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재활

[7회] 2017년 4월 하반기

Kinen 2017. 4. 30. 22:12
 오라버니의 시도는 소용없는 짓이였다. 옥사나는 혼자 오지 않았으니까. 갑작스러운 소란에 이쪽을 쳐다보던 크로노스가 나한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내 주위를 배회하며 시비를 걸 준비중인 샬럿 노먼말고는 딱히 붙잡을 사람도 없었다.
 "노먼 영애. 와주셔서 감사해요."
 "영애 얼굴은 보고싶지 않지만 부인의 체면을 생각해서 온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주위를 연신 둘러보는 것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왔다고 대놓고 광고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자 네가 찾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단다. 드레스 자락을 부여잡고 초조해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부모님이 막았는데 몰래 뛰쳐나온 모양새다. 어쩐지. 드레스가 연회에서 입기에는 조금 수수한 편이더라니.
 "요새 연회에서 늘 알버트의 에스코트를 받았는데, 오늘은 혼자 있으려니 조금 외롭네요."
 "공자를 귀찮게 하지 마세요!"
 "미안해요 영애. 부탁할만한 사람이 알버트 공자 밖에 없어서요. 그애도 아는 영애라고는 나밖에 없는걸요."
 내 인간관계는 의도적으로 좁았지만 알버트는... 정말 가슴아픈 일이다. 이 편협한 귀족사회가 잘못했다. 그래도 남자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심하지는 않은 모양인데, 문제라면 메리가 문제지. 잔뜩 침울해져서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손을 뻗어 다독여주니 또 째려본다.
 "상심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알버트도 나한테서 독립해서 보다 아름답고 현명한 영애와 함께하는 날도 오겠지요."
 적어도 넌 아니야. 노먼은 부르르 떨다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난 당신이 너무 싫어요."
 "동감이예요."
 제발. 이 넓은 파티장에 프라우의 모든 영애들이 모였는데 자꾸 나한테만 들러붙지 말아줘. 샴페인을 들고 걷고있는 웨이터를 잡아 두 잔을 들었다. 그리고 한잔은 노먼에게 건넸다. 마음에 안 들지만 호스트의 딸이여서 참는다는 눈빛이다.
 "부디. 우리가 다음 파티에서는 마주치지 않기를."
 "부디 내 앞길에 영애가 나타나지 않기를."
 전투적으로 샴페인을 한모금 넘기는 노먼을 뒤로하고 나는 장소를 옮겼다. 저 여자와 같이 술을 마시면 아마 내일 침대에서 못 일어날거다. 프란님. 저 가여운 미래를 위해 힘써주세요. 부디. 잔을 단숨에 비우고 쓰린 속을 쓸어내리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앞에 서 있었다.
 "하실 말 있으신지요?"
 "리스 에들턴입니다. 그날은 무사히 돌아가셨는지요?"
 "당연하죠. 알버트는 제 친한 친구랍니다."
 "아. 알버트 경을 만나러 오셨던거로군요."
 이게 무슨 일이지. 우리 백작부인께서 평민을 초대하셨을리가 없는데. 초대장 없이 혼자서는 못 들어올테니 작은 오라버니가 초대했나? 그러기엔 그간 언급 한번 없었는데. 내 머리가 복잡하든 말든 그는 제 할 말만 했다.
 "달빛 아래 잠깐 뵈었을 때도 아름다우셨지만 다시 뵈니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좋겠다. 목소리까지 잘생겨서 생각에 방해되니까. 저절로 리스 에들턴에게 향하는 시선을 애써 돌려 파티장을 둘러봤지만 이 망할 오메르드는 머리카락 한올도 보이지 않는다.
 "감사해요."
 "아닙니다. 그런데 아가씨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가씨... 잘 하다 이런 곳에서 은근히 평민인 티가 나는구나.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지. 그래도 내가 '프라우 미친 년' 이었던 과거를 모르는 사람이니 첫 단추는 내가 억지로라도 잘 끼워보자.
 "저는..."
 "비키! 여기에 있었어... 요? 한참 찾았어요."
 "... 네. 나도 한참 찾았어요 알버트."
