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보다. 멍청이다. 구제불능이다. 전생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못했고, 이번 생에는 마법 말고는 머리도 못 굴리는 멍청이다. 내 앞에 서서 금방이라도 내 목을 칠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친애하는 빅토리아 리클렌 양이시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왜 사니? 아니 왜 환생했니? 너는 쓸모가 없다. 그냥 죽어라!" 따위의 막말을 쏟아내고 계신 리클렌 영애를 보고있자니 점점 더 작아진다. 그러니까 내 아주, 아주 작은 실수이자 엄청난 변화는 다섯달 전, 위대하신 우리의 지도자 빅토리아 리클렌 님께서 나를 친히 아르카나 학파에 꽂아준 날부터 시작됐다.
마법사 길드가 다 그렇듯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아 사방이 먼지 투성이에 사람이라곤 프론트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당직 마법사가 전부다. 손가락을 튕겨 정전기를 일으켰더니 눈을 번쩍 뜨고는 나를 노려봤다.
"뭐야."
"오늘 길드에 가입하기로 했는데요."
"메리 오메르드?"
고개를 끄덕이면서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어쩐지 어디선가 한번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알 듯한데 생각이 안 나네.
"여기에서는 바깥의 신분은 소용 없다. 어차피 흔적만 남은 가문이어도 꼴에 귀족이라고 유세 불었다가는 바로 쫓겨날 거다."
협박하는건가. 감히 리클렌 가문을 등에 업은 나를 협박하나!
"그러는 당신은 누구세요?"
남자가 히죽 웃었다. 아주 불안한 얼굴이다. 단어 선택을 잘못했구나! 아주, 아주 망한 것 같은 기분이 넘실거린다.
"클로드 준. 네 스승이 될 사람이다."
오 세상에. 빅토리아. 꽂아도 너무 심하게 꽂았잖아. 사랑해! 정말 사랑해 빅토리아! 라고 생각한 지 십분만에 내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의 서재에는 마법 연구서도 정말정말 많고, 신기한 물건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지만 그보다 많은 것이 있었다.
"제자야. 나는 이제 중거리 대응 파괴마법만 파는게 질렸다. 이제 내가 개척해야 하는 분야는 초장거리 요격 마법이야. 그러려면 마법진의 힘을 빌려야지. 물론 나같은 천재는 필요 없지만 너같은 범재들을 위해서 최적화라는게 필요해."
"그러니까, 스승님. 지금 하시려는 말씀이..."
"너는 오늘부터 나랑 같이 옥사나 학파 마법에 대해 공부하는거다."
"미친!"
당장 뛰쳐나가 아무 문이나 열고 뛰어들어갔더니 넓은 연구실에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다. 개중에 좀 나아보이는 것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매다 책상 앞에서 머리를 박고 있는 사람을 붙잡았다. 이 인간도 아르카나 학파겠지. 제발. 저 미친 또라이만 아니라면 누구든 괜찮아. 내가 여기에 왜 왔는데? 내가 마법진 배우자고 온 줄 알아? 안해! 안해!
"저기요. 저 제자로 좀 받아주세요. 저 이래봬도 구현화계까지 쓸 수 있는데."
"나는... 마법진도 못 쓰는... 쓰레기야..."
아. 그런가.전부 동원하고도 만족을 못해서 나같은 작고 연약한 신입까지 갈아넣으려고 하는 건가. 나는 내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행히도 양심은 있었는지 마법진만 가르치지는 않고, 오히려 실생활에 쓸 만한 것들 위주로 가르쳤다. 그리고 그때 빨리 도망쳐야 했다. 통신마법과 순간이동을 마스터한 순간부터 지금까지는 그냥 쥐어짠거고 진짜 갈아넣는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그런 것 내가 직접 체험하고싶지 않았어. 오메르드가 다 무너져가도 나는 나름 영애로 자랐는데. 이런 수모는 처음이야. 언젠가 꼭 내 이름 뒤에 아르카나를 붙이고 복수할테다.
"야. 팔푼이."
"왜요."
"이거 언데드 격리실로 보내라."
언데드 격리실. 그것은 내가 학파에 들어온 첫날에 만난 시체들을 가둬놓은 수용소다. 우리는 모두 감옥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유일하게 심부름을 한다고 해서 모범수라고 불린다. 거기서 절대로 못나오는 학파의 미래이자 동량인 선배들은 무기징역수라고 불린다. 그들은 이 연구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절대로. 그래도 다행이다. 오늘내일이면 끝이 날 것 같으니까. 거기에 가면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햇빛을 제대로 못 봐서 안색도 안 좋고 무엇보다 나한테 죽여달라고 하는게 너무 무서워. 죽여달라는 뜻은 기절마법을 써달라는거다. 친절하게 저 안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위해 정신을 또랑또랑하게 유지하는 마법진을 설치해놓은 악독한 스승같으니. 직접 가기는 차마 무서우니까 살아있는 것만 빼면 뭐든지 보낼수 있는 만능마법 부엉부엉으로 보내고 멍하니 앉아있으려니 이세상에서 제일 악독한 인간이 또 부른다.
"오메르드."
"네, 스승님!"
"내 취미가 통계인건 알지?"
알다마다요. 당신은 아르타나가 아니라 크로노스로 가야했어.
"내가 지금까지 수도에서 마법 통계를 계산했었는데 얼마전에야 니가 비등록 마법사 주제에 구현계까지 사용한 바람에 내 통계가 다 쓰레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건 내 탓이 아닌데."
"그래서 주제를 바꿔서 어디에서 어느 마법이 쓰였는지 전부 파악을 하기로 했다. 너때문에 흥이 깨졌으니 네가 오늘 안에 끝내."
아르카나 학파가 이런 귀찮은 짓을 왜 하는것인가. 내가 크로노스 학파에 들어간 것 같다. 이 인간 아르카나인 척 하는 크로노스 아니야? 아닌데. 분명히 위대하신 우리들의 지도자 빅토리아 리클렌님께서 아르카나 학파에 꽂아주셨는데? 때려칠까 싶다가도 가끔씩 던져주는 비법이 너무 훌륭해서 그럴수도 없다. 저 인간은 아마 지금 준비중인 논문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한테 제대로 가르쳐 줄 생각이 없을 거야. 그 전에 내가 어떻게든 뜯어먹어야...
귀족들은 누구나 잘난체를 하고싶어 하니까 마법을 배우면 겨우 상상계까지밖에 못 써도 마법사 등록을 하신다. 그러니 일단 등록 마법사들이 몰린 귀족 주거지역을 중점으로 정리하고 차츰 외곽으로 훑었다. 생각보다 비 등록 마법사들이 많지 않아서 얼른 스승한테 던져주고 나는 서재에서 숨쳐온 '가장 확실하게 파괴하는 방법(상)-하틴 106년 개정판, 클로드 준 아르카나 지음'에 코를 박았다. 나쁜 스승. 책은 쓸 시간이 있고 제자 가르칠 시간은 없지. 마법 딱 하나를 배우고 스승의 서재에 시험삼아 한발 날려보려는데 뒤쪽에서 짹짹이 마법이 날아왔다.
아 짹짹이마법! 엿먹이고 싶은 사람한테 어그로 끌고 도망치기 딱 좋은 마법이다! 그게 나한테만 오지 않는다면. 열어보지 않으면 마법의 효력이 다 할 때까지 짹짹짹거리다가 사라지지만 유감스럽게도 스승님이 보낸 짹짹이니 열어봐야만 했다.
<야! 너 당장 올라와! 당장!>
아 또 왜? 진짜 가지가지로 귀찮게 구네. 왼손을 머리높이로 들어 손을 한번 쥐었다 펴자 스승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째 다른 학파 수장들이 있는게... 내가 뭔가 큰 사고를 친 건가?
"메리 오메르드. 자료 자체에는 단 한번도 손 댄 적 없는거지?"
"네. 그런데요."
옥사나 학파 수장의 손짓 한번에 지도가 입체모형처럼 튀어나왔다. 그리고 빈민가 끄트머리에 둥둥 떠 있는 보라색 표식을 보고 헛숨을 들이마셨다. 나 같은 애송이 마법사한테는 신경도 안 쓰고 저들끼리 열심히 머리를 마주대고 있는 틈을 타 얼른 밖으로 도망나왔다. 죽었다. 난 이제 큰일났다. 얼른 짹짹이를 불러서 귓가에 대고 빌었다.
"미안해 빅토리아. 내가 아무생각 없이 마법 통계를 냈어. 진짜 내가 죽을까? 그럴까? 짹짹이 한마리 붙여서 보낼게 답장줘."
정말로 저 자료 끌어안고 내가 죽어야 할것 같아. 안그러면 우리 또 죽을것 같은데 한바퀴 돌아서 빅토리아면 다음은 나 아닐까? 우리 집안으로는 답 없는데. 다 죽일까? 내가 저 인간들 다 죽일 수 있을까? 말도 안돼지. 난 스승한테 개기지도 못하는데. 그냥 내가 죽어버리는게 모두에게 이로울것 같아. 미안하다 알버트 누나 먼저 간다...
요새 사교계 동향이 바뀌었다. 고트 영애는 남성용 망토를 입고 온 나의 파격적인 행보에 충격을 먹고는 새로운 패션을 찾아낼 때까지 파티에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고, 덕분에 나는 혼자서 내 세상을 즐기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오라버니 망토좀 입고 온 게 어떻다고. 그보다 우리 어머니 드레스는 신경도 안 쓴거니? 그 뒤로도 나는 신경쓰지 않고 작은 오라버니의 마법사 망토도 훔쳐입고, 아버지의 정복 망토도 훔쳐입고 다녔다. 내가 미친짓을 할 수록 사람들은 더 나한테 다가왔다. 원래도 좀 미친 것 같았는데 본격적으로 미쳤으니 재미있을테다. 내 미친짓에도 끝까지 눈길 한 번 안 주는 매정한 남자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차노트 공자다. 대단한 사람. 내가 포도주를 끼얹고, 눈앞에서 구두 굽을 부러트려도 눈 깜짝 안하고 버려두고 가다니. 그래도 나의 희망 나의 빛 에스메랄다를 위해 꼭 포섭해야 하는 사람이다. 황가에서 독립해나간 지 벌써 수십 해나 지났어도 차노트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어린 여자아이가 대뜸 차노트 대공을 만나고 싶다고 달려들 수도 없는데 대공이 자식을 너무 잘 키워서 내 앞길에 방해가 된다. 요새 수도 분위기도 흉흉하니 작손이 예상보다 빨리 뒤엎을 것 같아 불안하다. 황자의 탄신연회라고 좋아하지도 않는 연회에 친히 내려오신 에스메랄다님이 나한테 열렬한 눈빛을 보내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정말. 그래. 내가 언제부터 체면 차리고 그랬다고. 여섯번 죽었는데 한번을 더 못 죽을까? 죽으면 지들 손해지 내 손해인가?
"차노트 공자. 또 뵙네요."
"네. 발목은 괜찮으셨나봅니다."
네. 아주 멀쩡해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너한테 수작걸러 왔지요. 참 답답한 사람이다. 이 사람도 아마 약혼자가 있을텐데, 그 약혼자 속 안터지는지 모르겠다.
"피뇨르 양과 첫 춤은 추셨으니 저랑 한 곡 추시겠어요?"
"네?"
당황해가지고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어버버거리는 걸 그냥 끌고 플로어로 나왔다. 줄리에타 피뇨르는 나의 열렬한 딸랑이로, 절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걔도 참 이상한 애지. 나같은 애 딸랑이를 해서 어디에 쓴다고.
이 눈치없는 남자가 뻣뻣하게 춤을 추든 말든 나는 경악하는 에스메랄다님을 무시하고 루이스 차노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래도 기사라고 놀라지 않고 제대로 마주보고 있다.
"차노트 경. 일전에 빌려가신 망토는 잘 쓰셨는지요?"
"아, 네. 최대한 세탁한다고 했는데 물이 들어버렸다고 합니다.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겠습니다."
"천천히 돌려주셔도 괜찮아요. 어머니께서 오라버니에게 새 망토를 선물해서 당분간은 안심이예요."
"그렇습니까."
다시 말을 걸기 힘들게 딱 잘라 대답하더니 다시는 말이 없었다. 오늘도 틀렸나. 말없이 플로어를 거의 돌았을 무렵에서야 그가 말을 걸어왔다.
"용건 있으면 말씀하세요."
"눈치채셨으면 말씀하시지."
"요새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했지요.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공을 뵙고싶어요."
루이스는 잠시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답을 내주었다.
"좋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판단은 전적으로 아버님의 몫입니다. 차노트의 기사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경은 미래의 차노트 대공일텐데요."
"그렇기는 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척 웃는게 조금 안쓰럽기도 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안하는 척 하는 삶도 편하진 않겠지. 서면으로 날짜를 알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제 약혼자에게로 돌아갔다. 환하게 웃으며 나한테 손을 흔드는 줄리에타 피뇨르를 무시하고 테라스에 들어가려는데 내 앞을 막고 선 익숙한 가슴팍에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빅토리아. 차노트 공자는 약혼자가 있단다. 원한다면 어떻게든 파혼시키고 이어주겠지만, 웬만하면 다른 사람을 찾았으면 좋겠구나."
"오라버니. 전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다른 영지로 떠날 수 없어요."
"비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티모시 오라버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바보같은 오라버니. 내가 겨우 차노트 따위한테 반했을까봐 걱정하다니. 왜 못떠나는지도 모르고.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나는 가족들을 사랑하고, 가족들도 나를 사랑한다. 오리버니의 뺨에 키스하고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몇십년을 사교계에서 종횡무진했지만 늘 어렵다. 특히 원하는 게 있을수록 더 어렵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고트 영애가 없는 틈을 타 샬롯 노먼이 제 세상으로 만들려 들테니 마음 편히 쉴 수도 없다. 저쪽에서 부채로 입을 가리고 나를 힐끗거리는 노먼의 딸랑이들을 지나쳐 한곳에 뭉쳐있는 영애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영애!"
