짜 드러워서 내가 출세한다.
"알버트 오메르드. 리스 에들턴. 레오 디쳇. 제이슨 고트. 칼 피뇨르. 이기적인 후배님들은 이제 저 불쌍한 자들을 위해 연병장 대열에서는 빠지겠습니다. 대신 입단 전까지 하던 수련은 깔끔하게 잊고 105기의 시범을 지켜보며 따라하도록 합니다."
동기들은 불안해했지만 나는 단장님 사무실에서 시중들면서 본게 있어서 마음편히 체념했다. 내일은 꼭 편안한 옷이랑 편안한 신발 챙겨와야지.
"그럼 오늘은 퇴청해도 됩니까?"
"그래. 내일 제2연병장으로 시간 맞춰 오도록."
"네. 가보겠습니다."
연병장 가로 돌아가 기사단 건물을 한번 올려다봤다. 오늘도 단장님은 궐련을 태우고 계신다. 꾸벅 인사드리고 돌아가려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나는 사무능력이 좋지만 직급이 딸려서 오늘도 일찍 퇴근을 하지. 역시 최대한 승진은 미뤄야겠다. 얼른 마굿간에 들러서 말을 찾아 떠나려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불쌍한 동기들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서운 목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친하게 지내...''
끈질기게 메아리치는 목소리에게 결국 항복했다. 말을 세워놓고 건물로 들어가는 동기들을 붙잡아세웠다.'
"잠깐만! 할 말이 있어요."
"무슨일이세요?"
대답없이 고개만 돌리는 도련님들 사이에서 에들턴만 대답한다. 이래서 귀족들이 문제다.
"내일은 아마 대련이나 비슷한 수준의 무식한 훈련을 할지도 모르니 편안한 옷을 준비해오시는 게 좋을겁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헉. 덜 말라서 촉촉한 검은 머리카락에 빛이 반사되서 파란 눈동자가 더 반짝인다. 갑자기 그런 공격 하기 없기다 당신. 속으로 심장을 붙잡고 쓰러졌다. 여기 있는 인간들 중에서 내가 제일 못생겼어. 얼른 도망쳐야지. 집안에 하나뿐인 소중한 말님의 허리를 걷어차고 얼른 성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으니 잠깐 들러야겠다. 지금까지의 상황 보고도 해야하니까. 평소 가는 길과 달리 고삐를 당기지 않으니 알아서 리클렌 가로 잘 간다. 으이구, 이녀석. 똑똑하기도 하지.
리클렌 가는 뭐든 최고만 사용한다. 오랜만에 마시는 고급 차가 너무 낯설다. 그래. 나도 원래 이런 차를 마시던 사람이지. 마음의 눈물을 흘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가볍게 사뿐한 느낌이니 아마 빅토리아겠지. 시중을 들던 시녀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응접실에서 눈을 마주치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니? 사레들릴 뻔 했다. 콜록거리는데 태연하게 맞은편에 앉는다.
"... 누가 들으면 내가 꼭 사고쳤을 때만 널 찾아오는 줄 알겠다.
"대부분 그래서 찾아오긴 했지."
"아냐... 문병도 오고..."
"너 때문에 쓰러졌지."
부정할 수가 없다.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혹시나 잘못한 것이 있나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사고를 치고 싶어도 훈련하느라 지쳐서 그럴 시간도 없었어. 조용히 두손을 모으고 앉아있으니 빅토리아는 불안해하는 눈치다.
"숨기지 말고 빨리 말해."
"아냐. 그냥 얘기도 좀 하고, 요즘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고도 하려고."
"알버트..."
감동해서 제 앞에 있던 간식들을 내 앞으로 밀어준다. 밖에서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한참 나더니 문앞에서 멈췄다. 문을 빼꼼 열고 클라렌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가씨. 말씀하신 간식들이 준비되었습니다."
"응. 가지고 들어와."
쏙 들어와 발로 문을 툭 차 닫았다. 문 밖에서 다른 시녀가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당당하게 들어와 테이블에 티세트를 올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수고했으니까 먹어."
"네!"
본격적으로 차까지 한잔 따라준다. 솔직히 나는 그냥 들러리고, 너희 편해서 좋은거지? 그래. 너희도 숨 좀 돌려야지.
"그래서, 요새는 어떻게 지내는데?"
"본격적으로 훈련 시작했어. 네가 죽도록 노력하래서 1등했어."
"잘했어. 여기, 상."
입에 초콜렛이 들어왔다. 아, 달고 맛있다. 단장님 비서 할 때는 자주 먹었었는데... 아니지. 내가 그 지옥에 다시 들어갈 수는 없지.
"그리고 이제 윗 기수 선배들이랑 같이 정식 훈련을 하는 것 같아. 우선은 나 포함 다섯이야."
"다섯? 누구야?"
"디쳇 후작 레오 경, 제이슨 고트, 칼 피뇨르. 그리고 리스 에들턴."
"쟁쟁하네. 너랑 에들턴 빼고."
"응. 그렇... 뭐?"
비겁하다. 물어보려니까 입에 초콜렛을 넣네. 아, 근데 진짜 맛있다. 먹을거로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다니. 음식은 죄가 없으니까 참는다.
"친하게 지내. 그 사람들이 네 목숨줄이다, 하고 어떻게든 들러붙어."
"안그래도 오늘 점수 좀 따고 왔어."
"아이 착하다."
뿌듯한 얼굴로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면서 앞에 스콘까지 놓아준다. 먹을거 고마워. 근데 대접이 왜이래 이거. 꼭 어릴 때 처음 메리한테 장난감 양보했을 때 칭찬받던 기분이네.
"나 네 동생 아니다."
"그래도. 언제 철 드나 했더니, 이제 들었네. 그런데 에들턴 까지 통과할 줄은 몰랐어."
"2등이였어. 평민 탈출하려고 정말 열심히 하는 것 같더라."
"음... 에들턴. 에들턴... 아 기억났다."
얼굴을 찌푸리곤 팔걸이를 두드린다. 뭐가 그렇게 거슬리길래. 클라렌스는 빅토리아의 찻잔의 식은 차를 따라내고 새 차를 부었다.
"누군지 아시겠어요?"
"당연하지. 알벼트. 그 사람 절대로 탈락 안 하게 잘 데리고다녀. 낙오하면 그대로 때려치고 파트론으로 떠날거야. 그리고 거기서 기사단장까지 올라가."
"파트론이면 우리 일에 방해는 안 되지 않아?"
"매우 방해가 된단다. 무조건 잘 해줘. 절대로."