 너를 죽이려고 말이야. 에들턴을 등지고 돌아서 주먹을 쥐어보였다. 흠칫 떨며 한걸음 물러선 알버트는 그제야 리스 에들턴을 발견한 모양이다.
 "어? 리스 경. 사라졌다 싶었더니 비키와 같이 있었네요. 빅토리아. 이쪽은..."
 "알버트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이에 벌써 알려주셨어요. 소개가 늦었습니다. 빅토리아 리클렌입니다. 파티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인사하자 당황해서 고개를 꾸벅 숙인다. 흠. 아직 상류사회 예절에는 익숙하지 않구나. 하긴. 훈련, 퇴근만 반복할테니.
 "아. 백작가의 아가씨셨군요."
 "네. 즐거운 파티 되시길. 알버트는 잠깐 나 좀 봐요."
 먼저 걸음을 옮기니 말대답도 않고 잘 따라온다. 적당히 에들턴과 떨어져 느긋하게 걸으니 알버트가 가까이 붙었다.
 "알버트."
 "어, 응."
 "공자가 데려온거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떨었다. 혼내려는 건 아닌데...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눈동자가 마구 떨린다.
 "다음부터는 말 좀 해요."
 "네 누님."
 "난 공자의 누이가 아니지만 누이 친구니까 봐줄게요. 그나저나 에들턴 경과 한곡 추기로 한 영애는 있는거죠? 사교계 첫 등장에 춤 한 곡 못 추고 돌아가는 건 너무 가슴아픈 일이예요."
 "그게..."
 설마 너. 아무 생각 없이 온 거라면 정말 가만히 안 둘거야. 왜 내 눈을 똑바로 못 봐? 빨리 대답해. 헛기침을 하며 재촉하자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한다.
 "노먼 영애한테 부탁... 해볼까?"
 "제발. 다음부터는 생각 좀 하고 와요. 오늘은 호스트인 죄로 내가 책임질게요."
 "비키..."
 혼자 감동해서 눈가가 촉촉해진 걸 버려두고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들이 오늘도 알버트와 춤을 추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음. 평민이랑 춤을 추고 곧바로 오메르드랑 췄다가는 쫓겨날지도. 아니 평민과 춤을 출테니 혼날 건 일단 각오해야 한다.
 "대신 공자와 추는 건 조금 힘들어요."
 "괜찮아요! 내가 잘못한거니까."
 "알았어요. 대신 딴소리 하기 없어요."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신나게 흔든다. 너 진짜 어른 되려면 한참 멀었구나. 어디 신사가 영애의 손을 함부로 잡고 흔들어? 째려보려고 얼굴을 쳐다보니 환한 얼굴로 웃고있다. 아 눈부셔. 그래. 네가 다 하렴.
 아직 연회는 한참 남았다. 플로어에 사람이 많을 때 섞여서 얼른 추고 끝내야 그나마 덜 혼나겠지. 그런데 설마 춤 신청까지 내가 해야하는건가? 좋아서 실실거리는 알버트를 은근히 쳐다보니 고개를 갸웃하다 놀라 뛰어간다. 기다리는 척 살짝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니 에들턴이 깜짝 놀라서 손사레를 친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알버트 오메르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오메르드가 아니다.
 누가 이 남자를 평민이라고 생각할까. 어지간한 귀족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빛나는 금발에 나도 처음에는 모르는 귀족이 있었나 고민까지 했으니까. 리스 에들턴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내 앞에 섰다. 귀엽기도 하지. 하긴. 알버트도 처음 내게 춤 신청을 할때는 고개도 못 들었지. 내가 첫 상대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장난스럽게 하지 말 걸 그랬다.
 "저, 그... 괜찮으시다면 저와 춤을 춰 주시겠습니까?"
 애써 곁눈질로 알버트에게 잘 했는지 확인받으려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컨닝하려고 해도 알버트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신청하라고 말만 하고 손은 내밀라고 가르쳐주지 않았구나. 내가 너한테 너무 많은걸 기대했다. 미안해 알버트.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버릇 했더니 네가 나쁜 습관이 생겼어. 내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불안해서 눈을 데구르르 굴린다.
 "춤은 잘 추세요?"
 "아뇨. 기사단에서 급하게 배운 정도로만..."