"아, 미안해요. 내가 좀 바빠서."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영애들에게 호호 웃으며 손을 내저어주고 벽애 달라붙어서 어버버거리는 나의 행동대장 2호를 쳐다봤다.
"알버트 공자."
"아, 비키."
아, 오메르드 공자. 왜 갑자기 저를 애칭으로 부르시지요. 알버트의 대답에 영애들이 순식간에 사나워진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너, 그리고 너. 너. 다 기억했다. 다음 파티 즐거울거다.
"메리한테 연락 온 적 있어요? 요새 통 소식이 없네."
"그, 바쁘다나봐... 요."
대체 얼마나 바쁘길래 싸고 도는 알버트한테도 연락을 못 하지? 아니면 드디어 브라더 콤플렉스에서 탈출한건가.
"하긴. 아르카나의 제자로 들어갔으니 정신없을 법도 해요."
"응... 괜찮으면 나랑 한곡 출래...요?"
아니. 저 수줍고 힘들던 시절의 내가 나한테 춤 신청을 하다니. 내가 네 춤 실력을 다 아는데? 그래. 힘들게 왔는데 한곡도 안 추고 가면 너무 슬프겠지. 나라도 너랑 춰야 네가 안면이 서겠다.
"물론이지. 그리고 그냥 말은 편하게 하는 편이 좋겠네요."
알버트가 내민 손 위로 손을 얹었다. 플로어에 올라 첫 걸음을 내딛으려는데 우리 머리 위로 하얀 빛 한쌍이 빙빙 맴돌았다. 손을 뻗어 잡으니 우리가 애타게 찾던 목소리였다.
<미안해 빅토리아. 내가 아무생각 없이 마법 통계를 냈어. 진짜 내가 죽을까? 그럴까? 짹짹이 한마리 붙여서 보낼게 답장줘.>
작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멈추고 내 손 안의 새가 흩어지며 사라졌다. 숨이 턱 막히면서 온 몸의 피가 식는 것 같다. 내가 너를 왜 거기에 보냈는데. 어떻게 내 등에 칼을 꽂지? 믿은 적도 없지만 허탈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굳어버린 뇌를 쥐어짜내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보려 했지만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가까스로 알버트의 어깨를 잡고 서서 아직 날고있는 새를 잡아쥐었다.
"너. 딴짓 하지 말고. 그냥 하던 일 마저 해. 쫓겨나서 손목 잘리고 혀 잘려서 돌아오면 내 손에 죽는다. 정신 똑바로 차려."
"비키!"
"조용히 해. 지금 쟤 두둔할 때 아닌거 알잖아. 한마디만 더 하면 너도 같이 죽어. 아니 다같이 죽어."
너 무슨 상황인지 다 아는 상황에서 메리 편들면 정말로 죽는다. 오메르드 다 죽여버리고 죽은 다음에 다시 이번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 이번이 끝이라고 해도 살만큼 불행하게 살아봤으니 이제 그만 살아도 돼. 그러니까 그만 해. 화가 머리 끝까지 솟으니 눈앞이 핑 돌고 뒷목이 당긴다. 손을 떼고 돌아서려는데 눈앞이 새까맣게 물든다.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졌다. 누군가가 나를 받아냈다. 아마 알버트겠지. 하나도 고맙지 않으니까 내가 부를 때까지 내 근처에서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이런 말이 있다. 회개하고 새 삶을 살아보고자 했더니 세상이 날 돕지 않더라. 그게 딱 내 상황이다.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지. 내가 신께 죄라도 지었던가? 기네스님. 저는 맹세코 당신께 실수한 적 없어요. 그게 전생이라면 모르겠지만.
온몸이 무겁게 늘어진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지만 지난 밤, 아니지. 얼마나 기절해있었는지 모르니 그날 밤의 비보를 처리해야 해 억지로 일어났다. 벌어진 커튼 사이로 제법 선명한 빛이 새어드는 걸 보니 해가 중천에 뜬 모양이다. 괜히 흥분하는 바람에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 어찌한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초장부터 파투났으니 이제 수많은 차선책들에도 제약이 생길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일찌감치 내전을 일으키는 것이겠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엉뚱한 사람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아가씨! 얼마나 다들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몰라요."
부은 눈으로 내게 달려와 징징거리는 샐리의 손을 밀어냈다.
"샐리. 얼마나 지났니?"
"딱 이틀째예요."
이틀. 그래도 너무 오래 기절하지는 않았네. 이게 과연 메리 오메르드가 과도한 스트레스를 줘서 그런걸까. 아니면 코르셋과 운동부족 때문인가? 그러고보니 내 인생에 기절은 빅토리아와 에스메랄다 말고는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들을 빼고는 다들 어느정도 움직이고, 어느정도 먹는 사람들이지. 그래. 내가 잘못했다. 아무리 오랫동안 타인으로 지내 나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다지만, 화도 못 참을 정도로 연약한 몸일줄이야. 이래서는 복수고 뭐고 전부 소용 없겠네. 이제와서 마법이나 검을 배운다고 해도 부모님이 들어줄 리가 없으니. 이래저래 큰일이다. 내 목숨도 위험하고, 내 건강도 위험하다.
"아가씨. 대체 요새 무슨 일을 하고다니시는거예요. 얼굴이 반쪽이 되었어요. 빈센트 도련님이 아시면 제 목이 날아가요, 아가씨. 제발 좀 쉬세요."
얼마나 더 쉬라는거야. 지금 아주 열심히 쉬고 있는데.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샐리가 일어나 밝은 얼굴로 말했다.
"참! 마님을 모셔올테니 가만히 계세요."
너무한다. 이틀동안 누워있었는데 움직이지도 말라니. 내 결리는 어깨랑 배기는 등허리는 누가 책임지니. 얘. 네가 가면 내 허리는 누가 마사지해주니?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샐리의 정 반대편에 클라렌스가 앉아있었다. 아. 네가 있었지.
"클라렌스. 나 허리아파."
"아가씨. 저는 심부름꾼이예요."
"심부름꾼도 시녀야."
"아니요. 저는 아가씨가 잔심부름 하는데 쓰려고 특별히 들인 아가씨만의 특별한 파발꾼이예요."
그래. 마사지 하기 싫다는거지. 하지 마라. 하지 마. 내가 허리가 결리다 못해 끊어져서 죽어도 원망하기 없기다. 주먹으로 허리를 콩콩 두드리고 있으니 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 우리 착한 비키. 누가 이렇게 착한 널 힘들게 했니?"
아 어머니. 제가 착하면 작손은 프란님의 첫번째 주교여야해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못됐어요. 이유없이 다시 현기증이 느껴져 이마를 짚으니 어머니의 얼굴이 새하얘진다.
"아가. 대체 오메르드 공자가 너같이 착한 아이한테 뭐라고 했길래...."
"오메르드 공자는 상관 없어요. 그냥 조금 말도 안되는 소식을 들어서... 요새 초대장이 오는 대로 참석했더니 조금 피곤했나봐요."
내 말에 어머니는 내일이라도 곧 죽을 것 같은 환자를 보는 표졍으로 내 뺨을 쓰다듬으셨다.
"우리 비키. 그 건강하던 네가... 다 내가 부덕한 탓이야. 미안하구나. 미안해."
"아니예요. 그동안 옷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잖아요."
차마 유리세공품을 보는 것처럼 조심스러워하는 어머니와 눈을 맞추기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여성 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는 겨우 춤 연습이나 승마 뿐이다. 애초에 무가에서 자랐을 경우에는 취미로 무예를 닦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슬프게도 그런 거친 취미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운동... 운동을 해야겠어요. 코르셋도 벗고."
"그래. 그러자. 엄마네 아버지에게 부탁해 좋은 말을 내줄테니 승마라도 하려무나."
아 승마. 내가 열 살때 때려친 그것 말이지요. 그것마저 안 해서 내가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이 된건가. 갑자기 자괴감이 사무친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다. 그 와중에 다시 문이 열렸다.
"빅토리아. 알버트 오메르드가 너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느냐?"
아니야... 아니예요 아버지. 나는 그냥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부끄러워요. 그냥 혼자 있게 해주세요. 정말 우리 가족들 너무 상냥해서 내가 못 살겠다. 고마워서 눈물이 나는데, 창피해서 죽을 것 같다.
"아니요. 그냥 어지러워서 그랬어요. 운동을 조금 해야 할까봐요."
"가장 좋은 말로 내주마. 타고싶으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기사들이 도와줄게다."
"네..."
아니요. 그냥 저 혼자서 타도 괜찮아요. 기사 안 붙여주셔도 돼요. 저 말 잘 타요. 예전에. 내 기억으로는 한 40년 전에 메리 오메르드가 온 알란타를 말 한필 타고 종횡무진 하면서 반란군을 진압했거든요. 가까스로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비키. 오메르드 짓이냐?"
"아녜요!"
오라버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쳐다본다.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당신이 생각하는 그거 아니야!
"메리가 제 속을 뒤집는 말을 해서... 알버트는 오히려 걱정해줬어요."
대체 어떻게 오해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거지요? 대체 마법은 어떻게 배운 거야. 알버트가 오라버니 손에 죽게 내버려둘 수 없으니 예쁜 구석 하나도 없는 녀석이지만 일단 살려두자.
"메리? 아르카나의 오메르드?"
"네. 친구예요."
"웬만하면 오메르드와는 멀리하렴. 둘 다 활동적인 이들이라 네 몸만 상한단다."
"그래도... 저한테 먼저 다가와준 두번째 친구인걸요."
내가 먼저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고개를 들면 거짓말인걸 들켜버릴 것 같다. 푹 숙인채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티모시 오라버니는 내 손을 꼭 쥐고 말했다.
"네가 아프면 내가 빈센트에게 면목이 서질 않아. 내가 꼭 지켜주겠다고 약속해서 그곳에 보냈는데 그것 하나 지키지 못했다고 얼마나 화를 내겠니."
"됐다고 해요. 빈센트 오라버니는 거기서 평생 살라고 해요."
퉁명스럽게 대답했더니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 전환하려고 한 말 아닌데. 진심인데. 왜 내 안전을 오라버니들이 책임지지요? 나를 호위하는 건 리클렌 기사단의 기사분들이지 오라버니들은 아닌데. 매일 나한테 장난치는 재미로 사는 오라버니는 그냥 거기서 마음에 드는 영애 만나 눌러붙으면 좋겠다.
"네 안색을 보니 다음주 쯤에 잠시 돌아온다는 걸 알면 다시 쓰러질까 겁나는구나."
"빈센트 오라버니가 돌아와요?"
"그래. 프라우에 문제가 생겨서 말이다."
그러고보니 티모시 오라버니의 얼굴도 많이 수척하고 피부도 거칠어진 것이 마법사 길드가 벌써 황제에게 소식을 전했는지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나는 쓰러졌지, 길드에서는 금지마법의 흔적을 발견했다지. 쓰러지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 돕고 싶지만 내 선에서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이니 빨리 털고 일어나 걱정을 하나라도 덜어줄 수밖에 없네.
"국경 수비군을 불러올 정도면 심각한 문제인가봐요. 위험한 건 아니죠?"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티모시 오라버니는 물론이고 부모님까지도 미묘한 표정이다. 실수라도 했나? 오라버니는 나를 한번 끌어안고는 말없이 일어났다. 내가 걱정되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건가. 하긴. 빅토리아 리클렌은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지나치게 높아서 헛소문이 들리면 바로 쫓아가 따지고 오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이 사건을 무마시켜야 하는데. 그래야하는데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미루고 미뤄왔던 입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번에도 앓아누웠으니 꼬박 열흘은 누운 채로 지내야 할 터다. 뺨에 키스하고 떠나는 가족들을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고개를 돌렸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 마사지도 못하는 무능한 시녀지만 본인 말대로 심부름 하나는 재빨리 잘 하는 클라렌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클라렌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의지하고 있단다."
클라렌스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잘 할게요. 하고 입모양으로 연신 빌었다. 소용 없다 이 나쁜 계집애. 그 말을 듣고는 샐리가 토라져서 투정을 부린다.
"아가씨! 정말 속상해요. 지금까지 모셔온 저는요?"
"샐리. 나는 네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한다는것 알잖니."
물론 정작 네가 없으면 나는 클라렌스에게 전부 맡길거란다. 사실 클라렌스도 없으면 내가 스스로 할 수 있고 말이야. 감동한 눈치인 샐리에게 간단하게 먹을 거리를 가져오라고 시키고 이리 내오라고 손짓했더니 클라렌스가 앞치마 속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하얀 새를 꺼낸다. 나를 쓰러지게 만든 그 만악의 근원을 말이다.
"오메르드 영애의 소식을 가져온 새는 제가 받아뒀고요, 이 새는 분명히 황녀전하께 전할 말이 있을테니 그때 쓰래요."
"뭐라고 하든?"
"시대가 시대다보니 아직 누가 마법을 썼는지까지는 색출해내지 못한다고 해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실수인 척 자료를 섞어두었으니 시간은 조금 벌은 셈 쳐달라고 하셨어요."
"내가 분명히 쥐죽은 듯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원래부터 실수를 자주 해서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셨어요. 해봤자 영안실로 끌려내려가는 정도라고..."