"응. 뭐... 평민이라 그런지 조금 눈치가 없긴 한데, 잘 돌보면 될 것 같기도 하고."
"네가 할 말은 아니다."
빅토리아가 영 못마땅한 눈으로 또 쳐다본다. 왜 얘는 나랑 메리를 저렇게 쳐다보지? 정말. 오메르드도 할 때는 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내가 전생에 메리로 살 적에 얼마나 훌륭한 마법사였는데. 황녀 전하가 잘 싸운다고 포상까지 약속했었다. 결국 죽었지만.
"제발 잘 해줘. 디쳇 후작이랑 같이 잘 봐주라고."
"응.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다 이유가 있겠지."
"그래, 그거야. 너는 메리랑 다르게 잘 납득해서 좋다."
"우리 애가 의심이 많아서 미안해. 그런데 마법사라는 사람들은 다들 그래."
"우리 오라버니는 안그래."
그건 너라서 그래. 나한테는 그렇게 매서울수가 없다. 우울해. 너무 우울해. 내 추억속의 아름다운 티모시 리클렌과의 추억이 매일매일 하나씩 흩어진다. 이제 아름다운 추억도 몇개 안 남았다.
"메리는 어떻게 지낸대?"
"몰라. 걔는 소식 없는게 도와주는거니까."
"그렇긴 한데, 나한테까지 아무 말도 없으니까 섭섭하네."
"걱정마. 메리는 유능한 아이여서 진작에 마법같은 건 다 떼고 지금 놀고 있을거야."
"그런가?"
내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었나. 마법 한정으로는 노력도 하고, 재능도 있긴 했던 것 같다.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럼 문제는 재능도 그닥이고, 노력만 하는 나인가.
"문제는 나지. 아, 머리야. 이제 에스메랄다한테 디쳇 후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해야겠네. 역시 황녀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니까 반응이 달라."
"응. 디쳇 후작은 반란 전까지 죽은듯이 영지에 있었는데 말이야."
"좋은 일로 만들어야지. 적어도 올해 황제폐하의 탄신연회 전까지 에스메랄다의 입지를 다져야해."
"나는 잘 모르겠어. 시키는 대로 잘 할테니까 열심히 해."
"그래.기왕이면 네 편도 좀 많이 만들고. 반란당시에 반란군들이 이쪽 사정을 잘 알던 걸 보면 기사단에 작손의 끄나풀이 있어. 찾아봐."
헉. 갑자기 팔굽혀펴기 10번 합시다에서 운동장 10바퀴 돌기로 난이도가 올라가는게 어디있어. 당황스럽네. 그렇다고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하다, 난감해. 그런데 내 기억으론 디쳇이 끄나풀 눈치채는데 일가견이 있었지. 나는 아무리 봐도 도저히 모르겠으니까 진짜 열심히 친해져야겠다.
그리고 내 일신의 평안함을 위해 칼 피뇨르와도 친해지자.
"에들턴 한테 잘 해줘. 정말 그 사람 크게 될 거거든."
"얼마나 크게 되길래?"
"파트론으로 떠나면 제국 황제까지 오를거야."
헉. 황제. 그정도야? 에스메랄다는? 우리 목숨은?
"떨지 마. 귀족들이 평민이라고 훈련도 제대로 참가 안 시키고 따돌려서 떠난거니까. 하나라도 붙어있으면 몰래 떠날 일도 없지."
말은 쉽지. 친해져야 하는 사람은 나인데. 나로 살아봤다고 너무 막 말하네. 평생 한마디 말 붙여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랑 친해져야 하다니. 그런데 그러면 제이슨 고트만 왕따되나? 나 고트를 왕따시킬 만큼 용기는 없는데. 아 진짜 큰일이다. 어떻게하지. 내가 네명이나 책임져야하나.
"제이슨 고트도 잘 봐줘. 그 사람 삐뚤어지면 작손이랑 손 잡을지도 모르니까."
"헉. 고트가 작손이랑. 너무 무섭다."
"생각만 해도 섬칫하니까 네가 열심히 해야해."
"응. 나 열심히 할게!"
"착하다."
빅토리아의 쓰다듬을 받으며 전투적으로 초콜릿을 먹었다. 동기 사랑, 목숨 사랑. 인생 3회차 경력으로 열심히 살아보자.
디쳇 후작이 하틴 기사단에 입단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내가 고급정보를 얄려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던 에스메랄다가 그제야 급히 그를 소환했다. 십 오년만에 하나 남은 외가 사람과 만나는 기분은 어떨까. 내가 에스메랄다였다면 어떤 기분일까. 너무 오래전이라 그런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유쾌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레오 디쳇. 황후의 사망소식으로 충격받은 선대 후작 부부가 앓다 사망한 뒤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던 그가 외부활동을 시작한 것은 분명히 에스메랄다의 책봉식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속의 그는 소극적인 루드비히를 싫어했다. 늘 당당하던 에스메랄다를 지지했지만, 황녀라는 이유로 대놓고 보일 수는 없었다. 그 시절에도 늘 황위를 이양받았으면 하던 사람이니 지금은 오죽할까. 아마 어떻게 해서든 에스메랄다의 힘이 되어주려 할 것이다. 몇 없던 혈육을 모두 잃고 충격받았던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은 에스메랄다 뿐이었으니까.
"빅토리아. 디쳇 후작께서 연회에 참석하시겠다는 답장을 보내셨단다."
"우리 가문 초대장을 골라주시다니, 영광이네요. 준비하는 우리는 힘들지만."
평소처럼 집사에게 맡기고 밀린 영지 업무나 하려던 어머니는 갑자기 일어나 진두지휘를 시작하셨다. 드레스를 맞추는 것도 잊고 열심이신 어머니를 위해 클라렌스를 보내 재단사를 닥달했다. 권력과 돈의 힘은 위대했고, 드레스는 무사히 내 손에 들어왔다.
"준비는 완벽한데, 그러면 뭐 해요. 주인이 없는 걸."
"그게 걱정이구나. 네 오라비들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아드리앙 오라버니라도 불러와야 할 것 같구나."
"안돼요. 차라리 제가 전하께 가서 제발 하루만 보내달라고 부탁드릴게요."
내 손을 꼭 잡고 간절하게 바라보셨다. 기필코 우리 집 남자들을 되찾아오리라. 굳은 결심을 하고 일어나려는데 서재 문이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빈센트!"
"오라버니!"