 큰일이네. 리클렌의 금지옥엽이 꼴사나운 춤을 췄다고 온 수도에 퍼지면 어쩌나. 어쩌겠어. 내가 어떻게든 해봐야지.
 "걱정마세요. 제가 아주 잘 추니까요. 저만 따라오세요."
 손을 내밀자 그제야 화들짝 놀라 손을 받쳐든다. 내가 먼저 걸음을 떼니 내 얼굴이 향한 방향으로 천천히 걷는다. 하라는 대로 잘 하고, 참하네. 내가 서자 바로 멈춰 나를 돌아본다. 잔뜩 긴장해서 나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내 얼굴 닳겠네. 어려운 춤은 아니었다. 에들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적당히 다가갔다.
 "걱정마세요. 정말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틀려도 잘 모르니까요."
 아니다. 스텝 하나 빠지는 것까지도 다들 눈치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남자가 먼저 발을 떼야하기 때문에 에들턴이 움직이는걸 기다렸다. 그는 못 춘다고 걱정하던 것이 무색하게 과감하게 움직였다. 차라리 고맙다. 소심하게 움직이면 내 공간이 안 나와 덮어줄 수가 없으니까. 썩어도 준치라고, 몸을 쓰는 일을 하다보니 기본은 하겠지. 라고 생각한지 1분도 되지 않아 전면 철회했다. 이 남자는 대체 지금 춤을 추겠다는건지, 아니면 걸음을 걷겠다는건지.
 "에들턴 경. 너무 긴장하셨어요."
 듣기는 한건지 대답도 못하고 걸음만 옮긴다. 내 걸음도 따라오지 못해서 발을 몇번이나 밟힐 뻔했다. 드레스가 가려줘서 망정이지. 대신 드레스 자락이 지저분해졌다. 이러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우리만 쳐다보겠어. 내가 프라우의 망나니던 시절에도 이정도로 시선을 모으지는 않았는데. 이러다 오라버니들한테 들키면 이 사람 사회생활은 끝이다.
 "경. 다 잊고 그냥 주위 사람들이 하는걸 흉내내기라도 하세요. 요새 기사단에서 그런 훈련 하신다면서요? 선임 기사 옆에 서서 똑같이 따라한다거나."
 "따라하기만 해도 됩니까?"
 "네. 그렇다고 옆에서 어정쩡하게 추고 있는 남작 말고, 저쪽에서 우아하게 추고 계시는 디쳇 후작님 같은 분을 따라하세요."
 계약서라도 작성하는 것처럼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디쳇에게서 떼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조금 사람처럼 춘다. 한숨 돌리고 알버트 쪽을 쳐다보니 창백하게 질려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너는 나중에 보자꾸나. 일단은 이 남자한테 집중해야지. 한바퀴를 돌 동안 디쳇 후작만 쳐다보던 에들턴은 대충 감이 잡혔는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좀 나아지셨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이런 곳에 올 일이 많아지실텐데, 파티장에 도착하면 꼭 춤부터 확인하세요. 사교댄스는 한종류가 아니랍니다."
 "네?"
 "하나뿐이었다면 그 많은 영애와 공자들이 왜 어릴때부터 교육받을까요?"
 빛나는 얼굴이 순식간에 실의에 젖어 침울해졌다. 내가 국가적 손실을 불러왔구나. 안타까운 마음에 어깨에 얹은 손을 토닥였다.
 "걱정마세요. 공자는 상대 영애에게 웃으며 손을 건네면 됩니다. 그러면 영애들이 어떻게든 해주겠지요."
 "충고 감사합니다. 리클렌... 영애."
 "별말씀을요."
 알버트가 그 짧은 사이에 교정을 시켜 아가씨 소리를 듣기는 이제 글렀구나. 이것 또한 국가적 손실이다. 망나니 시절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막고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한걸음 물러나 살짝 고개를 숙이는 에들턴에게 인사했다.
 "겨우 한 번 추고 이정도로 능숙해지시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하긴. 한번 춘 사람이 이렇게 잘 춘다는 걸 알면 아마 온 프라우 귀족들이 쫓아와 항의할거다. 그 비법을 내게 팔아! 물론 나는 인생이 5회차이니 그정도는 쉽다.