영안실? 죽는다는건가? 감히 나한테 물을 먹여놓고 다른 사람한테 죽을 생각을 하다니. 꿈도 크네. 머리맡의 책을 집어들고 손짓하자 클라렌스가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마법으로 소식을 알리더라도 자세한 이야기를 하려면 직접 만나야한다. 황녀를 만나려면 적어도 2주 전에 알현신청을 해야 하니까 지금 신청해도 때를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충 구색만 맞춰 적고 클라렌스에게서 새를 빼앗아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질 않사옵니다. 실수한 것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타계책을 모색해봐야겠어요. 아마 제 마법이니 내 말을 듣고 있을테지. 이 말을 들었으면 반성하고 어떻게든 방법을 쥐어짜내지 않을까 싶어요. 나도 최대한 생각해보겠습니다. 대충 두가지 정도 떠오르기는 하는데... 하여튼 알현신청 받아주세요. 최대한 빨리."
잠자코 듣고 있던 새가 푸닥거리며 몸부림친다. 이 정도밖에 전하지 못하는건가. 새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주었다. 절대로 딴길로 새지 마라. 새의 귓가에 속삭이고 손을 놓았다. 클라렌스가 재빨리 창문을 열었다. 창틈으로 날아가는 새를 보고있자니 다시 두통이 몰려온다. 정말. 가족 말 안믿어서 좋을 것 하나 없다. 오라버니 말대로 오메르드는 문제가 많다.
내 알현신청은 유례없는 속도로 처리되었다. 덕분에 가족들이 원래 계획한 2주를 채우지도 못하고 궁에서 나온 마차를 타고 가야했다. 내가 돌아오면 편히 쉴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며 눈물을 머금고 저택에 남은 샐리가 흔드는 손을 뒤로하고 클라렌스와 함께 떠났다. 잔뜩 긴장해 동상처럼 앉은 클라렌스는 두고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차분히 고민했다. 내 죄는 아니지만 과거의 내가 저러고 사는 걸 보니 어쩐지 매우 부끄럽고, 미안해진다.
"아가씨. 황궁은 어떻게 생겼어요?"
"넌 연회에 가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니. 그냥 영지 본성이라고 생각해."
그냥 조금 심각하게 더 크고, 조금 심각하게 더 화려한 성일 뿐이다. 조금이 남다르긴 하다. 차창을 살짝 열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을 보여주자 창백해져서는 고개를 돌렸다. 하긴. 클라렌스로 살 때는 어릴 때부터 저자에서 뛰어다닌 기억 때문에 지난 세번의 귀족으로서의 삶은 잊어버리다시피 했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등이나 쓸어주는 수밖에.
"정 무서우면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게 더 무서워요!"
"그러니까 따라와. 이제 곧 도착해."
"네에..."
차창을 닫고 의자에 기댔다. 어차피 나는 황성의 구조를 꿰고 있지만 일단은 내부 구조를 비밀로 하고싶다 하시니 하자는 대로 따라드려야지. 바닥재의 틈을 바퀴가 지날 때마다 덜컹거리던 것마저 사라지고 부드럽게 얼마간 더 달리더니 마차가 멈춰섰다. 문이 열리고 에스메랄다의 사용인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어서오십시오. 황녀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클라렌스가 재빨리 마차에서 내려 나를 부축했다. 사용안아 앞서서 길을 안내했다. 이 복도를 다시 걷게 될 줄은 몰랐다. 에스메랄다로서, 그리고 나 자신으로서. 심지어 빅토리아로서까지도 오게 될 줄이야. 이곳에 한번 드나든 사람들은 밤마다 목을 깨끗이 씻고 자야 다음날에 그나마 볼만한 꼴로 발견된다. 오늘부터 나도 열심히 닦고 향수도 뿌려야 하는가... 착잡한 마음을 애써 다잡으려니 사용인이 멈춰섰다.
"전하. 리클렌 영애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라."
사용인이 문을 열었다. 정면에는 커다란 창에서 들어오는 햇볓 아래의 화려한 의자에 앉아있는 알란타의 빛이 보였다. 어째서 빛인가? 황녀를 종교와 결합시키면서까지 여자가 황제가 된다는 것이 싫은가? 그렇다면 어째서 2대 황제는 부정하지 않는 것인가. 황제가 에스메랄다에게 소피아라는 이름을 주고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퍼져있는데 감히. 그보다 더 발칙할 수가 없다.
"어서오거라."
에스메랄다가 손짓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사용인들이 빠져나간 후에야 문이 닫혔다. 뒤돌아 문을 확인하고 황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에스메랄다는 그 가는 팔에 힘줄이 비칠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정말... 할 말이 없어."
"나는 이럴 줄 알았다. 메리 오메르드가 망아지처럼 날뛰는 것이 하루이틀 일이었느냐. 괜찮다. 예로부터 오메르드가 얌전히 있겠다는 말은 믿지 말라 했다."
그런데 괜찮은 사람 얼굴 치고는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처럼 눈 밑이 거뭇해 몹시 송구스럽다.
"대책부터 이야기하자. 내 생각에는 메리를 없애는게 제일 빨라."
"네가 정신을 놓았구나. 그나마 쓸만한 패를 왜 버리느냐. 네가 그 자리를 채울 수 있겠느냐?"
내가 이 나이 먹고 마법을 배워야할까요. 싸늘한 눈빛을 맞받아치니 에스메랄다가 혀를 찼다.
"네가 그것을 아르카나에 집어넣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수습할 방법을 서너가지 마련해 두었다."
에스메랄다...! 역시 내 인생에 희망은 에스메랄다 뿐인거다. 수많은 삶 중에서 미래에 대비하는 인생을 몇번 겪지 못했는데... 역시 황태자로 내정된 황녀는 달라도 다르다. 이런 사람이 황제가 돼야 내 인생이 평화롭고, 우리 집안이 평화로울텐데.
"그중에 내가 직접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나, 그 과정은 네가 발로 뛰어야 한단다. 그래도 하겠느냐?"
"가족들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나도, 에스메랄다도 철저한 이기주의자이기에 어떤 계획일지는 뻔했지만, 황녀가 안전을 보장해줄 계획이라면 나 혼자서라도 악어 주둥이에 머리를 들이밀 수 있다. 어차피 저들은 나를 살리려 들테니 내가 기꺼이 미끼가 되어주겠다.
"그래서 그 방법이?"
자신있게 말할 때는 언제고 방법을 말하는 건 왜 주저하는 것인지. 괜히 긴장되서 목이 탄다. 테이블에서 식어가는 차를 한모금 넘기려는 찰나에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나와 그대의 오라비가 약혼하는 것이다."
"푸웁!"
"아가씨!"
미쳤어. 미쳤어 진짜 미쳤어. 어떻게 오라버니랑 약혼 할 생각을 해? 진짜 미친거 아니야? 어떻게 자기 오라버니랑? 저게 사람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니? 너 사실 몬스터 아니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라. 이런 말 하는 나도 얼마나 괴롭겠느냐."
"정말로 약혼하려는 건 아니지요? 오라버니 혼삿길 막을 일 있습니까?"
"왜 그대의 오라비 생각만 하느냐? 알란타의 황제가 될 이몸의 생각도 해주어야지."
"전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하실 분 아닙니까. 큰오라버니는 가문을 이으셔야 하는데 부마가 되면 어찌하란 말입니까."
"걱정마라. 황제의 남편이다. 얼마나 영광된 자리냐. 네 작은 오라비도 훌륭한 귀족이니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게다. 그리고 진짜 약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척 하는 것뿐이다. 핑계는 적당히 정해두었으니 걱정마라."
"영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중 일을 생각해야..."
"괜찮다. 내가 잘 해주마."
"전하!"
나는 예비 기사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솔직하게 말하면 종자다. 뒷배경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가문의 이름마저 날 버려 영영 기사 서임은 못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연찮게 하틴 기사단에 자리가 난 덕에 존경하는 리클렌 영애의 소개로 취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상사는... 세상에 기사단장이었다. 그런데 기사단장도 종자를 받던가. 잘 모르겠지만 메리가 짊어진 부담을 덜어줄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단장님. 부탁하신 자료를 정리해두었습니다."
"수고했네. 자네가 들어온 덕에 급한 불은 껐어."
비록 내가 입단한 지 여섯달째지만, 거기에 지난 한 달 동안은 훈련할 시간도 없었지만. 사실 훈련하려고 검을 들면 자꾸 빅토리아가 쓰러진 그날 생각이 나서 집중되지도 않았다. 차라리 책상에 붙어서 어려운 서류를 보고 있는게 낫더라. 한숨 돌리고 나니 단장님께서 나를 묘한 얼굴로 쳐다보고 계셨다.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오메르드. 이번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몇인지 아나?"
"모릅니다."
"허..."
잠시만요 단장님. 지난 반년간 선배님들이랑 제대로 대화할 시간도 안 주셨잖습니까. 제대로 검을 휘둘러본 게 언제인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납니다. 차마 하지 못한 말이 목을 매운다. 아. 지난날의 야근이여.
"자네가 들어오기 전에는 매달 새로 뽑아야했지. 내 종자는 말이 종자지, 사실은 부관이니까."
"네?"
"솔직히 말해, 자네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네. 빅토리아가 부탁해서 받아준 거지. 오메르드라는 걸 알았을 때는 후회했었지만 말이야."
"하하..."
저 말은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부당한 업무를 했다는 것인가. 무슨 황실 기사단이 이래? 어디다 고발해야 하지? 주인이 황제폐하인데 소용있나? 그나저나 빅토리아는 피뇨르와 가까이 지내고싶지 않아 했는데 부탁하느라 얼마나 고생했을지 미안하다.
"덕분에 오랜만에 그 아이가 재롱을 떠는 것도 구경했으니 괜찮네. 거기에 자네도 일을 열심히 하니 말이야. 먼저 간 자네 부친이 살아있었다면 자랑스러워했겠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빅토리아가 깨어났다고 하니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문병 가게."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말게. 그날 보니 꽤 친한 듯 하던데."
뭐지. 설마 지금 나랑 빅토리아가 심상치 않은 사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안돼. 안돼! 난 절대로 빅토리아랑잘 될 생각 없다.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감히 오메르드라는 이름을 달고 리클렌에게 다가갔다가는 에스메랄다에게 쥐도새도 모르게 제거당하거나, 그 애의 두 형제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할거다. 정말로.
"그럼, 단장님 대신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게."
체통 지킬 줄 모르는 피뇨르답게 실실 웃으시는 것이 정말로 얄밉다. 평소에는 그렇게 근엄하시면서 이럴 때는 꼭 못 놀려서 난리가 나신다. 단장께서는 이러실 때가 아니라 피뇨르 남작으로서 본인 따님을 걱정하셔야 합니다. 영애는 빅토리아와 본인 약혼자를 나란히 세워놓으면 빅토리아에게 달려갈 사람이예요.
친절한 단장님의 배려로 직접 준비해두신 선물을 들고 기사단 건물에서 쫓겨났다. 멍하니 서있으니 지나가던 기사단 소속 마굿간지기가 말을 끌고 나왔다. 등 떠미는 꼴에 하는 수 없이 말에 올라 리클렌 가로 향해야했다. 대로를 따라 천천히 말을 모는데 성에서 마차가 빠져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접견허가를 받은 사람은 빅토리아 하나 뿐이었으니 딱 절묘한 타이밍인 것이다. 마차가 내 곁을 스치는 때에 맞춰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창에 노크하자 문이 살짝 열렸다. 그 사이로 서슬퍼런 단검이 비쳤다.
"누구냐."
"나야."
"괜히 물어봤네."
단검을 들어올려 날 끝을 내게 향하는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침을 꿀꺽 삼키고 앞만 보고 마차를 따라 말을 몰았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빅토리아가 창을 활짝 열었다.
"저택으로 와. 그 선물은 대충 버리고."
"이거 피뇨르 남작께서 보내신..."
"그러니까 버리라고. 알면서 두번 말하게 하지 마."
하긴. 그의 괴멸적인 취향은 주변 사람들의 평판을 힘들게 한다. 그나마 그 딸인 줄리에타 피뇨르는 분위기부터 귀여움이 넘쳐나 잘 어울려서 다행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부인의 취향에 맞추어 멀쩡하게 차려입고 다닌다. 아마 결혼 전에는 제멋대로 입고 다니면서 약혼자였던 부인의 속을 꽤 긁었을 것이다.
"그래도 버리기는 그렇지 않나."
"그것 안 받아도 하루에 수십 개씩 선물이 들어와. 잊어버렸다고 둘러대면 돼."
"권세가는 좋겠네."
나는 주는대로 받아 써야 하는 처지인데. 어떻게 상관이 준 걸 버릴 수가 있니. 안 하더라도 저택에 모셔둬야 해. 한참 뚱하니 쳐다보던 빅토리아는 내 목에 매달린 커프스를 보고 이마를 짚었다.
"얼굴을 그렇게 쓰면 어떻게 해?"
"내 형편에 이런 것 살 여유가 어디있어."
"내가 정말 못 살아. 어디가서 그러고 다니면 널 추천한 내가 어떻게 되겠어. 당장 사람을 불러서 네 옷을 몇 벌 맞춰야겠다."
맞춤복. 그걸 입어본 지가 얼마나 됐더라. 아마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나 입었을 거다. 그러면 벌써 12년은 된 건가.
"일단은 급한대로 기사단 정복을 입고 다니렴. 내일 오메르드 저택으로 사람을 보낼테니 그 사람이 해주는 대로 입어. 그리고 피뇨르 남작이 준 것들은 전부 태워버려."
"나름 비싼건데."
"내가 또 쓰러져야 내 말을 들을 거니?"
"알았어."
네가 또 쓰러지면 그때는 내가 정말로 두 리클렌 공자에게 죽는 날이야. 그냥 내가 양심이 조금 아프고 말게. 제발 건강하렴. 머리카락이 전부 하얗게 세고, 숫가락도 못 들 정도로 늙어도 절대로 나보다 먼저 죽지 마. 당장 커프스를 떼서 감추자 한결 편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건가. 남자가 프릴 좀 달았다고 죽지는 않는데.