오빠! 어머니는 체통도 잊고 일어나 오라버니가 맞는지 확인까지 하셨다. 저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은 누가 뭐라해도 틀림없는 빈센트 오라버니다. 퇴청은 안 시켜도 잘 먹이고 재웠는지 야위지는 않았네.
"아버지와 형은 어쩌고?"
"형님은 잠시 길드에 들렀다 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집사와 이야기중이세요."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하루 앞으로 다가온 연회 걱정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시던 어머니가 쓰러지듯 다시 의자에 앉았다. 다행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또 큰일이다. 이번에는 남자들이 입을 옷이 없으니.
"어머니. 오라버니랑 아버지 맞춰놓은 옷이 있던가요?"
"맙소사! 샐리! 당장 재봉사에게 연락하거라!"
"네, 마님!"
서둘러 나가는 샐리를 멍하니 쳐다봤다. 큰일이네. 왜 하필 우리 가문 연회를 첫 연회로 정한건데. 아무래도 이건 에스메랄다가 꾸몄다. 이미 늦었으니 일단 부딪혀보자. 아니면 내가 에스메랄다와 친하다고 하니 그냥 골랐을지도 모르지. 쉬어야겠다며 나가는 빈센트 오라버니와 아버지께 간다는 어머니를 보내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 머리아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후작님께서는 분명히 요새 잘 나가는 황녀 지지세력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오시는 걸거라구요!"
"조용히 해..."
티모시 오라버니. 빨리 와요. 와서 내 고민을 들어줘. 아, 고민 해야 무슨 소용일까. 나가자. 나가서 놀자.
"클라렌스. 나갈 준비 좀 도와줘."
"어디 가시게요?"
"살롱에 가자. 아무 생각 않고 떠들고 싶어."
"네, 아가씨."
간단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때까지도 큰 오라버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길드에 가서 뭘 하고 있는거야? 설마 메리를 만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거면 오늘 안에 돌아오기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요새 메리는 자진해서 사형수들과 같이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안에 들어가있으면 바깥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으니까. 걔는 아직 마법에 미치지는 않았으니 하루에 한번씩 나오기는 하겠지만.
아. 마차 답답하다. 직접 말 타고 다니고 싶다. 위험하다고 절대로 허락 안 해주겠지. 클라렌스가 타는 거나 구경해야 한다는 게 너무 슬프다. 클라렌스더러 집에 돌아가면 승마나 하라고 부추기며 실랑이를 하는 사이 살롱에 도착했다. 살롱 '이른 새벽의 햇살'은 내 또래 귀족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만큼 머리아프게 생각할 일이 없어 편하다.
"어서오세요, 리클렌 영애. 짐은 제게 맡겨주세요."
"아냐. 내 하녀한테 들려보낼거야. 클라렌스. 오찬시간에 늦지 않게 데리러 와. 그 전에는 오라버니도 돌아오시겠지."
"네."
클라렌스는 같이 못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눈빛으로 인사하고 사라졌다. 쟤 정말 언제쯤 자기 직업에 익숙해질까. 이래서 평민들이란. 아니지. 이러면 안 되지. 평민은 죄가 없다. 이게 다 돈 바르는 것 좋아하는 귀족들 잘못이다.
"빅토리아!"
무섭다. 내가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고 한 이후로 가는 곳마다 줄리에타 피뇨르가 있다. 침착하자. 웃으며 인사하자 벅찬 얼굴로 나를 제 모임으로 이끈다. 내가 등장하자마자 영애들의 얼굴이 굳어버렸잖아. 미안해요 영애들.
"리클렌 영애가 살롱에 오신 건 처음이네요."
"저책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내일 연회 준비로 시끄럽기도 해서."
"내일이 연회였죠?"
줄리에타가 나 대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들은 참석하세요?"
"네. 방금 막 돌아오셔서 뵙고 왔어요."
내 말에 영애들의 눈이 뒤집혔다. 얼굴 색을 바꾸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돌변했다.
"빈센트 공자님 말고 티모시 공자님도 귀가하셨나요?"
"당연하죠. 아버님도 돌아오셨어요. 아버님 이름으로 연 파티인데, 가문 사람들이 없으면 곤란하니까요. 그런데 어찌 공자님들은 많이 안보이죠?"
원래 영애들 위주이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더 사람이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는데 영애들이 대답도 않고 불편한 기색이다. 조용히 주위를 둘러봐도 정말 남자라고는 약혼자와 같이 온 사람들 뿐이다.
"오늘 '그 레이디'가 왔으니까요."
그건 또 누구지요. 초심자를 조금 배려해주었으면 하는데. 줄리에타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소곤거렸다.
"프라우 안의 살롱들을 순회하듯 돌아다니는 영애가 있어요. 어느 가문 사람인지 아무도 모르는 신비한 분인데,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날마다 골라서 대화하지요."
"아! 소문의 그..."
"네. 그래서 다들 그 영애에게 도전하러 간거죠. 다른 영애들은 다 버려두고."
어린애들 사이에서 뭐 하겠다는건지. 속상해서 말도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무는 걸 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다 아프다. 줄리에타 피뇨르 이 약혼자밖에 모르는 사람은 신경도 안 쓰고 있지만. 줄리에타의 말동무들은 망아지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지 어떻게든 해주길 바라는 눈치고. 쉬러 왔더니 여기도 가시방석이다. 그래. 내가 해결해주마.
"어디에 있어요?"
"가보시게요?"
"궁금해서요. 얼마나 아름답기에 전부 홀려있는지."
"저쪽. 상아로 장식되어 있는 문 너머에요."
내가 일어나도 영애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이해는 한다. 저 안에 당신들의 적이 있으니. 그런데 용사가 적진에 가는 길에 응원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꿋꿋하게 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수의 또래 영식들이 테이블 하나를 비워둔 채 주위에 늘어서 있었다. 그 테이블에는 탐스러운 금발을 늘어뜨린 영애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때 이 연회, 저 파티 할 것 없이 얼굴을 들이밀고 다녔던 나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귀족 동지들 덕에 절절한 배신감이 사무친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애가 있으면 당연히 소문좀 내고 그랬어야지. 에스메랄다가 좋다고 쫓아다니던 하워드 모문마저 있을 정도니 인기가 얼마나 좋은 지는 알겠다. 다만 그 출신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움이 걸렸겠지.
그리고 저 사람이 바로 내가 찾던 프라우의 꽃이라는 걸 알겠다. 감히 귀족사회에서 입에 올릴 수 없는 그 칭호를 받아간 여자다. 그 여자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꽃을 바라보았다. 감히 그 유명한 리클렌의 망나니 빅토리아 리클렌을 무시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정말 처음 뵙네요. 리클렌 영애."
