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만우절 기념 2
2019 만우절 기념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남 속이는 것밖에 없어서." "다음은 없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헤루안은 목에 겨눈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제는 검은색이 아닌 흰 제복을 입은 남자를 뒤로하고 떠났다. 그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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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점 기념 리부트전 1기 반전연성 헤루안 시점
터무니없이 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크라헤의 대장이었던 경력은 어디 가지 않았는지 전력을 다한 검을 요령껏 넘겨냈다. 새하얀 제복을 입은 벤자민은 거짓말처럼 웃었다.
"크라헤는 끝이야."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해? 우리가 널 얼마나 믿었는데. 헤루안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삼켰다.
"그리고 맥글라이어도 죽을 예정이지. 지는 해에 매달릴 필요가 있나?"
감히 그 이름을 꺼내? 헤루안은 다시는 부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이름을 부르짖었다.
"벤자민 스크랜튼!"
그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 검은 벤자민에게 어이없이 막혔다. 그의 검로 따위는 전부 외우고 있다는 듯 피해내고, 중심을 잃은 사이에 세게 밀어내 결국 검을 놓치게 했다. 헤루안은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벤자민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찢어진 손아귀에서 피가 흘렀다. 헤루안이 그 손을 말아쥐고 자신을 매섭게 바라보는 순간, 벤자민은 그의 멱살을 잡고 군사용 통로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멀어지는 듯하던 쇳소리가 다시 가까워지고, 그들이 왔던 곳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저쪽이다!"
"배신자를 잡아라!"
누가 배신했다는 말인가? 헤루안은 멈춰버린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어째서 벤자민은 트와베의 제복을 입고 있는지. 왜 자신을 죽이지 않았는지. 모든 것들이 의문 투성이였다. 끌려갈수록 점점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벤자민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삐걱대는 문을 열었다. 폐기물을 성 밖으로 흘려보내는 수로였다. 누가 준비해두었는지 시신을 운반하는 데 쓰였을 작은 조각배가 매여있었다.
벤자민은 헤루안의 품에 권총과 단검, 그리고 금화가 든 주머니를 안겼다.
"멍청하게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은 아니겠죠? 당신은 똑똑하니까."
헤루안 대답할 수 없었다. 벤자민은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던 것 같았다. 헤루안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묶었다. 멍하니 벤자민을 쳐다보던 헤루안은 그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순간 몸부림쳤다. 아주 잠깐의 망설임 후 그는 헤루안을 조각배에 떠밀었다. 쓰러진 그의 위로 짐 위에 뒤집어씌우는 모포를 둘렀다. 그리고 배를 세게 밀었다.
"미안해요. 당신만 빼돌리는 게 최선이었어요."
왜 이러는 건데? 배신했으면 구차하게 살아야 할 것 아니야.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야! 뒤늦게 터진 말은 재갈에 막혀 입안에서 맴돌았다. 멍청하게 도망치지 않고 서 있는 벤자민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멍청하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쫓아오는 이들을 피할 생각도 없는지 허리에 찬 칼자루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찾았다!"
추적해온 병사들 뒤에 지유현이 보였다. 일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벤자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유현이 권총을 뽑아 들던 그 순간까지도. 총성이 수로 안을 가득 메웠다. 믿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언제나 검에 기대어 살아왔고, 검에 스러질 것이라 믿었던 그가. 벤자민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병사들에게 끌려나가는 그 순간까지.
헤루안의 비명은 물소리에 씻겨 내려가 흔적도 남지 않았다.
*
헤루안이 밧줄을 푼 것은 조각배가 말을 타고 꼬박 한나절을 달려야 수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도착했을 때였다. 나루터에 겨우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기에 부두는 한적했다. 조용히 짐을 챙기고 몸을 숨겼다. 몸을 덮었던 모포로 옷을 대충 감추고 시가지로 들어섰을 때 마침 전령이 광장에 무언가를 붙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일 법하 장소마다 전단을 붙이고는 급하게 떠났다.
전령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 헤루안은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반역자 벤자민 스크랜튼을 금일 일몰무렵 교수형에 처한다.' 하늘이 무너졌다.
그때부터 헤루안은 정신없이 수도를 향했다. 짐마차를 얻어 타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움직였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노을마저 자취를 감춘, 달마저 뜨지 않은 새카만 밤이었다. 인적 하나 없는 광장에 처형대가 세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