리클렌 가는 그 권세만큼 황성에서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 앞에 멈춰선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말에서 내려 에스코트를 위해 돌아선 순간 내 앞에 기가 막히게 나랑 닮은 사람이 서 있었다. 복장마저 똑같았다면 도플갱어라고 검을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태연하게 손을 뻗어 빅토리아를 에스코트한 마법사가 그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녕. 보고싶어서 왔어."
너는 바보니...? 그 사고를 쳐 놓고 어떻게 그렇게 인사를 해... 방긋 웃고 있지만 저게 웃는게 아니라는건 아마 메리가 가장 잘 알거다.
"나도 보고싶었어. 얼른 들어가자."
빅토리아는 나와 메리의 손을 양손에 쥐고 성큼성큼 저택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온 리클렌 가에 대한 감상에 젖기도 전에 할말을 잃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티모시 리클렌을 지나쳐 제 방으로 들어간 빅토리아는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문을 잠갔다.
"방음마법 걸어."
메리는 손뼉을 짝 치더니 두손을 입에 모았다.
"네 사람이서 같이 쓰는 비밀일기장!"
갑자기 손을 펼쳐 외치는 말이 너무 뜬금없어서 메리를 쳐다봤다.
"... 그게 마법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빅토리아가 물었다.
"응. 사실 주문 없이도 쓸 수 있는데, 스승님이 마법 쓰는 버릇이 잘못들었다면서 고칠 때까지 빼놓지 않고 말하래."
"세상에. 나는 마법사들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길드에 가면 더 부끄러운 주문을 외우는 사람도 많아."
"그래... 그런데 사고는 수습도 안 하고 수도에 와?"
부채로 험하게 매질하는 빅토리아를 피해 내 뒤로 숨으며 메리가 외쳤다.
"아니야! 길드에서 파견된 현장 조사단으로 온 거야!"
"네가? 이제 여섯 달 밖에 안 된 네가?"
"며, 명목상 내가 최초 발견자니까."
빅토리아는 내 뺨을 후려치려던 부채를 가까스로 멈추고 메리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래. 그건 이해 해 줄게. 그래도 내가 분명히 쥐죽은 듯 있으라고 했는데 멋대로 일을 벌인 건 용서 못 해."
다시 부채를 들어올리는 빅토리아 앞에 쏜살같이 튀어나와 두손을 번쩍 들고 무릎을 꿇은 메리는 배낭에서 집안 형편에 안 맞는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침착하게 업드리며 두손으로 높이 상자를 받들었다. 그때까지 눈치만 보던 클라렌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상자를 열었다. 저것을 뭐라고 부르더라? 하여튼 마법도구다. 본래 용도는 분명히 호신용인데, 귀족들 중에 간혹 저렇게 생긴 걸 가지고 노는 취미가 있는 사람도 들었다.
빅토리아도 깜짝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자를 쳐다봤다.
"세상에. 이런 귀한 걸 어디서 구했을까."
"우리 스승님 창고에 많아. 멀쩡한데 추적마법이 안 걸려있어서 그냥 들고왔어."
잠깐만. 그거 장물이라는 이야기 아니니, 메리?
"잘했어. 나 이거 꼭 가지고 싶었어. 에스메랄다는 있거든."
"잘했지? 그럼."
"그래도 용서는 안돼. 넌 혼나야해."
"살려주세요."
태어나서 메리가 저렇게 사과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우리 애가 잘못하기는 했어도 나쁜 마음 먹고 한 건 아닌데. 저렇게 풀이 죽어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빅토리아가 노려보든 말든 메리를 일으켜세워서 끌어안고 잘 쓰다듬었다. 우리 애가 참 착한 앤데 집안 형편때문에 많이 엇나가서 이렇게 됐어. 어릴때는 안 이랬어.
"내가 잘못 키웠어. 내가 대신 혼날게."
"됐어. 무마할 방법은 마련해뒀으니까. 메리가 능력껏 잘 망치기만 하면 돼."
"내가 그런거는 정말 잘 하지."
"너무 잘해서 걱정된다. 적당히 해."
"응. 그럴게!"
대체 어떤 방법이길래 쓰러질 정도로 화가 났던 사람이 대수롭지 않아 하는거지?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하다.
"내가 아주 기가 막힌 걸 얻어왔지."
비키가 호호 웃으며 손끝으로 입을 가렸다. 손가락에 걸려있는 반지가 낯설다. 아니, 낯선게 아니라 쟤가 하면 안 되는 거다! 왜 네가 황녀 반지를 하고있니!
"대신 내 목숨이 아주 위험해지게 생겼어. 그래도 메리가 이런 귀한 걸 훔쳐다줘서 한시름 놨다."
"그정도야? 그러면 내가 알버트 빌려줄게. 데리고 다녀."
"안돼. 안그래도 무도회에서 춤 한번 췄다고 피뇨르 남작이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고 있단 말이야."
"아냐. 필요할 때마다 부를게."
음침하게 웃지 마. 너 그러면 정말 무섭다고. 울 것 같은데 여기서 울었다가는 이번이 마지막이든 아니든 평생 놀림감이 될 것이 뻔해서 울 수가 없다.
소식을 듣자마자 어이가 없어서 내 처지도 잊고 뛰쳐나갈 뻔했다. 우리중에 미친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금지된 마법이 사용됐다. 끔찍한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마이어 왕조의 최후가 채 씻겨나가지 않은 시대였다. 그시절에 대한 악몽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세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리클렌 백작도 그중에 하나였다. 이 사실은 빅토리아의 사랑하는 오라버니에게는 엄청난 비극이었다. 왼쪽에는 분노한 아버지, 오른쪽에는 자신이 살려낸 동생. 그리고 곧 범인 검거를 위해 수도로 불려올 또 다른 동생. 나날이 수척해져가는 그는 제국이 보유한 가장 자랑스러운 인재였기에 길드의 조사에 동행해야 했다. 자신의 비리를 수사하기 위해 자신이 안내해야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내가 나쁜 놈이다.
그래도 오라버니가 머리는 잘 쓴 것이, 어줍잖게 빈민가에 숨어들지 않고 오히려 마법 보조 시설에서 일을 벌였다는 거다. 역시 파트론 제국에 유학까지 다녀온 크로노스는 다르다. 마법 관련 범죄율이 40퍼센트에 육박하는 범죄국가에서 듣고 다닌 풍월이 있으니 이런 대담한 일도 벌인것이겠지만.
"크흠!"
내가 한참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 리클렌 가 첫째 오라버니가 헛기침을 한다.
"일단 예상기간의 시설 출입 대장을 복제해주세요."
"대충 자료 수집일 기준으로 일주일 정도로 준비해두었습니다."
역시. 죄를 덮을 생각을 했다면 사흘 정도만 뽑아뒀을 것이다. 주도면밀한 티모시 리클렌이 당일에 마법을 쓰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고, 오래오래 살아오신 자애의 화신 빅토리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깨어났을 때 오라버니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최소 일주일 전에 미리 마법을 써 두었다가 위급할 때 발현하도록 했을 것이다. 내 생각에도 그렇다. 생명을 다루는 마법은 준비기간이 길기도 하고, 빅토리아가 오늘내일 하던 것도 거의 한달 가까이였으니까. 아마 죽던 살던 한번 시도나 해보자는 마음이었겠지. 그덕에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합니다, 오라버니. 덕분에 산 목슴 오라버니를 위해 한번 초개처럼 버려보겠습니다.
명목상 시찰을 왔으니 어느 정도 마법을 썼는지 정도는 측정하고 가야했다. 영감탱이가 이거는 빼돌리면 죽는다고 한 수정구슬을 들고 커다란 마법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 됐다. 잠깐. 이거는? 그럼 내가 자기 창고 건드린거 알고 있는건가? 나 길드로 돌아가면 자진납세 해야겠다.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고 보자.
"마법 사용 흔적을 조사한 후에 회의실로 돌아가서 수사과정을 상의해요."
"편하신대로 하세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같은 모범수한테...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
웃지만 말고 그냥 댁 여동생한테 하듯 해주세요. 제발. 시설 마법진은 말이 마법진이지, 거의 황성 연회장 정도 크기다. 그러니 이런 중요시설이 수도 외곽에 있는거다. 중심부에 있었다가는 아마 길드가 옛날에 벌써 도산했을거다. 이 넓은 곳을 황실 소속 마법사를 데리고 일일히 걸어다니면서 측정해야할 생각을 하니, 왜 여섯 달 차 모범수를 차출했는지 알겠다. 이 수정수가 미친듯이 불길한 보라색으로 반짝이면 그대로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김에 어떤 마법들이 쓰이는지 자료 조사까지 해야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감탱이는 수장 자리 내려놓고 크로노스로 가서 올리비아님이랑 경쟁해야 한다. 마법진 외곽부터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수정구의 반응을 살폈다. 마법진에서 활기를 담당하는 부분에 도착했을 때 보라색 빛이 번쩍였다. 여기서 마법을 쓴 건가. 일단 위치를 기록해두고 뒤쪽을 애써 무시한 채 계속 빙빙 돌았다. 마침내 중앙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월 초에 스승님 연구실에서 봤던 그 보라색 빛이, 그때랑 똑같은 밝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이쪽은 모르기는 해도, 이정도가 되려면 영혼 창조 정도는 되야 한다는 건 알겠다.
도저히 나 혼자 덮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에서 보는 눈이 있는데 입 다물고 있을 수도 없어서 내 뒤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보고 있는 오라버니의 옷자락을 잡았다.
"위, 위원회. 위원회를 소집해야 해요. 당장."
"제가 황성으로 연락하겠습니다."
"네."
오라버니는 짹짹이를 불러내서 열심히 상황보고를 했다. 나는 얼른 구구를 불러서 마나를 잔뜩 집어넣었다. 신호를 보면 스승님이 알아서 찾아올거다. 나는 그때까지 열심히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정리해야했다. 비둘기가 쏜살처럼 날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처다보고 있자니 빅토리아가 생각났다. 어떻게든 덮으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될 것 같아서 기쁨의 눈물이 흐르려는 걸 참느라 혼났다.
리클렌 오라버니의 안내를 받아 이동마법으로 급히 마련된 회의실에 도착했다. 의자에 앉아 이용대장을 살펴보는데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용의자를 굳이 꼽아보자면 티모시 리클렌, 개인 연구를 한다는 크로노스 학파 마법사, 유난히 많이 드나든 베르너 학파 마법사 정도인데. 그것도 첫번째 용의자는 내가 확증을 알고 있어서 꼽은 것이지, 사실상 없는 셈이다.
"메리 오메르드!"
누가 감히 내 이름을 부르나. 고개를 들어보니 저기 우리 오메르드의 자랑 알버트 오메르드가 보인다. 나는 뒤에 티모시 리클렌을 달고 왔는데 쟤는 앞에 피뇨르 남작을 모시고 온다. 내가 이겼다.
"오랜만에 뵙네요, 남작님. 제가 길드에서 선발대로 보낸 조사관이예요."
"언제 이렇게 컸나..."
찡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난 댁하고 즐거운 추억 없네. 다섯 살 이전까지는 종종 만났지만, 내 기억엔 끔찍한 옷을 가져와서 나한테 입으라고 강요하던 어린 날 뿐이다.
"티모시의 보고는 들었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누가 용감하게 시설에서 금지 마법을 거창하게 사용한 것 같습니다. 시기를 추정하는게 문제인데, 그건 제 분야도 아닌데다 아직 미숙해서..."
"우리 티모시가 다 알아서 할 거야. 그렇지?"
그러면서 그의 등을 팡팡 두드리는데,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 대만 더 맞으면 쓰러질 것 같다. 그래도 상급자라고 무시할 수 없어서 힘겹게 대답까지 한다.
"네. 일단 제가 추정하고 있으면, 올리비아 님이 오셔서 인계하실 겁니다."
"올리비아 님 안 오실지도 몰라요."
세상 잃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티모시 리클렌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이랑 싸워서..."
"스승님?"
"클로드 준이요."
내 수행비서 리클렌 씨가 놀란것 같다.
"아! 아르카나!"
새삼스럽게 나를 쳐다보는 피뇨르 남작을 흘겨보았다. 티모시 리클렌이 심각하게 고민하다 짹짹이를 불러내는 걸 무시하고 남작을 쳐다봤다.
"일단 아르카나랑 옥사나는 무조건 올 거예요. 옥사나 학파 수장님이 엄청 화가 나셨던 것 같았거든요."
"다행이군. 우리쪽은 티모시를 빼면 딱히 차출할 인력도 없었네. 나머지는 본인 업무에도 바쁘네."
"생각보다 심각한 일일 수도 있어요. 대충 유지인력만 남겨두고 전부 동원해야해요."
"그건 내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말이야. 일단 폐하께 보고해보기는 하겠네만."
못 데려오기만 해봐라. 내가 우리의 희망이자 자애의 상징인 빅토리아님께 말씀드려서 황녀를 움직여버리겠다. 내가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는줄도 모르고 피뇨르 남작은 알버트 뒤에 따라온 사무관들이 가져온 서류를 뒤적였다.
"요새 우리 쪽도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돼서 한창 난리가 났었는데, 참 공교롭구만."
"그러게요."
공교로울 게 뭐 있나. 저쪽은 정해진 수순대로 일하는 중이었는데, 우리가 비집고 들어가서 이쪽만 더 난리가 난 거다. 아마 저쪽도 뒤집어졌겠지만. 나도 알버트도 야근할 시간이다. 알버트는 어제까지 야근했다던데 이러다 기사도 못 달고 죽는것 아닌가 모르겠다.
"국경에서는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고, 수도에서는 금지 마법의 흔적이 발견되고. 이것 참. 꼭 마이어 시절 같구만."