 "정 어렵거든 알버트에게 부탁하세요. 제가 괜찮은 가정교사를 구해드리죠."
 "그렇게까지는..."
 "다 필요한 날이 언젠가는 올테니까요."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이다. 내가 당신이 파트론으로 도망치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노력하고 있어요. 내 물밑 도움을 알기는 하는지 모르는지 넘겨올린 머리가 어색한 듯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연신 귀 뒤로 넘긴다.
 "빅토리아!"
 아. 빈센트 오라버니인가. 하필이면 둘째 오라버니가 봐버렸나보네. 이 아무것도 모르는 게 매력인 남자는 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지도 모르고 빙긋 웃는다.
 "가족분께서 부르시나봅니다."
 "네. 그럼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시길."
 몸을 돌리자마자 알버트에게 눈짓했다. 너도 저 목소리를 들었으면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알겠지. 알버트도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연회장 정 반대편에서 하늘이 무너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오라버니에게 찾아가 이 사태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내 미래는 둘째치고 리스 에들턴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몹시 떨고있는 오라버니들의 팔을 잡고 말했다.
 "파트너가 없대잖아. 불쌍하기도 하지."
 저 고운 얼굴을 우리 파티에서 제일 먼저 선보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오라버니? 속마음은 감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었다. 오라버니는 찝찝한지 한참 쳐다보기만 했다.

 어느날 저택으로 편지가 한 통 왔다. 편지를 받자마자 빅토리아는 잔뜩 긴장해서 한참 봉투를 붙잡고 있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그동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반쯤 잊고 지내던 메리 오메르드의 편지였으니 말이다. 빅토리아 아가씨께서는 떨리는 손으로 페이퍼 나이프를 들고 한참 망설이다 결국 내게 넘겼다. 어차피 무슨 방향이든 아쉬운 소리 뿐일텐데 왜그리 걱정하는건지. 봉투를 열어 건네니 심호흡을 하고 편지를 펼쳤다. 천천히 읽어내려가든 아가씨는 어쩐일인지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가볍게 종이를 내려놓았다.
 "오메르드 영애께서 잘 지내신다는 모양이지요?"
 "그렇기는 한데..."
 답지 않게 말끝을 늘이며 곁눈질을 하신다. 메리가 무리한 부탁이라도 했나? 그 애도 양심이 있지 당분간은 조용할 줄 알았는데. 편지를 서랍에 넣고 아가씨는 손수 차를 내오셨다. 이 부담스러운 상황에 샐리가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는데 빅토리아는 묵묵부답이다.
 "저, 아가씨?"
 "클라렌스. 내가 내 하녀들중에 널 제일 아끼고, 믿는 거 알지?"
 "... 네 아가씨."
 이거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안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안돼요 아가씨. 날 또 못살게 굴려는거죠? 뒷골목 같은데 호위도 없이 혼자 보내면서? 그리고 신분으로 날 압사하려는거죠? 사기꾼처럼?
 "메리가 개인적으로 부탁한 물건이 있는데... 사람을 시켜서 보내기는 걱정이 되는구나."
 속으면 안돼. 속으면 안돼. 저 순진한 척 하는 얼굴에 속지마 클라렌스.저 사람은 몇달 전까지만 해도 프라우에서 이름을 모르면 파트론 제국 세작이라고 불릴 정도였어. 속지...마... 하지만 저 가여운 얼굴에 우리 막내가 겹쳐보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숀이 우물쭈물하면서 말한다.
 "도와주면 안돼?"
 "네. 할게요."
 아. 클라렌스. 너는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어떻게 숀이랑 저 잔악무도한 빅토리아 리클렌을 겹쳐볼 수 있지? 때는 이때다 하고 편지는 지금 막 받았는데 어떻게 기가 막히게 준비해둔 상자를 딱 꺼내놓았다. 이건 분명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둘이 작당을 한 거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지? 그래. 원래대로였으면 한참 전에 울면서 고향에 가다 마차 전복사고로 죽었을거라고 하니, 내 목숨줄 늘려준 감사함을 생각해서 참자.
 "마차는 준비해주실거죠?"