생긴 것 만큼이나 목소리도 곱다. 프라우의 꽃이 대답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창피한 귀족 동지들이 웅성거린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제 친구들이 당신 때문에 슬퍼하고 있어요. 관심을 끄는 행동은 자제헤주세요."
"관심, 이라. 제가 관심을 끌고 싶었던 건 당신같은 분이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없이 앞서 나가는 그를 따라갔다. 갑자기 나온 그를 보고 영애들이 다들 의아해하다 내가 따라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란다. 특히 줄리에타가 얼마나 놀랐는지 채신머리 없게 입까지 벌리고 있다. 웃으며 부채로 입을 가리자 그제야 입을 다문다. 뭐. 별 일 없을거다. 그렇게 작은 티룸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 귀여운 시종이 전해준 편지는 잘 받았어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오티."
프라우의 꽃. 정체불명의 여자.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대화상대를 고르는 완벽한 예절을 구사하는 여자. 먼저 앉아 자연스럽게 스스로 차를 우려냈다.
"그런 깜찍한 편지도 보낼 줄 알았나 했더니, 이제는 배우보다 더 능숙하게 연기하네요."
"귀족으로 태어나서 이정도는 기본이지. 그간 내가 너무 격식이 없었던 것이니 개의치 말아."
"그랬지. 자유를 대가로 방종한 삶을 살아 언제 스러질 지 모르는 등불 앞의 짚인형이었어."
듣자듣자 하니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네. 그렇다고 저 버릇을 고쳐보자니 저것도 꽃이라고 좋아하는 고위 귀족들이 너무 많다. 바보같은 인간들. 오티는 백합도 장미도 아니다. 그녀는 디기틸리스다. 자신을 위해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에게 거짓 환상을 보여줘 나락으로 이끌것이다.
"듣기 싫다. 할 말 있으면 빨리 끝내."
"인형들을 찾고있다지?"
대체 어느 입 가벼운 귀족이 재잘거렸을까. 이렇게 늦게 소란을 피운 걸 보니 알게 된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용의자가 대충 좁혀지지. 기밀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면서 어느정도 지위는 있는 자들 중 하나일테다. 그중에서도 작위도 높고, 어디 자리 하나 꿰 찬 사람이겠지.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는 몰라도..."
"진짜 인형을 가지고 다니는 마법사의 다음 행선지를 알고있다면?"
당장 머리에 꽂고 있던 장식을 뽑아 내려놓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않는다. 그렇다면. 목걸이를 풀어 내려놓았다. 빙긋 웃기만 한다. 아주 내 밑천을 제대로 털어먹으려고 드네. 하는수없이 귀걸이와 브로치까지 떼어냈다. 난 이제 전쟁터에서 갑옷 뺐긴 모양새가 되버렸는데 좋다고 집어든다.
"계절도 모르고 활짝 핀 튤립을 따라가요. 그 끝에 보일거야."
"겨우 그 한마디 듣자고 다 내줬다니..."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고급 정보야. 이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해."
"헛소리."
더 같이 있다간 드레스까지 뺏기고 빈털터리로 돌아가게 생겼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려는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찾지 마. 내가 필요해지면 언제든 찾아올테니."
"그럴 일 없으니까 바짝 엎드리고 지내는 편이 좋을거야. 그리고 그 짧은 말도 고치도록 해."
안 그러면 내가 그 혀를 잘라버릴테니까. 여자로 태어나 프라우의 꽃과 엮이게 될 줄은 몰랐다. 제발 이 소식이 오라버니들 귀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할 텐데. 황성에 갖혀 지낸다는 게 이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다. 저 혼자 즐거워 웃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오니 모두가 나를 주목한다. 소문대로 이야기가 끝나고 금붙이들을 모두 내주고 나왔는지 확인하는거겠지. 줄리에타만 사색이 되어 쫓아왔다.
"빅토리아!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예요?"
"별 것 아니예요. 불쌍하게 살기에 보태라고 나눠줬어요."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그간 혼자 쌓아온 우정이 갑자기 터져나와서 벅찬 건 잘 알겠는데, 혼자서 우애넘쳐서 나한테까지 강요하지는 말아주었으면 하는데. 대답하지 않고 문 앞에서 대기중이던 클라렌스에게 손짓했다. 아무생각 없이 나를 쳐다보다 창백해져 쪼르르 달려온다.
"아가씨!"
"괜찮아. 도둑맞은 것 아니야."
"그래도..."
"기분 전환은 충분했으니 돌아가자."
"네..."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만. 이 귀찮은 연기를 그만두는 날에 저 건방진 콧대에 언젠가 주먹을 날려줄거야. 내 결심이 무색하게도 살롱에서 달려나온 시종이 편지를 건넸다.
"그분께서 전해드리라셨습니다."
"오티가?"
하라는 대답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버린다. 지금 날 무시하는건가.
"거기 당신! 아가씨가 질문했잖아요!"
"편지에 궁금한 것이 다 적혀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냥 보내. 예의상 물어본거야."
"하지만..."
그냥 좀 가자. 입을 다물어버리니 마차 문을 연다. 올라타자마자 벽에 기댔다. 다시는. 절대로 만나지 말자. 더러운 인간 같으니. 살롱에 처음 간다고 나름 아끼던 장신구를 하고 왔는데 그대로 다 털려버렸다. 스트레스 받네. 아. 건강해져야 가족들 눈치 안 보고 돌아다닐 수 있는데. 한참 저택을 향해 달리다 마부쪽 창을 열어젖혔다.
"상점가로 가자. 이 꼴로 집에 돌아갔다가는 파티가 시작되기도 전에 어머니가 쓰러지시겠어."
오랜만에 돈 좀 쓰고 돌아다니면 안심하시겠지. 아. 다시는 살롱따위 가나 봐라. 내가 돈이 없어, 신분이 미천해? 파티도 아닌데 차려입고 여자들 사이에 서서 선택을 기다릴 수준은 아니다. 그저 돌아다니다 얼굴 곱고 능력 좋은 사람 하나 낚아채 내 힘으로 작위라도 사주면 될 일이다. 그러니 다시는 살롱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말자. 내가 또 드나들면 황자랑 연회에서 춤을 춘다.
하틴 기사단이 제국 내 기사단 중 제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보통은 그게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훈련량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것은 106기 동지들도 마찬가지다. 기사단에 합격할 정도면 기본은 되어 있다는 이야기니 이제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구타인지, 대련인지 모를 훈련을 받고있자니 아주 죽을맛일 거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선배님들을 보고있자니 지난 내전이 떠올라 추억에 잠길 정도지만 동기들은 온몸을 목검으로 두들겨맞으며 바닥을 뒹군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마법사 주제에 최전방에서 주먹질도 하고...