피뇨르 공작이 얼떨결에 진상을 말했지만 그가 알 턱이 있나. 나랑 알버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않았지만 도리어 티모시 리클렌이 심각해졌다.
"경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응? 그렇지. 아무래도."
그러는 당사자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지만 말이다.
마법사 길드가 다 그렇듯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아 사방이 먼지 투성이에 사람이라곤 프론트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당직 마법사가 전부다. 손가락을 튕겨 정전기를 일으켰더니 눈을 번쩍 뜨고는 나를 노려봤다.
"뭐야."
"오늘 길드에 가입하기로 했는데요."
"메리 오메르드?"
고개를 끄덕이면서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어쩐지 어디선가 한번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알 듯한데 생각이 안 나네.
"여기에서는 바깥의 신분은 소용 없다. 어차피 흔적만 남은 가문이어도 꼴에 귀족이라고 유세 불었다가는 바로 쫓겨날 거다."
협박하는건가. 감히 리클렌 가문을 등에 업은 나를 협박하나!
"그러는 당신은 누구세요?"
남자가 히죽 웃었다. 아주 불안한 얼굴이다. 단어 선택을 잘못했구나! 아주, 아주 망한 것 같은 기분이 넘실거린다.
"클로드 준. 네 스승이 될 사람이다."
오 세상에. 빅토리아. 꽂아도 너무 심하게 꽂았잖아. 사랑해! 정말 사랑해 빅토리아! 라고 생각한 지 십분만에 내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의 서재에는 마법 연구서도 정말정말 많고, 신기한 물건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지만 그보다 많은 것이 있었다.
"제자야. 나는 이제 중거리 대응 파괴마법만 파는게 질렸다. 이제 내가 개척해야 하는 분야는 초장거리 요격 마법이야. 그러려면 마법진의 힘을 빌려야지. 물론 나같은 천재는 필요 없지만 너같은 범재들을 위해서 최적화라는게 필요해."
"그러니까, 스승님. 지금 하시려는 말씀이..."
"너는 오늘부터 나랑 같이 옥사나 학파 마법에 대해 공부하는거다."
"미친!"
당장 뛰쳐나가 아무 문이나 열고 뛰어들어갔더니 넓은 연구실에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다. 개중에 좀 나아보이는 것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매다 책상 앞에서 머리를 박고 있는 사람을 붙잡았다. 이 인간도 아르카나 학파겠지. 제발. 저 미친 또라이만 아니라면 누구든 괜찮아. 내가 여기에 왜 왔는데? 내가 마법진 배우자고 온 줄 알아? 안해! 안해!
"저기요. 저 제자로 좀 받아주세요. 저 이래봬도 구현화계까지 쓸 수 있는데."
"나는... 마법진도 못 쓰는... 쓰레기야..."
아. 그런가.전부 동원하고도 만족을 못해서 나같은 작고 연약한 신입까지 갈아넣으려고 하는 건가. 나는 내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행히도 양심은 있었는지 마법진만 가르치지는 않고, 오히려 실생활에 쓸 만한 것들 위주로 가르쳤다. 그리고 그때 빨리 도망쳐야 했다. 통신마법과 순간이동을 마스터한 순간부터 지금까지는 그냥 쥐어짠거고 진짜 갈아넣는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그런 것 내가 직접 체험하고싶지 않았어. 오메르드가 다 무너져가도 나는 나름 영애로 자랐는데. 이런 수모는 처음이야. 언젠가 꼭 내 이름 뒤에 아르카나를 붙이고 복수할테다.
"야. 팔푼이."
"왜요."
"이거 언데드 격리실로 보내라."
언데드 격리실. 그것은 내가 학파에 들어온 첫날에 만난 시체들을 가둬놓은 수용소다. 우리는 모두 감옥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유일하게 심부름을 한다고 해서 모범수라고 불린다. 거기서 절대로 못나오는 학파의 미래이자 동량인 선배들은 무기징역수라고 불린다. 그들은 이 연구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절대로. 그래도 다행이다. 오늘내일이면 끝이 날 것 같으니까. 거기에 가면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햇빛을 제대로 못 봐서 안색도 안 좋고 무엇보다 나한테 죽여달라고 하는게 너무 무서워. 죽여달라는 뜻은 기절마법을 써달라는거다. 친절하게 저 안에 갖혀있는 사람들을 위해 정신을 또랑또랑하게 유지하는 마법진을 설치해놓은 악독한 스승같으니. 직접 가기는 차마 무서우니까 살아있는 것만 빼면 뭐든지 보낼수 있는 만능마법 부엉부엉으로 보내고 멍하니 앉아있으려니 이세상에서 제일 악독한 인간이 또 부른다.
"오메르드."
"네, 스승님!"
"내 취미가 통계인건 알지?"
알다마다요. 당신은 아르타나가 아니라 크로노스로 가야했어.
"내가 지금까지 수도에서 마법 통계를 계산했었는데 얼마전에야 니가 비등록 마법사 주제에 구현계까지 사용한 바람에 내 통계가 다 쓰레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건 내 탓이 아닌데."
"그래서 주제를 바꿔서 어디에서 어느 마법이 쓰였는지 전부 파악을 하기로 했다. 너때문에 흥이 깨졌으니 네가 오늘 안에 끝내."
아르카나 학파가 이런 귀찮은 짓을 왜 하는것인가. 내가 크로노스 학파에 들어간 것 같다. 이 인간 아르카나인 척 하는 크로노스 아니야? 아닌데. 분명히 위대하신 우리들의 지도자 빅토리아 리클렌님께서 아르카나 학파에 꽂아주셨는데? 때려칠까 싶다가도 가끔씩 던져주는 비법이 너무 훌륭해서 그럴수도 없다. 저 인간은 아마 지금 준비중인 논문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한테 제대로 가르쳐 줄 생각이 없을 거야. 그 전에 내가 어떻게든 뜯어먹어야...
귀족들은 누구나 잘난체를 하고싶어 하니까 마법을 배우면 겨우 상상계까지밖에 못 써도 마법사 등록을 하신다. 그러니 일단 등록 마법사들이 몰린 귀족 주거지역을 중점으로 정리하고 차츰 외곽으로 훑었다. 생각보다 비 등록 마법사들이 많지 않아서 얼른 스승한테 던져주고 나는 서재에서 숨쳐온 '가장 확실하게 파괴하는 방법(상)-하틴 106년 개정판, 클로드 준 아르카나 지음'에 코를 박았다. 나쁜 스승. 책은 쓸 시간이 있고 제자 가르칠 시간은 없지. 마법 딱 하나를 배우고 스승의 서재에 시험삼아 한발 날려보려는데 뒤쪽에서 짹짹이 마법이 날아왔다.
아 짹짹이마법! 엿먹이고 싶은 사람한테 어그로 끌고 도망치기 딱 좋은 마법이다! 그게 나한테만 오지 않는다면. 열어보지 않으면 마법의 효력이 다 할 때까지 짹짹짹거리다가 사라지지만 유감스럽게도 스승님이 보낸 짹짹이니 열어봐야만 했다.
<야! 너 당장 올라와! 당장!>
아 또 왜? 진짜 가지가지로 귀찮게 구네. 왼손을 머리높이로 들어 손을 한번 쥐었다 펴자 스승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째 다른 학파 수장들이 있는게... 내가 뭔가 큰 사고를 친 건가?
"메리 오메르드. 자료 자체에는 단 한번도 손 댄 적 없는거지?"
"네. 그런데요."
옥사나 학파 수장의 손짓 한번에 지도가 입체모형처럼 튀어나왔다. 그리고 빈민가 끄트머리에 둥둥 떠 있는 보라색 표식을 보고 헛숨을 들이마셨다. 나 같은 애송이 마법사한테는 신경도 안 쓰고 저들끼리 열심히 머리를 마주대고 있는 틈을 타 얼른 밖으로 도망나왔다. 죽었다. 난 이제 큰일났다. 얼른 짹짹이를 불러서 귓가에 대고 빌었다.
"미안해 빅토리아. 내가 아무생각 없이 마법 통계를 냈어. 진짜 내가 죽을까? 그럴까? 짹짹이 한마리 붙여서 보낼게 답장줘."
정말로 저 자료 끌어안고 내가 죽어야 할것 같아. 안그러면 우리 또 죽을것 같은데 한바퀴 돌아서 빅토리아면 다음은 나 아닐까? 우리 집안으로는 답 없는데. 다 죽일까? 내가 저 인간들 다 죽일 수 있을까? 말도 안돼지. 난 스승한테 개기지도 못하는데. 그냥 내가 죽어버리는게 모두에게 이로울것 같아. 미안하다 알버트 누나 먼저 간다...
요새 사교계 동향이 바뀌었다. 고트 영애는 남성용 망토를 입고 온 나의 파격적인 행보에 충격을 먹고는 새로운 패션을 찾아낼 때까지 파티에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고, 덕분에 나는 혼자서 내 세상을 즐기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오라버니 망토좀 입고 온 게 어떻다고. 그보다 우리 어머니 드레스는 신경도 안 쓴거니? 그 뒤로도 나는 신경쓰지 않고 작은 오라버니의 마법사 망토도 훔쳐입고, 아버지의 정복 망토도 훔쳐입고 다녔다. 내가 미친짓을 할 수록 사람들은 더 나한테 다가왔다. 원래도 좀 미친 것 같았는데 본격적으로 미쳤으니 재미있을테다. 내 미친짓에도 끝까지 눈길 한 번 안 주는 매정한 남자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차노트 공자다. 대단한 사람. 내가 포도주를 끼얹고, 눈앞에서 구두 굽을 부러트려도 눈 깜짝 안하고 버려두고 가다니. 그래도 나의 희망 나의 빛 에스메랄다를 위해 꼭 포섭해야 하는 사람이다. 황가에서 독립해나간 지 벌써 수십 해나 지났어도 차노트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어린 여자아이가 대뜸 차노트 대공을 만나고 싶다고 달려들 수도 없는데 대공이 자식을 너무 잘 키워서 내 앞길에 방해가 된다. 요새 수도 분위기도 흉흉하니 작손이 예상보다 빨리 뒤엎을 것 같아 불안하다. 황자의 탄신연회라고 좋아하지도 않는 연회에 친히 내려오신 에스메랄다님이 나한테 열렬한 눈빛을 보내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정말. 그래. 내가 언제부터 체면 차리고 그랬다고. 여섯번 죽었는데 한번을 더 못 죽을까? 죽으면 지들 손해지 내 손해인가?
"차노트 공자. 또 뵙네요."
"네. 발목은 괜찮으셨나봅니다."
네. 아주 멀쩡해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너한테 수작걸러 왔지요. 참 답답한 사람이다. 이 사람도 아마 약혼자가 있을텐데, 그 약혼자 속 안터지는지 모르겠다.
"피뇨르 양과 첫 춤은 추셨으니 저랑 한 곡 추시겠어요?"
"네?"
당황해가지고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어버버거리는 걸 그냥 끌고 플로어로 나왔다. 줄리에타 피뇨르는 나의 열렬한 딸랑이로, 절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걔도 참 이상한 애지. 나같은 애 딸랑이를 해서 어디에 쓴다고.
이 눈치없는 남자가 뻣뻣하게 춤을 추든 말든 나는 경악하는 에스메랄다님을 무시하고 루이스 차노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래도 기사라고 놀라지 않고 제대로 마주보고 있다.
"차노트 경. 일전에 빌려가신 망토는 잘 쓰셨는지요?"
"아, 네. 최대한 세탁한다고 했는데 물이 들어버렸다고 합니다.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겠습니다."
"천천히 돌려주셔도 괜찮아요. 어머니께서 오라버니에게 새 망토를 선물해서 당분간은 안심이예요."
"그렇습니까."
다시 말을 걸기 힘들게 딱 잘라 대답하더니 다시는 말이 없었다. 오늘도 틀렸나. 말없이 플로어를 거의 돌았을 무렵에서야 그가 말을 걸어왔다.
"용건 있으면 말씀하세요."
"눈치채셨으면 말씀하시지."
"요새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했지요.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공을 뵙고싶어요."
루이스는 잠시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답을 내주었다.
"좋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판단은 전적으로 아버님의 몫입니다. 차노트의 기사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경은 미래의 차노트 대공일텐데요."
"그렇기는 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척 웃는게 조금 안쓰럽기도 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안하는 척 하는 삶도 편하진 않겠지. 서면으로 날짜를 알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제 약혼자에게로 돌아갔다. 환하게 웃으며 나한테 손을 흔드는 줄리에타 피뇨르를 무시하고 테라스에 들어가려는데 내 앞을 막고 선 익숙한 가슴팍에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빅토리아. 차노트 공자는 약혼자가 있단다. 원한다면 어떻게든 파혼시키고 이어주겠지만, 웬만하면 다른 사람을 찾았으면 좋겠구나."
"오라버니. 전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다른 영지로 떠날 수 없어요."
"비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티모시 오라버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바보같은 오라버니. 내가 겨우 차노트 따위한테 반했을까봐 걱정하다니. 왜 못떠나는지도 모르고.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나는 가족들을 사랑하고, 가족들도 나를 사랑한다. 오리버니의 뺨에 키스하고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몇십년을 사교계에서 종횡무진했지만 늘 어렵다. 특히 원하는 게 있을수록 더 어렵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고트 영애가 없는 틈을 타 샬롯 노먼이 제 세상으로 만들려 들테니 마음 편히 쉴 수도 없다. 저쪽에서 부채로 입을 가리고 나를 힐끗거리는 노먼의 딸랑이들을 지나쳐 한곳에 뭉쳐있는 영애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영애!"