 "당연하지. 설마 그 먼 곳까지 말을 타고 가라고 하겠니?"
 너라면 가능해 이 못된 귀족같으니. 네 피는 무슨색이니? 메리 오메르드. 마법사면 좀 마법사답게 잠깐 들러서 가져가고 좀 그러라구요. 이 못된 귀족들.
 "아가씨. 저 없으면 어떻게해요..."
 "너 없이 16년을 살았는데, 샐리랑 사이좋게 잘 지냈단다."
 "아가씨!"
 어떻게 나한테 그래. 내가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수발도 들고 심부름도 하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정말 억울해서 오메르드에 취직하던가 해야지. 적어도 알버트는 날 이렇게 대하지는 않을거야. 이 못된 사람들.

 "그렇게 제가 오게 되었답니다."
 "아가씨도 상전 때문에 고생이 많네."
 먼지를 뒤집어쓰고 비단에 곱게 감싼 상자를 들고있는 나를 짠한 눈으로 바라보던 마법사들이 시선을 돌렸다. 우당탕탕 소리가 한참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먼지와 함께 나타난 마법사는 한참 콜록거리더니 망토를 풀럭였다.
 "메리 아가씨! 부탁하신 물건 가져왔어요!"
 "응? 벌써? 빠르다. 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고개를 흔들며 먼지를 털어내고 나를 쳐다본 메리는 기겁하며 멀찍이 물러섰다. 박수 세번을 치니 위에서 바람이 쏟아져내린다. 눈을 꼭 감고 가만히 서 있으니 곧 바람이 멈췄다. 눈을 뜨니 먼지가 사라져 대충 볼만해졌다. 그 대가로 옷은 전부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그제야 상자를 받고는 그자리에서 포장을 풀었다. 그리고 상자를 열었다. 형형색색의 과자들이 가득했다. 뭐지. 난 겨우 저걸 배달하려고 제국의 반을 가로지른건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수가 있어요 빅토리아 아가씨.
 "역시 리클렌 백작가 쿠키가 맛있어. 너도 하나 먹어."
 "네, 메리 아가씨."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일단 조금 쉬어."
 "네."
 일단? 왜 일단이지? 빅토리아는 물건만 가져다주라고 했는데. 그럼 쉰 다음에 밥도 주고 보내는건가? 메리가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아가씨의 노력은 헛것이 아니었어요... 메리가 띄워준 화살표를 따라가니 웬 방이 있었다. 침대까지 있는걸 보니 편히 쉬다 가라는 건가봐. 감동이야 메리...  라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잠을 자면 안됐다. 수상함을 눈치채고 바로 도망쳐야 했다. 새벽같이 찾아와  못살게 굴던 메리가 다짜고짜 나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들! 여기 싱싱한 모르모트가 왔어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까지는 아직 기회가 있었다. 바보같이 무늬만 귀족인 메리 오메르드의 눈치를 보다가 천금같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마법사들은 눈빛이 물 만난 고기처럼 뒤집어져서 양떼처럼 몰려왔다. 저마다 조잡한 인형을 들고와 내 앞에 들이밀어댔다.
 "내 인형을 봐주세요!"
 "그 흉기 치워! 내 인형이 먼저야!"
 "살려주세요! 저는 연약한 어머니와 동생 여섯명을 부양해야해요!"
 내가 여기서 이상한 실험을 당하다 죽으면 막내 치료비 때문에 어머니가 일을 하셔야하고, 그러면 동생들이 방치되고, 가정이 무너지고...제발 살려주세요! 손을 싹싹 비비면서 빌어도 이 잔악무도한 악마들은 들은체도 안 했다. 아. 나는 이제 이렇게 죽는가보다. 어머니. 편지 한 장 안 남기고 가서 죄송해요. 모든건 빅토리아 리클렌 때문이니 꼭 피해보상 받으시구요... 적극적으로 항의해서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리세요...
 "선배들 뭐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잖아!"
 나를 이 지옥에 던져놓고 사라졌던 간악무도한 오메르드가 돌아와 악마들을 몰아냈다. 채찍을 휘두르며 나타나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몰아내고는 나를 세상에 둘도 없을 보물처럼 끌어안았다.