"알버트 리클렌. 훈련이 쉽나?"
"아닙니다!"
"딴생각도 하고, 할 만 한가본데."
선배님들의 말에 동기들이 험악한 눈으로 노려본다. 아냐. 절대 아니야. 힘들어. 노골적으로 헉헉대며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그런데도 목검들이 죽어라 쫓아온다. 아닌 척 하자고 얻어맞아 멍 들기는 싫으니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피하다 벌떡 일어났다.
"할 수 있습니다!"
"이놈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막 기어오르네."
"아닙니다!"
그러지 마세요. 저는 연약한 신입이구요, 단장의 종자로 들어왔어요. 아직 보직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건가요. 저는 아직 명목상 기사도 아닌데요.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니 선배님들이 얼굴을 찌푸린다.
"잘 한대도 아니래."
"저... 차라리 단장님 보좌하러 갈게요. 그냥 보내주세요."
"선배님들을 젖히고 상급기사가 되겠다고?"
열심히 갈구던 105기 선배님들 뒤에 서계시던 100기 선배님들이 재미있어 죽겠다며 웃는다. 좀 웃지 말았으면... 그냥 때려치고 서부로 갈까... 서부 산악지대 수비대로 갈까...
"오메르드 경. 저쪽에서 단장님이 보고계세요."
에들턴, 고마워!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감동에 젖은 얼굴로 피뇨르 남작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정복 안주머니에 넣어둔 사직서가 보고싶다.
"오메르드 만큼 못 따라온다고 질투하거나 하지는 마라. 너희들도 잘 하고 있다. 저놈이 오메르드 인 걸 어쩌겠어. 출발선이 다른데. 사실상 너희들이 정기사가 될 유력후보들이다."
잠깐. 왜 너희들에 나는 빠져있지요? 손을 번쩍 들었지만 무시당했다.
"훈련 결과는 착실하게 기록되고 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짓만 하지 않는다면 당연하게 발탁되겠지. 원래대로라면 알려주면 안 되지만, 저 괴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말해주는거다."
"잠깐만요, 선배님. 알렉스 선배님. 저는 왜 승진대상이 아니지요? 그건 둘째치고 수습기사도 아니고 종자로 들어왔는데 내가 왜 같이 훈련을 하고 있는거지?"
선배님은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어째서일까. 왜지.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데 뒤에서 너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메르드. 여기서 뭐 하고 있나?"
"리클렌 공자님?"
"상급기사가 수련생들이랑 놀면 재미있나? 따라와."
잠깐만요. 내가 상급기사라니요. 저 분명히 종자로 들어왔는...데... 그러고보니... 내가 본 그 많은 서류들의 기밀등급이... 갑자기 뒷목이 막 당긴다. 내가 왜 상급기사로 들어왔나. 내 나이가 몇인데. 내 실력을 어떻게 믿고.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가며 동기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살려줘. 난 싫어! 아무도 잡는 시늉조차 않는구나.
"안녕 여러분. 나는 지옥으로 갑니다..."
"오메르드 경! 돌아와야 해요!"
에들턴만 그렇게 슬플 수가 없는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고마워 에들턴. 내가 돌아온다면 너는 꼭 챙겨줄게. 죽을 때까지 챙겨줄게. 그렇게 끌려간 곳에는 그렇게 보고싶던 사람이 서 있었다.
"메리!"
"알버트!"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갔다. 메리도 환하게 웃으면서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방금 전까지 훈련한 걸 보면 꿈은 아닌데.
"알버트. 꿈은 아닌데 실물도 아니야."
"뭐?"
"인형이야."
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야. 내팽개치고 뒤로 물러났다. 메리가 엄청 충격받은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벌떡 일어나 발길질을 해댄다. 아니, 하는 행동은 우리 메리가 맞는데.
"가족이 봐도 어색하지 않다면 모르는 사람은 정말 감쪽같이 속겠습니다."
"그래. 마법사들도 신경쓰지 않으면 별 것 아니라고 넘어갈 정도니까."
나를 둘러싸고 마법사들이 머리를 맞댄다. 이 미친 족속들이 대체 뭐라는거야. 그래서 저 메리가 진짜 메리라는 거야, 아니면 인형이라는거야? 머리 아파. 오메르드로 살면서 생각이란걸 너무 안 했나봐.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라는거야.
"바보야. 네 머리로는 고민해도 소용 없어."
"너 대체 누구야?"
"네 누나."
머리를 세게 후려치고 마법사들 무리로 쪼르르 달려갔다. 대체 뭐라는거야. 잘 기억도 안 나는 전생을 더듬어 마법사들의 대화를 열심히 훔쳐들었다. 빈센트 리클렌은 내가 미쳤나 싶은지 혀를 찼다. 안 미쳤어요. 나도 전생에 마법좀 썼다고.
"팔푼이가 노력 꽤나 했구나. 저주마법만 쏙 빼고 본질을 꿰뚫어보다니."
"아, 하하."
"그나저나, 저주마법으로 영혼을 복제해서 인형에 집어넣는다면 정말 큰 일이 일어나겠습니다."
"그래. 이번이야 별볼일 없는 마법사 나부랭이가 걸렸지만, 잘못해서 고위귀족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아주 큰일이 나겠어."
"나부랭이라뇨? 위대한 마법사 클로드 준의 제자인데."
"오냐."
"친구가 수도에 인형술사들이 횡횅한다고 하던데, 그게 다 저주인형은 아니겠지만 그중에 반만 되도 위험할거라구요. 대첵을 세워요 스승님."
"날 뭘로 보고. 네가 인형을 보낸 순간 딱 떠올랐다."
"오오, 역시 아르카나. 계획이 뭡니까?"
"크흠. 그건..."
아. 조금 더 들어야하는데 누가 나 건드렸냐. 고개를 팩 돌리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는데 내 눈앞에 보이는 건 피뇨르 남작님이다. 올리려던 손을 공손하게 내리고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훈련 할당량은 다 채운거지? 그럼 돌아가서..."
훈련 할당량? 전에 서류에서 본 적 있는데. 너무 오래되서 기억이 잘...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팽팽 돌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면 서류무덤에서 죽어야해. 차라리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훈련을 하고 말지. 기억해내라... 빅토리아 리클렌으로 살았던 인생에 빈센트 리클렌이 가끔 수도에 돌아왔던 기간을 기억해내! 그래! 빈센트 오라버니는! 아니지, 형님은! 1년에 두달씩 돌아와서 훈련을 받았다!