"아, 미안해요. 내가 좀 바빠서."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영애들에게 호호 웃으며 손을 내저어주고 벽애 달라붙어서 어버버거리는 나의 행동대장 2호를 쳐다봤다.
"알버트 공자."
"아, 비키."
아, 오메르드 공자. 왜 갑자기 저를 애칭으로 부르시지요. 알버트의 대답에 영애들이 순식간에 사나워진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너, 그리고 너. 너. 다 기억했다. 다음 파티 즐거울거다.
"메리한테 연락 온 적 있어요? 요새 통 소식이 없네."
"그, 바쁘다나봐... 요."
대체 얼마나 바쁘길래 싸고 도는 알버트한테도 연락을 못 하지? 아니면 드디어 브라더 콤플렉스에서 탈출한건가.
"하긴. 아르카나의 제자로 들어갔으니 정신없을 법도 해요."
"응... 괜찮으면 나랑 한곡 출래...요?"
아니. 저 수줍고 힘들던 시절의 내가 나한테 춤 신청을 하다니. 내가 네 춤 실력을 다 아는데? 그래. 힘들게 왔는데 한곡도 안 추고 가면 너무 슬프겠지. 나라도 너랑 춰야 네가 안면이 서겠다.
"물론이지. 그리고 그냥 말은 편하게 하는 편이 좋겠네요."
알버트가 내민 손 위로 손을 얹었다. 플로어에 올라 첫 걸음을 내딛으려는데 우리 머리 위로 하얀 빛 한쌍이 빙빙 맴돌았다. 손을 뻗어 잡으니 우리가 애타게 찾던 목소리였다.
<미안해 빅토리아. 내가 아무생각 없이 마법 통계를 냈어. 진짜 내가 죽을까? 그럴까? 짹짹이 한마리 붙여서 보낼게 답장줘.>
작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멈추고 내 손 안의 새가 흩어지며 사라졌다. 숨이 턱 막히면서 온 몸의 피가 식는 것 같다. 내가 너를 왜 거기에 보냈는데. 어떻게 내 등에 칼을 꽂지? 믿은 적도 없지만 허탈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굳어버린 뇌를 쥐어짜내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보려 했지만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가까스로 알버트의 어깨를 잡고 서서 아직 날고있는 새를 잡아쥐었다.
"너. 딴짓 하지 말고. 그냥 하던 일 마저 해. 쫓겨나서 손목 잘리고 혀 잘려서 돌아오면 내 손에 죽는다. 정신 똑바로 차려."
"비키!"
"조용히 해. 지금 쟤 두둔할 때 아닌거 알잖아. 한마디만 더 하면 너도 같이 죽어. 아니 다같이 죽어."
너 무슨 상황인지 다 아는 상황에서 메리 편들면 정말로 죽는다. 오메르드 다 죽여버리고 죽은 다음에 다시 이번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 이번이 끝이라고 해도 살만큼 불행하게 살아봤으니 이제 그만 살아도 돼. 그러니까 그만 해. 화가 머리 끝까지 솟으니 눈앞이 핑 돌고 뒷목이 당긴다. 손을 떼고 돌아서려는데 눈앞이 새까맣게 물든다.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졌다. 누군가가 나를 받아냈다. 아마 알버트겠지. 하나도 고맙지 않으니까 내가 부를 때까지 내 근처에서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이런 말이 있다. 회개하고 새 삶을 살아보고자 했더니 세상이 날 돕지 않더라. 그게 딱 내 상황이다.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지. 내가 신께 죄라도 지었던가? 기네스님. 저는 맹세코 당신께 실수한 적 없어요. 그게 전생이라면 모르겠지만.
온몸이 무겁게 늘어진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지만 지난 밤, 아니지. 얼마나 기절해있었는지 모르니 그날 밤의 비보를 처리해야 해 억지로 일어났다. 벌어진 커튼 사이로 제법 선명한 빛이 새어드는 걸 보니 해가 중천에 뜬 모양이다. 괜히 흥분하는 바람에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 어찌한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초장부터 파투났으니 이제 수많은 차선책들에도 제약이 생길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일찌감치 내전을 일으키는 것이겠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엉뚱한 사람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아가씨! 얼마나 다들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몰라요."
부은 눈으로 내게 달려와 징징거리는 샐리의 손을 밀어냈다.
"샐리. 얼마나 지났니?"
"딱 이틀째예요."
이틀. 그래도 너무 오래 기절하지는 않았네. 이게 과연 메리 오메르드가 과도한 스트레스를 줘서 그런걸까. 아니면 코르셋과 운동부족 때문인가? 그러고보니 내 인생에 기절은 빅토리아와 에스메랄다 말고는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들을 빼고는 다들 어느정도 움직이고, 어느정도 먹는 사람들이지. 그래. 내가 잘못했다. 아무리 오랫동안 타인으로 지내 나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다지만, 화도 못 참을 정도로 연약한 몸일줄이야. 이래서는 복수고 뭐고 전부 소용 없겠네. 이제와서 마법이나 검을 배운다고 해도 부모님이 들어줄 리가 없으니. 이래저래 큰일이다. 내 목숨도 위험하고, 내 건강도 위험하다.
"아가씨. 대체 요새 무슨 일을 하고다니시는거예요. 얼굴이 반쪽이 되었어요. 빈센트 도련님이 아시면 제 목이 날아가요, 아가씨. 제발 좀 쉬세요."
얼마나 더 쉬라는거야. 지금 아주 열심히 쉬고 있는데.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샐리가 일어나 밝은 얼굴로 말했다.
"참! 마님을 모셔올테니 가만히 계세요."
너무한다. 이틀동안 누워있었는데 움직이지도 말라니. 내 결리는 어깨랑 배기는 등허리는 누가 책임지니. 얘. 네가 가면 내 허리는 누가 마사지해주니?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샐리의 정 반대편에 클라렌스가 앉아있었다. 아. 네가 있었지.
"클라렌스. 나 허리아파."
"아가씨. 저는 심부름꾼이예요."
"심부름꾼도 시녀야."
"아니요. 저는 아가씨가 잔심부름 하는데 쓰려고 특별히 들인 아가씨만의 특별한 파발꾼이예요."
그래. 마사지 하기 싫다는거지. 하지 마라. 하지 마. 내가 허리가 결리다 못해 끊어져서 죽어도 원망하기 없기다. 주먹으로 허리를 콩콩 두드리고 있으니 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 우리 착한 비키. 누가 이렇게 착한 널 힘들게 했니?"
아 어머니. 제가 착하면 작손은 프란님의 첫번째 주교여야해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못됐어요. 이유없이 다시 현기증이 느껴져 이마를 짚으니 어머니의 얼굴이 새하얘진다.
"아가. 대체 오메르드 공자가 너같이 착한 아이한테 뭐라고 했길래...."
"오메르드 공자는 상관 없어요. 그냥 조금 말도 안되는 소식을 들어서... 요새 초대장이 오는 대로 참석했더니 조금 피곤했나봐요."
내 말에 어머니는 내일이라도 곧 죽을 것 같은 환자를 보는 표졍으로 내 뺨을 쓰다듬으셨다.
"우리 비키. 그 건강하던 네가... 다 내가 부덕한 탓이야. 미안하구나. 미안해."
"아니예요. 그동안 옷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잖아요."
차마 유리세공품을 보는 것처럼 조심스러워하는 어머니와 눈을 맞추기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여성 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는 겨우 춤 연습이나 승마 뿐이다. 애초에 무가에서 자랐을 경우에는 취미로 무예를 닦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슬프게도 그런 거친 취미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운동... 운동을 해야겠어요. 코르셋도 벗고."
"그래. 그러자. 엄마네 아버지에게 부탁해 좋은 말을 내줄테니 승마라도 하려무나."
아 승마. 내가 열 살때 때려친 그것 말이지요. 그것마저 안 해서 내가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이 된건가. 갑자기 자괴감이 사무친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다. 그 와중에 다시 문이 열렸다.
"빅토리아. 알버트 오메르드가 너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느냐?"
아니야... 아니예요 아버지. 나는 그냥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부끄러워요. 그냥 혼자 있게 해주세요. 정말 우리 가족들 너무 상냥해서 내가 못 살겠다. 고마워서 눈물이 나는데, 창피해서 죽을 것 같다.
"아니요. 그냥 어지러워서 그랬어요. 운동을 조금 해야 할까봐요."
"가장 좋은 말로 내주마. 타고싶으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기사들이 도와줄게다."
"네..."
아니요. 그냥 저 혼자서 타도 괜찮아요. 기사 안 붙여주셔도 돼요. 저 말 잘 타요. 예전에. 내 기억으로는 한 40년 전에 메리 오메르드가 온 알란타를 말 한필 타고 종횡무진 하면서 반란군을 진압했거든요. 가까스로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비키. 오메르드 짓이냐?"
"아녜요!"
오라버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쳐다본다.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당신이 생각하는 그거 아니야!
"메리가 제 속을 뒤집는 말을 해서... 알버트는 오히려 걱정해줬어요."
대체 어떻게 오해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거지요? 대체 마법은 어떻게 배운 거야. 알버트가 오라버니 손에 죽게 내버려둘 수 없으니 예쁜 구석 하나도 없는 녀석이지만 일단 살려두자.
"메리? 아르카나의 오메르드?"
"네. 친구예요."
"웬만하면 오메르드와는 멀리하렴. 둘 다 활동적인 이들이라 네 몸만 상한단다."
"그래도... 저한테 먼저 다가와준 두번째 친구인걸요."
내가 먼저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고개를 들면 거짓말인걸 들켜버릴 것 같다. 푹 숙인채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티모시 오라버니는 내 손을 꼭 쥐고 말했다.
"네가 아프면 내가 빈센트에게 면목이 서질 않아. 내가 꼭 지켜주겠다고 약속해서 그곳에 보냈는데 그것 하나 지키지 못했다고 얼마나 화를 내겠니."
"됐다고 해요. 빈센트 오라버니는 거기서 평생 살라고 해요."
퉁명스럽게 대답했더니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 전환하려고 한 말 아닌데. 진심인데. 왜 내 안전을 오라버니들이 책임지지요? 나를 호위하는 건 리클렌 기사단의 기사분들이지 오라버니들은 아닌데. 매일 나한테 장난치는 재미로 사는 오라버니는 그냥 거기서 마음에 드는 영애 만나 눌러붙으면 좋겠다.
"네 안색을 보니 다음주 쯤에 잠시 돌아온다는 걸 알면 다시 쓰러질까 겁나는구나."
"빈센트 오라버니가 돌아와요?"
"그래. 프라우에 문제가 생겨서 말이다."
그러고보니 티모시 오라버니의 얼굴도 많이 수척하고 피부도 거칠어진 것이 마법사 길드가 벌써 황제에게 소식을 전했는지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나는 쓰러졌지, 길드에서는 금지마법의 흔적을 발견했다지. 쓰러지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 돕고 싶지만 내 선에서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이니 빨리 털고 일어나 걱정을 하나라도 덜어줄 수밖에 없네.
"국경 수비군을 불러올 정도면 심각한 문제인가봐요. 위험한 건 아니죠?"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티모시 오라버니는 물론이고 부모님까지도 미묘한 표정이다. 실수라도 했나? 오라버니는 나를 한번 끌어안고는 말없이 일어났다. 내가 걱정되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건가. 하긴. 빅토리아 리클렌은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지나치게 높아서 헛소문이 들리면 바로 쫓아가 따지고 오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이 사건을 무마시켜야 하는데. 그래야하는데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미루고 미뤄왔던 입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번에도 앓아누웠으니 꼬박 열흘은 누운 채로 지내야 할 터다. 뺨에 키스하고 떠나는 가족들을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고개를 돌렸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 마사지도 못하는 무능한 시녀지만 본인 말대로 심부름 하나는 재빨리 잘 하는 클라렌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클라렌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의지하고 있단다."
클라렌스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잘 할게요. 하고 입모양으로 연신 빌었다. 소용 없다 이 나쁜 계집애. 그 말을 듣고는 샐리가 토라져서 투정을 부린다.
"아가씨! 정말 속상해요. 지금까지 모셔온 저는요?"
"샐리. 나는 네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한다는것 알잖니."
물론 정작 네가 없으면 나는 클라렌스에게 전부 맡길거란다. 사실 클라렌스도 없으면 내가 스스로 할 수 있고 말이야. 감동한 눈치인 샐리에게 간단하게 먹을 거리를 가져오라고 시키고 이리 내오라고 손짓했더니 클라렌스가 앞치마 속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하얀 새를 꺼낸다. 나를 쓰러지게 만든 그 만악의 근원을 말이다.
"오메르드 영애의 소식을 가져온 새는 제가 받아뒀고요, 이 새는 분명히 황녀전하께 전할 말이 있을테니 그때 쓰래요."
"뭐라고 하든?"
"시대가 시대다보니 아직 누가 마법을 썼는지까지는 색출해내지 못한다고 해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실수인 척 자료를 섞어두었으니 시간은 조금 벌은 셈 쳐달라고 하셨어요."
"내가 분명히 쥐죽은 듯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원래부터 실수를 자주 해서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셨어요. 해봤자 영안실로 끌려내려가는 정도라고..."
영안실? 죽는다는건가? 감히 나한테 물을 먹여놓고 다른 사람한테 죽을 생각을 하다니. 꿈도 크네. 머리맡의 책을 집어들고 손짓하자 클라렌스가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마법으로 소식을 알리더라도 자세한 이야기를 하려면 직접 만나야한다. 황녀를 만나려면 적어도 2주 전에 알현신청을 해야 하니까 지금 신청해도 때를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충 구색만 맞춰 적고 클라렌스에게서 새를 빼앗아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질 않사옵니다. 실수한 것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타계책을 모색해봐야겠어요. 아마 제 마법이니 내 말을 듣고 있을테지. 이 말을 들었으면 반성하고 어떻게든 방법을 쥐어짜내지 않을까 싶어요. 나도 최대한 생각해보겠습니다. 대충 두가지 정도 떠오르기는 하는데... 하여튼 알현신청 받아주세요. 최대한 빨리."
잠자코 듣고 있던 새가 푸닥거리며 몸부림친다. 이 정도밖에 전하지 못하는건가. 새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주었다. 절대로 딴길로 새지 마라. 새의 귓가에 속삭이고 손을 놓았다. 클라렌스가 재빨리 창문을 열었다. 창틈으로 날아가는 새를 보고있자니 다시 두통이 몰려온다. 정말. 가족 말 안믿어서 좋을 것 하나 없다. 오라버니 말대로 오메르드는 문제가 많다.
내 알현신청은 유례없는 속도로 처리되었다. 덕분에 가족들이 원래 계획한 2주를 채우지도 못하고 궁에서 나온 마차를 타고 가야했다. 내가 돌아오면 편히 쉴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며 눈물을 머금고 저택에 남은 샐리가 흔드는 손을 뒤로하고 클라렌스와 함께 떠났다. 잔뜩 긴장해 동상처럼 앉은 클라렌스는 두고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차분히 고민했다. 내 죄는 아니지만 과거의 내가 저러고 사는 걸 보니 어쩐지 매우 부끄럽고, 미안해진다.
"아가씨. 황궁은 어떻게 생겼어요?"
"넌 연회에 가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니. 그냥 영지 본성이라고 생각해."
그냥 조금 심각하게 더 크고, 조금 심각하게 더 화려한 성일 뿐이다. 조금이 남다르긴 하다. 차창을 살짝 열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성을 보여주자 창백해져서는 고개를 돌렸다. 하긴. 클라렌스로 살 때는 어릴 때부터 저자에서 뛰어다닌 기억 때문에 지난 세번의 귀족으로서의 삶은 잊어버리다시피 했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등이나 쓸어주는 수밖에.
"정 무서우면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게 더 무서워요!"
"그러니까 따라와. 이제 곧 도착해."
"네에..."
차창을 닫고 의자에 기댔다. 어차피 나는 황성의 구조를 꿰고 있지만 일단은 내부 구조를 비밀로 하고싶다 하시니 하자는 대로 따라드려야지. 바닥재의 틈을 바퀴가 지날 때마다 덜컹거리던 것마저 사라지고 부드럽게 얼마간 더 달리더니 마차가 멈춰섰다. 문이 열리고 에스메랄다의 사용인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어서오십시오. 황녀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클라렌스가 재빨리 마차에서 내려 나를 부축했다. 사용안아 앞서서 길을 안내했다. 이 복도를 다시 걷게 될 줄은 몰랐다. 에스메랄다로서, 그리고 나 자신으로서. 심지어 빅토리아로서까지도 오게 될 줄이야. 이곳에 한번 드나든 사람들은 밤마다 목을 깨끗이 씻고 자야 다음날에 그나마 볼만한 꼴로 발견된다. 오늘부터 나도 열심히 닦고 향수도 뿌려야 하는가... 착잡한 마음을 애써 다잡으려니 사용인이 멈춰섰다.
"전하. 리클렌 영애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라."
사용인이 문을 열었다. 정면에는 커다란 창에서 들어오는 햇볓 아래의 화려한 의자에 앉아있는 알란타의 빛이 보였다. 어째서 빛인가? 황녀를 종교와 결합시키면서까지 여자가 황제가 된다는 것이 싫은가? 그렇다면 어째서 2대 황제는 부정하지 않는 것인가. 황제가 에스메랄다에게 소피아라는 이름을 주고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퍼져있는데 감히. 그보다 더 발칙할 수가 없다.
"어서오거라."
에스메랄다가 손짓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사용인들이 빠져나간 후에야 문이 닫혔다. 뒤돌아 문을 확인하고 황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에스메랄다는 그 가는 팔에 힘줄이 비칠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정말... 할 말이 없어."
"나는 이럴 줄 알았다. 메리 오메르드가 망아지처럼 날뛰는 것이 하루이틀 일이었느냐. 괜찮다. 예로부터 오메르드가 얌전히 있겠다는 말은 믿지 말라 했다."
그런데 괜찮은 사람 얼굴 치고는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처럼 눈 밑이 거뭇해 몹시 송구스럽다.
"대책부터 이야기하자. 내 생각에는 메리를 없애는게 제일 빨라."
"네가 정신을 놓았구나. 그나마 쓸만한 패를 왜 버리느냐. 네가 그 자리를 채울 수 있겠느냐?"
내가 이 나이 먹고 마법을 배워야할까요. 싸늘한 눈빛을 맞받아치니 에스메랄다가 혀를 찼다.
"네가 그것을 아르카나에 집어넣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수습할 방법을 서너가지 마련해 두었다."
에스메랄다...! 역시 내 인생에 희망은 에스메랄다 뿐인거다. 수많은 삶 중에서 미래에 대비하는 인생을 몇번 겪지 못했는데... 역시 황태자로 내정된 황녀는 달라도 다르다. 이런 사람이 황제가 돼야 내 인생이 평화롭고, 우리 집안이 평화로울텐데.
"그중에 내가 직접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나, 그 과정은 네가 발로 뛰어야 한단다. 그래도 하겠느냐?"
"가족들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나도, 에스메랄다도 철저한 이기주의자이기에 어떤 계획일지는 뻔했지만, 황녀가 안전을 보장해줄 계획이라면 나 혼자서라도 악어 주둥이에 머리를 들이밀 수 있다. 어차피 저들은 나를 살리려 들테니 내가 기꺼이 미끼가 되어주겠다.
"그래서 그 방법이?"
자신있게 말할 때는 언제고 방법을 말하는 건 왜 주저하는 것인지. 괜히 긴장되서 목이 탄다. 테이블에서 식어가는 차를 한모금 넘기려는 찰나에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나와 그대의 오라비가 약혼하는 것이다."
"푸웁!"
"아가씨!"
미쳤어. 미쳤어 진짜 미쳤어. 어떻게 오라버니랑 약혼 할 생각을 해? 진짜 미친거 아니야? 어떻게 자기 오라버니랑? 저게 사람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니? 너 사실 몬스터 아니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라. 이런 말 하는 나도 얼마나 괴롭겠느냐."
"정말로 약혼하려는 건 아니지요? 오라버니 혼삿길 막을 일 있습니까?"
"왜 그대의 오라비 생각만 하느냐? 알란타의 황제가 될 이몸의 생각도 해주어야지."
"전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하실 분 아닙니까. 큰오라버니는 가문을 이으셔야 하는데 부마가 되면 어찌하란 말입니까."
"걱정마라. 황제의 남편이다. 얼마나 영광된 자리냐. 네 작은 오라비도 훌륭한 귀족이니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게다. 그리고 진짜 약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척 하는 것뿐이다. 핑계는 적당히 정해두었으니 걱정마라."
"영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중 일을 생각해야..."
"괜찮다. 내가 잘 해주마."
"전하!"
나는 예비 기사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솔직하게 말하면 종자다. 뒷배경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가문의 이름마저 날 버려 영영 기사 서임은 못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연찮게 하틴 기사단에 자리가 난 덕에 존경하는 리클렌 영애의 소개로 취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상사는... 세상에 기사단장이었다. 그런데 기사단장도 종자를 받던가. 잘 모르겠지만 메리가 짊어진 부담을 덜어줄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단장님. 부탁하신 자료를 정리해두었습니다."
"수고했네. 자네가 들어온 덕에 급한 불은 껐어."
비록 내가 입단한 지 여섯달째지만, 거기에 지난 한 달 동안은 훈련할 시간도 없었지만. 사실 훈련하려고 검을 들면 자꾸 빅토리아가 쓰러진 그날 생각이 나서 집중되지도 않았다. 차라리 책상에 붙어서 어려운 서류를 보고 있는게 낫더라. 한숨 돌리고 나니 단장님께서 나를 묘한 얼굴로 쳐다보고 계셨다.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오메르드. 이번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몇인지 아나?"
"모릅니다."
"허..."
잠시만요 단장님. 지난 반년간 선배님들이랑 제대로 대화할 시간도 안 주셨잖습니까. 제대로 검을 휘둘러본 게 언제인지 제대로 기억도 안 납니다. 차마 하지 못한 말이 목을 매운다. 아. 지난날의 야근이여.
"자네가 들어오기 전에는 매달 새로 뽑아야했지. 내 종자는 말이 종자지, 사실은 부관이니까."
"네?"
"솔직히 말해, 자네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네. 빅토리아가 부탁해서 받아준 거지. 오메르드라는 걸 알았을 때는 후회했었지만 말이야."
"하하..."
저 말은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부당한 업무를 했다는 것인가. 무슨 황실 기사단이 이래? 어디다 고발해야 하지? 주인이 황제폐하인데 소용있나? 그나저나 빅토리아는 피뇨르와 가까이 지내고싶지 않아 했는데 부탁하느라 얼마나 고생했을지 미안하다.
"덕분에 오랜만에 그 아이가 재롱을 떠는 것도 구경했으니 괜찮네. 거기에 자네도 일을 열심히 하니 말이야. 먼저 간 자네 부친이 살아있었다면 자랑스러워했겠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빅토리아가 깨어났다고 하니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문병 가게."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말게. 그날 보니 꽤 친한 듯 하던데."
뭐지. 설마 지금 나랑 빅토리아가 심상치 않은 사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안돼. 안돼! 난 절대로 빅토리아랑잘 될 생각 없다.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감히 오메르드라는 이름을 달고 리클렌에게 다가갔다가는 에스메랄다에게 쥐도새도 모르게 제거당하거나, 그 애의 두 형제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할거다. 정말로.
"그럼, 단장님 대신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게."
체통 지킬 줄 모르는 피뇨르답게 실실 웃으시는 것이 정말로 얄밉다. 평소에는 그렇게 근엄하시면서 이럴 때는 꼭 못 놀려서 난리가 나신다. 단장께서는 이러실 때가 아니라 피뇨르 남작으로서 본인 따님을 걱정하셔야 합니다. 영애는 빅토리아와 본인 약혼자를 나란히 세워놓으면 빅토리아에게 달려갈 사람이예요.
친절한 단장님의 배려로 직접 준비해두신 선물을 들고 기사단 건물에서 쫓겨났다. 멍하니 서있으니 지나가던 기사단 소속 마굿간지기가 말을 끌고 나왔다. 등 떠미는 꼴에 하는 수 없이 말에 올라 리클렌 가로 향해야했다. 대로를 따라 천천히 말을 모는데 성에서 마차가 빠져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접견허가를 받은 사람은 빅토리아 하나 뿐이었으니 딱 절묘한 타이밍인 것이다. 마차가 내 곁을 스치는 때에 맞춰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창에 노크하자 문이 살짝 열렸다. 그 사이로 서슬퍼런 단검이 비쳤다.
"누구냐."
"나야."
"괜히 물어봤네."
단검을 들어올려 날 끝을 내게 향하는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침을 꿀꺽 삼키고 앞만 보고 마차를 따라 말을 몰았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빅토리아가 창을 활짝 열었다.
"저택으로 와. 그 선물은 대충 버리고."
"이거 피뇨르 남작께서 보내신..."
"그러니까 버리라고. 알면서 두번 말하게 하지 마."
하긴. 그의 괴멸적인 취향은 주변 사람들의 평판을 힘들게 한다. 그나마 그 딸인 줄리에타 피뇨르는 분위기부터 귀여움이 넘쳐나 잘 어울려서 다행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부인의 취향에 맞추어 멀쩡하게 차려입고 다닌다. 아마 결혼 전에는 제멋대로 입고 다니면서 약혼자였던 부인의 속을 꽤 긁었을 것이다.
"그래도 버리기는 그렇지 않나."
"그것 안 받아도 하루에 수십 개씩 선물이 들어와. 잊어버렸다고 둘러대면 돼."
"권세가는 좋겠네."
나는 주는대로 받아 써야 하는 처지인데. 어떻게 상관이 준 걸 버릴 수가 있니. 안 하더라도 저택에 모셔둬야 해. 한참 뚱하니 쳐다보던 빅토리아는 내 목에 매달린 커프스를 보고 이마를 짚었다.
"얼굴을 그렇게 쓰면 어떻게 해?"
"내 형편에 이런 것 살 여유가 어디있어."
"내가 정말 못 살아. 어디가서 그러고 다니면 널 추천한 내가 어떻게 되겠어. 당장 사람을 불러서 네 옷을 몇 벌 맞춰야겠다."
맞춤복. 그걸 입어본 지가 얼마나 됐더라. 아마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나 입었을 거다. 그러면 벌써 12년은 된 건가.
"일단은 급한대로 기사단 정복을 입고 다니렴. 내일 오메르드 저택으로 사람을 보낼테니 그 사람이 해주는 대로 입어. 그리고 피뇨르 남작이 준 것들은 전부 태워버려."
"나름 비싼건데."
"내가 또 쓰러져야 내 말을 들을 거니?"
"알았어."
네가 또 쓰러지면 그때는 내가 정말로 두 리클렌 공자에게 죽는 날이야. 그냥 내가 양심이 조금 아프고 말게. 제발 건강하렴. 머리카락이 전부 하얗게 세고, 숫가락도 못 들 정도로 늙어도 절대로 나보다 먼저 죽지 마. 당장 커프스를 떼서 감추자 한결 편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건가. 남자가 프릴 좀 달았다고 죽지는 않는데.
리클렌 가는 그 권세만큼 황성에서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 앞에 멈춰선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말에서 내려 에스코트를 위해 돌아선 순간 내 앞에 기가 막히게 나랑 닮은 사람이 서 있었다. 복장마저 똑같았다면 도플갱어라고 검을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태연하게 손을 뻗어 빅토리아를 에스코트한 마법사가 그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녕. 보고싶어서 왔어."