"아닙니다! 저 아직 한달밖에 못 채웠습니다! 아직 한달 더 훈련해야 합니다!"
"그런가... 자네가 그립구먼. 칼질만 잘 해서 승진한 놈들이라 영 시원찮아. 그냥 다음으로 미루면 안되나?"
나한테 매달리면 어쩌라구요. 까라면 까야하니까 그냥 미뤄야 하나... 에들턴이 꼭 돌아오라고 했는데. 평민이라고 왕따당하지 않게 내가 잘 돌봐줘야하는데. 나도 빅토리아처럼 확 쓰러져버릴까. 그랬다가 심신미약으로 해고당하면 어떻게하지?
"안 됩니다. 단장이 되셔서. 모범을 보이셔야죠."
빈센트 리클렌님 감사합니다. 저 살아남으면 꼭 동부로 갈게요.거기서 평생이라도 살게!
"알겠네, 알겠어."
"그럼 저는 마저 훈련하러..."
"잠깐만! 알버트!"
불러놓고 방치하더니 왜 이제와서 매달려. 내가 진짜 동생이니까 참지, 남이였으면 별써 돌아갔다.
"어머니께 연락 못해서 죄송하다고 전해줘. 요즘 수용소에서 지냈거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빅토리아한테 답장 일부러 안 한거 아니니까 제발 용서해달라고도... 전해줘..."
리클렌가의 두 남자를 보며 말꼬리를 흐리더니 갑자기 줄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며 들어올렸는데 평범한 인형처럼 돌아와있었다. 아 뭐야. 말좀 하고 마법을 풀던가 해라. 정말 심장 떨어지겠네.
"인형은 내가 보관한다. 제자놈이 가끔 이거로 연락할 것 같거든."
"네. 대신 각 학파장님들께도 말씀드려놓겠습니다."
"그러던지. 아, 마르셀 남작. 아무래도 귀족들을 이용해서..."
너무해 메리. 폭탄 던져놓고 도망치는 게 어디있어. 티모시 리클렌이랑 빈센트 리클렌을 내가 어떻게 감당하라고. 빈센트 리클렌이 한걸음 다가왔다. 죽을지도 몰라. 얼른 뒤돌아서서 꾸벅 인사하고 훈련장으로 도망쳤다. 둘째 리클렌이 내 이름을 불렀지만 못들은 체 하고 도망치기로 했다. 저 둘이 들었으니까 나는 알려주러 안 가도 되지 않을까? 그랬다가는 직접 안 알려줬다고 더 난리나겠지. 싫다. 내가 메리 하고 싶다.
부리나케 뛰어가보니 선배님들과 동기들은 시원한 그늘에 앉아서 내가 오는걸 구경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자세를 바로잡는다. 뭐야. 내가 아무리 저기서 제일 등급이 높기는 해도 후배인데...
"선배님! 돌아왔습니다!"
"알버트 오메르드."
아 왜 여기까지 쫓아와요. 당신 동부 수비대로 빠졌잖아요. 하틴 기사단은 외부인 출입 금지 아니였나. 문지기는 뭐하고 있나. 침을 꿀꺽 삼키며 각오하고 몸을 돌렸다.
"네, 리클렌 경."
"오메르드가 왜 자꾸 내 동생한테 달라붙을까. 특히 네 누이. 메리 오메르드가."
시비도 한두번이여야 참지, 가문 때문에 자꾸 이러면 곤란하다는걸 왜 다들 모를까. 내가 오메르드 자작가 역사상 가장 인내심 깊은 후손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다. 벌써 마음속으로는 칼을 뽑아도 스무번은 더 뽑았다. 물론 뽑아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텐데. 빅토리아가 우리한테 자꾸 연락하는거라고. 오메르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애에게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말해요. 우리는 어차피 상관 없으니까. 아마 아쉬운 건 댁 동생이겠고요. 자꾸 한 말 또 하고, 또 하지 마요. 아시잖아요? 오메르드. 그럼 수고하고요."
다음에 한번만 더 그래봐라. 체면이고 뭐고 신경 안 쓰고 뒤엎어버린다. 쿵쿵거리며 그늘로 들어가 철푸덕 앉으니 모두 슬금슬금 피한다. 피하던가. 원래 드러워서 피하는 오메르드니까. 그와중에 분위기 파악이 좀 늦는 리스 에들턴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왜요. 에들턴 경."
"속여서 미안해요. 사실 경 빼고든 다들 알고있었어요."
"배신자들."
"미안해요. 선배님들이 시키셔서..."
"괜찮아요."
선배들이 까라는데 까야지. 버텼다가는 파트론으로 가버릴지도 모르잖아요. 잘 했네. 이렇게 보니 참 귀족이 아니라 그런지 가끔 규칙이나 관습에 헤매기는 하는데 참 착하고 순진하네. 원래 이바닥은 서로 속이고 속이는 세상인데. 그냥 두면 누구한테 속아 알거지로 쫓겨나게 생겼다.
"그럼 용서해주는거죠?"
헉. 지난 여성으로서의 삶이 내 영혼 지분 비율이 너무 커서 설렜다. 뭐 어때. 착하고 잘생겼고 능력좋고 내 이상형이네.
"당연하지요. 에들턴 경은 사과했잖아요."
사과 안한 너네들은 얄짤없다. 눈길도 안 주고 무시하니 헛기침만 열심히 한다. 그렇게 뻣뻣해서 곧 내전 터지면 목숨줄이나 잘 붙잡을지 모르겠네. 제이슨 고트는 몰라도 레오 디쳇이랑 칼 피뇨르는 무조건 살려야하는데. 디쳇 후작이 죽으면 빅토리아가 날 죽일거고, 칼 피뇨르가 죽으면 단장님이 날 죽일거다.
"상급 기사가 되면 밑에 부하를 들일 수 있다던데."
내 말에 칼 피뇨르가 벌떡 일어났다.
"미안했습니다 오메르드 경."
"아뇨. 경은 단장님 때문에라도 절대 말 못했을테니까요."
내 말에 다시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돌린다. 당신 아버지가 막나가는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나머지는 자존심이 있어서 사과는 못 할거다. 제이슨 고트는 나같은 거지한테 사과할 생각은 전혀 안할테고, 디쳇 후작은 나이 차도 심한데다 체면이 있지 아직 작위도 못 받은 나한테 사과 절대 안 할거다. 내가 작위를 받아버리면 메리의 입지가 불안해져서 최대한 미루려고 하는데 이럴 때마다 정말 짜증난다.
"훈련 끝나면 정식 편성 해주시겠죠?"
"4월에 정기 개편이 있어요. 신입 기사들은 대부분 평가결과로 나눈다던데, 경은 직접 고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좋겠는데 말이죠. 기왕이면 편한 사람들이랑 같이 일하는게 좋으니까요."
리스 에들턴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저는 누구든 좋으니 평민이라고 따돌리지만 않았으면..."
아직 정식 기사가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평민이라고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실력도 사실상 1등에 가까우니 정식으로 채용된 후에 어떨 지는 눈치없는 그라도 빤히 보이는 모양이다. 불쌍한 리스 에들턴. 내가 만약에 저 사람의 인생을 살았다면 벌써 파트론으로 도망쳤다.
"에들턴 경. 앞으로는 편히 부르세요."
"네에? 네! 그럼 저도 편하게 불러주세요!"
귀엽다 정말로.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어. 검을 꾹 쥐고 가까스로 참아냈다. 휴. 정말 위험했다. 떼로 몰려오는 동기들이 보인다. 이제 끝없는 레이스가 끝난 모양이지. 당분간은 북적이겠다. 그러면 저기서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는 단장님의 시선도 좀 나아지겠지. 그만큼 레오 디쳇이 날 노골적으로 쳐다볼 것 같지만. 나한테 뭐 불만 있는건가.
"디쳇 경. 하실 말씀이라도?"
"아닙니다."
아닌것 같은데. 할 말 엄청 많은 것 같은데. 서둘러서 물어볼 필요는 없지. 아직 황가와 접촉도 하지 않았고, 내전도 터지지 않았으니.
"이제 당분간은 군중 속에서 전투하는 훈련을 할 것 같죠?"
"이 훈련에서 서로 호흡이 잘 맞는 사람끼리 편성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해요."
칼 피뇨르는 이름값 했다. 나름 훈련생이 알기 힘든 정보도 가지고 있고. 그런데 지금까지는 이런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입 딱 다물고 있었단말이지. 뭐 좋아. 지금부터라도 잘보이겠다는 것으로 알겠어. 은근슬쩍 옆에 붙어서 친한 척 해도 봐주지.
"그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랑 협공해봐야겠네요."
"안돼요! 가지마세요!"
"아니 그래도 피하면서 움직이다보면 어쩔수 없이 멀어지게 되는데..."
"제가 등 뒤 확실하게 지켜줄테니까 제발 가지 마세요..."
"그렇게까지 부탁한다면..."
네 말대로 할테니까 제발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줘. 죄책감이 마구마구 쌓이고 있다고요. 차마 외면할 수가 없다. 한다고. 할게요. 대답하고 나서야 빙긋 웃으면서 손을 내미는데 아주 악마다. 요물이 따로 없다.
"잘 부탁해요. 알버트 경."
"네... 리스 경."
벅찬 얼굴로 손을 열심히 흔들어댄다. 아 귀엽다. 가까스로 손을 떼냈다. 아. 당분간 손 씻지 말까. 그래. 씻지 말자. 라고 생각한 순간에 감히 어떤 망할 놈이 손을 잡았다.
"제이슨 고트입니다."
아... 진짜 빅토리아 부탁만 아니었으면 바로 손목을 날려버렸을텐데. 요새 네 누이가 빅토리아랑 사이가 좋으니까 그걸 봐서라도 참는다. 절대로 고트 공작가 자금력에 고개숙인 건 아니다. 절대로.
내전에서 살아남으려면 드림팀을 꾸려야한다. 내가 올 해 안에 간부급까지 올라갈 자신이 없으니 적어도 발목은 잡지 않을 사람들로 골라서 같은 조가 되어야지. 내가 종자인 줄 알았을 때는 단장님 옆에 딱 달라붙어있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상급기사라니 이거 영락없이 전장에서 굴러야 판이다. 메리도 없는 전쟁에 무슨 낙으로 칼을 휘두르나.
"대체 내 뭘 믿고 상급기사로 채용하셨는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말이죠."
"경이 오메르드여서 그런겁니다. 오메르드는 대대로 수련기사따위는 해본 적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어머니께서는 그런 건 잘 모르시니."
대체 우리 집안 뭐 하는 사람들이지. 운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고, 성격 이상한 것 말고 또 뭐 있다는 건가. 나보다 디쳇 후작이 우리 집안을 더 잘 아네. 모른다고 삶이 불편하지는 않겠지. 내가 저쪽에 매달리는 것 처럼 보이면 곤란하니까. 궁금해 죽을 것 같아도 참자. 정 못참겠으면 영지에 들러서 집사한테 물어봐야지.
"꾸물거리지 말고 대열 맞춰 서!"
만만한 에들턴 두고 왜 내 등을 걷어차지요? 진짜 어이가 없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다같이 햇볕 아래 나가 줄을 맞춰 섰다. 105기 선배님들은 공손한 얼굴로 100기 선배님들을 쳐다보셨다.
"올해도 쓸모없는 놈들이 많이도 합격했네. 여기서 최대한 걸러낼것이다. 자신없는 겁쟁이나 실력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면 자진사퇴하고 돌아가도록."
그렇게 협박한다고 누가 포기할까. 다들 작위 계승과는 멀리 떨어져서 이 길 말고는 답이 없는 사람들인데. 대선배님은 한숨을 푹푹 쉬면서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단상 뒤로 풀쩍 뛰어내려 사라졌다.
"그럼 얘들아. 막내들 교육좀 시켜라."
하늘같은 대선배님 가시는 길에 인사까지 올리고 선배님들은 목검을 하나씩 들고 우리 앞에 마주섰다. 그리고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멍하니 서있던 맨 앞줄 동기들이 무참히 두들겨맞는 광경을 보다 나도 검을 들었다. 저렇게 얻어맞지는 말아야지. 상급기사 체면이 있지.
"알버트 경. 제가 뒤는 확실하게 지켜드릴게요."
"리스 경만 믿을게요."
고개를 끄덕이더니 훈련할 때처럼 집중하는 눈빛으로 돌변했다. 앞서 뛰어나가서 머리를 감싸기 급급한 동기를 구해주며 검을 쳐낸다. 저기. 지켜준댔잖아요. 내가 지켜야하게 생겼다. 얼른 쫓아가서 에들턴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드림팀이고 뭐고 일단은 시험이나 열심히 치러야지.