너는 바보니...? 그 사고를 쳐 놓고 어떻게 그렇게 인사를 해... 방긋 웃고 있지만 저게 웃는게 아니라는건 아마 메리가 가장 잘 알거다.
"나도 보고싶었어. 얼른 들어가자."
빅토리아는 나와 메리의 손을 양손에 쥐고 성큼성큼 저택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온 리클렌 가에 대한 감상에 젖기도 전에 할말을 잃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티모시 리클렌을 지나쳐 제 방으로 들어간 빅토리아는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문을 잠갔다.
"방음마법 걸어."
메리는 손뼉을 짝 치더니 두손을 입에 모았다.
"네 사람이서 같이 쓰는 비밀일기장!"
갑자기 손을 펼쳐 외치는 말이 너무 뜬금없어서 메리를 쳐다봤다.
"... 그게 마법이야?"
떨리는 목소리로 빅토리아가 물었다.
"응. 사실 주문 없이도 쓸 수 있는데, 스승님이 마법 쓰는 버릇이 잘못들었다면서 고칠 때까지 빼놓지 않고 말하래."
"세상에. 나는 마법사들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길드에 가면 더 부끄러운 주문을 외우는 사람도 많아."
"그래... 그런데 사고는 수습도 안 하고 수도에 와?"
부채로 험하게 매질하는 빅토리아를 피해 내 뒤로 숨으며 메리가 외쳤다.
"아니야! 길드에서 파견된 현장 조사단으로 온 거야!"
"네가? 이제 여섯 달 밖에 안 된 네가?"
"며, 명목상 내가 최초 발견자니까."
빅토리아는 내 뺨을 후려치려던 부채를 가까스로 멈추고 메리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래. 그건 이해 해 줄게. 그래도 내가 분명히 쥐죽은 듯 있으라고 했는데 멋대로 일을 벌인 건 용서 못 해."
다시 부채를 들어올리는 빅토리아 앞에 쏜살같이 튀어나와 두손을 번쩍 들고 무릎을 꿇은 메리는 배낭에서 집안 형편에 안 맞는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침착하게 업드리며 두손으로 높이 상자를 받들었다. 그때까지 눈치만 보던 클라렌스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상자를 열었다. 저것을 뭐라고 부르더라? 하여튼 마법도구다. 본래 용도는 분명히 호신용인데, 귀족들 중에 간혹 저렇게 생긴 걸 가지고 노는 취미가 있는 사람도 들었다.
빅토리아도 깜짝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자를 쳐다봤다.
"세상에. 이런 귀한 걸 어디서 구했을까."
"우리 스승님 창고에 많아. 멀쩡한데 추적마법이 안 걸려있어서 그냥 들고왔어."
잠깐만. 그거 장물이라는 이야기 아니니, 메리?
"잘했어. 나 이거 꼭 가지고 싶었어. 에스메랄다는 있거든."
"잘했지? 그럼."
"그래도 용서는 안돼. 넌 혼나야해."
"살려주세요."
태어나서 메리가 저렇게 사과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우리 애가 잘못하기는 했어도 나쁜 마음 먹고 한 건 아닌데. 저렇게 풀이 죽어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빅토리아가 노려보든 말든 메리를 일으켜세워서 끌어안고 잘 쓰다듬었다. 우리 애가 참 착한 앤데 집안 형편때문에 많이 엇나가서 이렇게 됐어. 어릴때는 안 이랬어.
"내가 잘못 키웠어. 내가 대신 혼날게."
"됐어. 무마할 방법은 마련해뒀으니까. 메리가 능력껏 잘 망치기만 하면 돼."
"내가 그런거는 정말 잘 하지."
"너무 잘해서 걱정된다. 적당히 해."
"응. 그럴게!"
대체 어떤 방법이길래 쓰러질 정도로 화가 났던 사람이 대수롭지 않아 하는거지?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하다.
"내가 아주 기가 막힌 걸 얻어왔지."
비키가 호호 웃으며 손끝으로 입을 가렸다. 손가락에 걸려있는 반지가 낯설다. 아니, 낯선게 아니라 쟤가 하면 안 되는 거다! 왜 네가 황녀 반지를 하고있니!
"대신 내 목숨이 아주 위험해지게 생겼어. 그래도 메리가 이런 귀한 걸 훔쳐다줘서 한시름 놨다."
"그정도야? 그러면 내가 알버트 빌려줄게. 데리고 다녀."
"안돼. 안그래도 무도회에서 춤 한번 췄다고 피뇨르 남작이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고 있단 말이야."
"아냐. 필요할 때마다 부를게."
음침하게 웃지 마. 너 그러면 정말 무섭다고. 울 것 같은데 여기서 울었다가는 이번이 마지막이든 아니든 평생 놀림감이 될 것이 뻔해서 울 수가 없다.
소식을 듣자마자 어이가 없어서 내 처지도 잊고 뛰쳐나갈 뻔했다. 우리중에 미친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금지된 마법이 사용됐다. 끔찍한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마이어 왕조의 최후가 채 씻겨나가지 않은 시대였다. 그시절에 대한 악몽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세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리클렌 백작도 그중에 하나였다. 이 사실은 빅토리아의 사랑하는 오라버니에게는 엄청난 비극이었다. 왼쪽에는 분노한 아버지, 오른쪽에는 자신이 살려낸 동생. 그리고 곧 범인 검거를 위해 수도로 불려올 또 다른 동생. 나날이 수척해져가는 그는 제국이 보유한 가장 자랑스러운 인재였기에 길드의 조사에 동행해야 했다. 자신의 비리를 수사하기 위해 자신이 안내해야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내가 나쁜 놈이다.
그래도 오라버니가 머리는 잘 쓴 것이, 어줍잖게 빈민가에 숨어들지 않고 오히려 마법 보조 시설에서 일을 벌였다는 거다. 역시 파트론 제국에 유학까지 다녀온 크로노스는 다르다. 마법 관련 범죄율이 40퍼센트에 육박하는 범죄국가에서 듣고 다닌 풍월이 있으니 이런 대담한 일도 벌인것이겠지만.
"크흠!"
내가 한참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 리클렌 가 첫째 오라버니가 헛기침을 한다.
"일단 예상기간의 시설 출입 대장을 복제해주세요."
"대충 자료 수집일 기준으로 일주일 정도로 준비해두었습니다."
역시. 죄를 덮을 생각을 했다면 사흘 정도만 뽑아뒀을 것이다. 주도면밀한 티모시 리클렌이 당일에 마법을 쓰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고, 오래오래 살아오신 자애의 화신 빅토리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깨어났을 때 오라버니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최소 일주일 전에 미리 마법을 써 두었다가 위급할 때 발현하도록 했을 것이다. 내 생각에도 그렇다. 생명을 다루는 마법은 준비기간이 길기도 하고, 빅토리아가 오늘내일 하던 것도 거의 한달 가까이였으니까. 아마 죽던 살던 한번 시도나 해보자는 마음이었겠지. 그덕에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합니다, 오라버니. 덕분에 산 목슴 오라버니를 위해 한번 초개처럼 버려보겠습니다.
명목상 시찰을 왔으니 어느 정도 마법을 썼는지 정도는 측정하고 가야했다. 영감탱이가 이거는 빼돌리면 죽는다고 한 수정구슬을 들고 커다란 마법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 됐다. 잠깐. 이거는? 그럼 내가 자기 창고 건드린거 알고 있는건가? 나 길드로 돌아가면 자진납세 해야겠다.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고 보자.
"마법 사용 흔적을 조사한 후에 회의실로 돌아가서 수사과정을 상의해요."
"편하신대로 하세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같은 모범수한테...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
웃지만 말고 그냥 댁 여동생한테 하듯 해주세요. 제발. 시설 마법진은 말이 마법진이지, 거의 황성 연회장 정도 크기다. 그러니 이런 중요시설이 수도 외곽에 있는거다. 중심부에 있었다가는 아마 길드가 옛날에 벌써 도산했을거다. 이 넓은 곳을 황실 소속 마법사를 데리고 일일히 걸어다니면서 측정해야할 생각을 하니, 왜 여섯 달 차 모범수를 차출했는지 알겠다. 이 수정수가 미친듯이 불길한 보라색으로 반짝이면 그대로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김에 어떤 마법들이 쓰이는지 자료 조사까지 해야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감탱이는 수장 자리 내려놓고 크로노스로 가서 올리비아님이랑 경쟁해야 한다. 마법진 외곽부터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수정구의 반응을 살폈다. 마법진에서 활기를 담당하는 부분에 도착했을 때 보라색 빛이 번쩍였다. 여기서 마법을 쓴 건가. 일단 위치를 기록해두고 뒤쪽을 애써 무시한 채 계속 빙빙 돌았다. 마침내 중앙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월 초에 스승님 연구실에서 봤던 그 보라색 빛이, 그때랑 똑같은 밝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이쪽은 모르기는 해도, 이정도가 되려면 영혼 창조 정도는 되야 한다는 건 알겠다.
도저히 나 혼자 덮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에서 보는 눈이 있는데 입 다물고 있을 수도 없어서 내 뒤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보고 있는 오라버니의 옷자락을 잡았다.
"위, 위원회. 위원회를 소집해야 해요. 당장."
"제가 황성으로 연락하겠습니다."
"네."
오라버니는 짹짹이를 불러내서 열심히 상황보고를 했다. 나는 얼른 구구를 불러서 마나를 잔뜩 집어넣었다. 신호를 보면 스승님이 알아서 찾아올거다. 나는 그때까지 열심히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정리해야했다. 비둘기가 쏜살처럼 날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처다보고 있자니 빅토리아가 생각났다. 어떻게든 덮으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될 것 같아서 기쁨의 눈물이 흐르려는 걸 참느라 혼났다.
리클렌 오라버니의 안내를 받아 이동마법으로 급히 마련된 회의실에 도착했다. 의자에 앉아 이용대장을 살펴보는데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용의자를 굳이 꼽아보자면 티모시 리클렌, 개인 연구를 한다는 크로노스 학파 마법사, 유난히 많이 드나든 베르너 학파 마법사 정도인데. 그것도 첫번째 용의자는 내가 확증을 알고 있어서 꼽은 것이지, 사실상 없는 셈이다.
"메리 오메르드!"
누가 감히 내 이름을 부르나. 고개를 들어보니 저기 우리 오메르드의 자랑 알버트 오메르드가 보인다. 나는 뒤에 티모시 리클렌을 달고 왔는데 쟤는 앞에 피뇨르 남작을 모시고 온다. 내가 이겼다.
"오랜만에 뵙네요, 남작님. 제가 길드에서 선발대로 보낸 조사관이예요."
"언제 이렇게 컸나..."
찡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난 댁하고 즐거운 추억 없네. 다섯 살 이전까지는 종종 만났지만, 내 기억엔 끔찍한 옷을 가져와서 나한테 입으라고 강요하던 어린 날 뿐이다.
"티모시의 보고는 들었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누가 용감하게 시설에서 금지 마법을 거창하게 사용한 것 같습니다. 시기를 추정하는게 문제인데, 그건 제 분야도 아닌데다 아직 미숙해서..."
"우리 티모시가 다 알아서 할 거야. 그렇지?"
그러면서 그의 등을 팡팡 두드리는데,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 대만 더 맞으면 쓰러질 것 같다. 그래도 상급자라고 무시할 수 없어서 힘겹게 대답까지 한다.
"네. 일단 제가 추정하고 있으면, 올리비아 님이 오셔서 인계하실 겁니다."
"올리비아 님 안 오실지도 몰라요."
세상 잃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티모시 리클렌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이랑 싸워서..."
"스승님?"
"클로드 준이요."
내 수행비서 리클렌 씨가 놀란것 같다.
"아! 아르카나!"
새삼스럽게 나를 쳐다보는 피뇨르 남작을 흘겨보았다. 티모시 리클렌이 심각하게 고민하다 짹짹이를 불러내는 걸 무시하고 남작을 쳐다봤다.
"일단 아르카나랑 옥사나는 무조건 올 거예요. 옥사나 학파 수장님이 엄청 화가 나셨던 것 같았거든요."
"다행이군. 우리쪽은 티모시를 빼면 딱히 차출할 인력도 없었네. 나머지는 본인 업무에도 바쁘네."
"생각보다 심각한 일일 수도 있어요. 대충 유지인력만 남겨두고 전부 동원해야해요."
"그건 내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말이야. 일단 폐하께 보고해보기는 하겠네만."
못 데려오기만 해봐라. 내가 우리의 희망이자 자애의 상징인 빅토리아님께 말씀드려서 황녀를 움직여버리겠다. 내가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는줄도 모르고 피뇨르 남작은 알버트 뒤에 따라온 사무관들이 가져온 서류를 뒤적였다.
"요새 우리 쪽도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돼서 한창 난리가 났었는데, 참 공교롭구만."
"그러게요."
공교로울 게 뭐 있나. 저쪽은 정해진 수순대로 일하는 중이었는데, 우리가 비집고 들어가서 이쪽만 더 난리가 난 거다. 아마 저쪽도 뒤집어졌겠지만. 나도 알버트도 야근할 시간이다. 알버트는 어제까지 야근했다던데 이러다 기사도 못 달고 죽는것 아닌가 모르겠다.
"국경에서는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고, 수도에서는 금지 마법의 흔적이 발견되고. 이것 참. 꼭 마이어 시절 같구만."
피뇨르 공작이 얼떨결에 진상을 말했지만 그가 알 턱이 있나. 나랑 알버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않았지만 도리어 티모시 리클렌이 심각해졌다.
"경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응? 그렇지. 아무래도."
그러는 당사자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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