"디쳇 후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라하라."
어마마마를 닮은 연한 갈색 머리칼이 바로 눈에 띤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장례식 때였으니 벌써 십 오년이나 지났다. 레오 디쳇은 그날 이후로 한번도 영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수도가 싫을 법도 했다. 고모였던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던 후작부부는 영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모든 친지가 비명횡사한 이 땅에 다시 돌아올줄이야. 적어도 내란이 일어난 후에야 올 줄 알았다.
"고개를 드세요."
하나 남은 내 사촌은 벅찬 눈빛을 숨기지도 않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게 뭘 기대하는지 너무 잘 알기에 민망할 정도다.
"오랜만입니다 디쳇 후작."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전하. 불충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아닙니다. 상심했을 그대를 보살피지 못한 황실의 책임도 있지요."
아바마마도, 나도 어마마마를 잃은 충격에 디쳇 가의 비극은 신경쓰지 못했다. 몇번이고 반복된 일이었지만 늘 감정을 추스리기 힘들었다. 기억속의 앳된 레오 디쳇은 여리고 상처투성이였지만 돌아온 그는 몰라보게 달랐다. 세월이 그를 이렇게 만들어줬겠지.
"아직도 기억합니다. 모후께서 그대를 귀히 여기셨지요.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과하지 않은 선에서 뭐든 들어줄테니."
"무엇이든이라면..."
"황위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무어라도 못 해드릴까요?"
그는 한 맺힌 듯 피를 토하는 것 처럼 말했다.
"황위에 올라주십시오. 그리고 꼭 황후 폐하의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겨우 그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만났습니까?"
당연한 이야기다. 나는 단 하나뿐인 알란타 제국의 후계자고, 반드시 황위에 오른다. 그리고 복수한다. 내 확신에 찬 대답에 그는 만족한 것 같다. 그의 목표는 그게 끝이 아닌 것 같지만.
"전하께서 가장 고귀한 자리에 오르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는 허수아비나 하라는 이야기를 고상하게 돌려서 말하는 건 아니다. 숙청을 제 손으로 하겠다는 이야기다. 외척으로서 해야하는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되고나면 디쳇은 영영 사라지겠지. 그렇게 두기에는 돌아가신 어마마마께 죄송하다. 일단은 내가 아무런 권력이 없으니 멋대로 생각하게 내버려둬야겠지만 조만간 바로잡아야한다. 어떻게 내 주위에 수족이 될 사람중에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들까.
"일단 그대는 자리부터 잡으세요. 그 상태로는 쓸 곳도 없습니다."
답답할 노릇이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알량한 작위 하나 믿고 이곳까지 걸어들어오다니. 돌아가는 길에 어디서 칼 맞고 죽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레오 디쳇이 나가고 한참동안 서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디쳇 후작 부부의 죽음은 과연 병사인가.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조사가 어려웠다.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마법사도 없던 황녀가 얼마나 할 수 있었을까. 귀에 흘러들어온 근거없는 소문들을 하나둘 모았을 뿐이다. 그들의 죽음이 황실 때문이 아니라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동생의 죽음이 슬프다 해도 그때문에 앓아누울 건장한 성인은 많지 않다.지금껏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있던 그가 눈치챘을까.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다.
이 용의주도한 반역도당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손발이 제 몸을 미끼로 던지는 것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는 것은 각오한 것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곧 리클렌 가의 파티 시간이다. 티모시 리클렌의 빈 자리가 오늘따라 더 크게 느껴진다.
"어서오세요, 후작."
"초대 감사합니다. 부인."
"아니예요. 우리 리클렌과 디쳇은 예로부터 돈독한 사이였답니다."
어머니. 처음 듣는 말입니다. 후작부인으로 산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셨다는 것은 잘 알겠어요. 디쳇 일가가 그렇게 된 건 안타깝지만 아들이 모자라서 영치에 박혀있다고 혀를 차던게 얼마 전인데 말이지요.
"클라렌스. 나는 절대로 저렇게는 못 할것 같아."
"아니요 아가씨. 아가씨는 마님 소생이 확실하셔서 분명 하실 수 있어요. 지금도 잘 하고 계세요."
"혼나."
나는 권력을 등에 업고 언제나 솔직한게 매력이라고 생각해. 영애들 사이로 들어가자니 나에게 과도한 관심을 주는 줄리에타가 무섭고, 그렇다고 혼자 있으려니 도끼눈을 하고 쳐다볼 어머니가 무섭다. 오라버니는 어디에 계시나. 얼른 춤이나 추고 몰래 숨어있고 싶은데. 내 나이도 나이인지라 또래들 사이에서 수다떠는 건 너무 지친다. 모처럼 편하게 있으려니 눈앞에 생각도 못한 사람이 서있다. 아니, 왜 눈앞에 옥사나가 있을까.
"안녕하세요. 그레트헨 백작님."
"아, 안녕. 네가 메리의 친구?"
"네. 빅토리아 리클렌입니다. 우리 메리가 마탑에 신세를 지고 있어요."
"신세는 무슨. 네 후원금 덕분에 길드도 조금은 숨통이 트였단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예요."
내가 통 크게 쓰긴 했지. 어지간히 먹였다가는 가서 배우라는 마법은 못 배우고 구박만 당할까봐 신경써서 먹였으니까. 돈 먹은 사람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뿌듯해져 절로 웃음꽃이 핀다. 아무리 귀족이라는 것들이 무늬만 귀족이라는 파트론이라지만 나름 백작인 사람이 무례할 정도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마주하지 못할 것도 없어 태연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아가씨. 재능이 있어보이는데 마법 배워볼래?"
그게 무슨 소리람. 내가 재능이 없는 건 태어난 순간부터 알고있었는데.
"오라버니께서는 백작님과 전혀 다르게 알고있었는데요."
"티모시가? 그럴리가 없는데."
지금까지 마법사로서 자질을 보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혹시 늦게 재능을 깨우치는 경우도 있는건가? 하지만 생각으로 끝내야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티모시 오라버니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옥사나님. 막내에게 괜한 바람을 불어넣지 마세요. 지금 모습만 봐서는 전혀 모르시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말괄량이였습니다. 안그래도 종횡무진하는데 날개까지 달아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흐응. 너와 둘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상상이 안 되는걸."
"이해하셨지요?"
어쩐지 조금 상처받는 기분이다. 말괄량이이기는 했지만 그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라버니는 샐리가 애써 꾸며준 머리를 쓰다듬고는 옥사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사라져버렸다. 오라버니도 참 윗사람들 때문에 많이 힘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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