 "이분 윗사람이 우리 밥 먹여주시는 분이란말이예요."
 "이럴수가! 미안해요 아가씨! 우리가 잘못했어요!"
 순식간에 신분이 상승했다. 아버지가 사기꾼에게 당하고 집안이 망한 뒤로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가씨라는 말까지 듣는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길래 이러는걸까.
 "오, 클라라. 마법이라고는 밤마다 거리를 밝히는 전등밖에 못 봤을 이 순박한 시골아이야.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건지, 아니면 정말로 잊어버렸는지. 우리가 왜 죽고 또 태어나 죽는지 잊어버린건 아니겠지. 기억력이 걱정스러운 메리 오메르드 아가씨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메리 아가씨. 갑자기 친한 척 하시면 곤란해요. 우리 아가씨도 아직 저를 애칭으로 부르시지 않는걸요."
 "아직도? 걔도 참... 하여튼 와줘서 정말 고마워. 어젯밤에 잠은 잘 잤니?"
 "물어보시는게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요. 덕분에 정말 잘 잤어요."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정말 깊은 잠을 잤다. 원래대로면 밤마다 한번쯤은 아가씨가 별안간 나타나 "클라렌스. 에스메랄다가 죽었어. 마이어 부흥파가 왕당파를 모두 죽여버리려고 해. 그러니까 우리 다같이 죽고 다음을 도모하자." 라며 심장에 칼을 꽂고는 했다. 처음에는 놀라서 깬 이후로 다시 잠들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웠지만, 그것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니 일과가 되어 다시 잠든다. 처음에는 아침에 빅토리아를 보는 게 힘들 정도였지만 이제는 나를 죽이고 나면 그다음은 자살일텐데 얼마나 힘들지 안쓰러울 뿐이다. 그런 꿈을 안 꾸었으니 얼마나 달콤한 잠이겠어요, 메리 아가씨.
 "다행이네. 이제 편히 자기는 힘들텐데."
 "네?"
 "설마 비키가 아무것도 안 알려줬어?"
 "네. 저는 그 간식상자를 전달하라는 명령으로..."
 "세상에. 그런 못된 애를 친구삼아서 목숨 걸어도 되는건지. 어려운 건 아니야.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고, 우리가 다 알아서 할거야. 몸이 위험한 건 아니고, 그냥 정신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고..."
 "잠깐만요, 아가씨. 절대로 위험하면 안되는 게 위험해질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응. 근데 아마 괜찮을거야. 가장 위대한 마법사인 우리 영감님이 만들어준 이 보자기가 있으면!"
 그렇게 말하면서 메리는 제 어께에 둘러맨 하얀 보자기를 펄럭거렸다. 매듭이 살짝 풀려 어깨에서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재빨리 잡아채 목이 졸릴 정도로 졸라맸다.
 "휴. 내 목숨줄."
 "많이 위험한거잖아요!"
 미쳤어. 내가 왜 리클렌 가에 들어간걸까. 그냥 고향에 돌아가다 마차 사고로 죽을걸! 하찮은 목숨 조금 늘려보려다가 더 끔찍하게 죽을 자리로 들어왔어!
 "다행히도 내가 우리 스승님의 마법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베낀단다. 그래서 이거랑 똑같은걸 준비했지. 내가 하루동안 두르고 다녀봤는데 괜찮았어. 음.... "
 왜 내 눈을 똑바로 못 봐요. 왜 말꼬리를 늘여. 절대로 괜찮기만 한 건 아니네. 하지만 오메르드는 이름뿐이라지만 일단은 자작가고, 나는 쫄딱 망한 평민이니 예이, 하고 넙죽 업드리는 수밖에 없다. 우리 아버지는 돈 많을 때 작위 하나도 안 사고 뭐 하신걸까.
 "할게요. 대신 죽으면 꼭 가족들을 책임져야해요."
 "우리 가문 예산을 생각해서라도 꼭 살려줄게."
 "네. 부디..."
 그리고 그날부터 악몽인지 저주인지 모를 것들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의자에 앉아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곰인형을 끌어안고 고개를 흔들었다. 곰인형의 배를 꾹 누르면 자장가가 흘러나오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라진다. 거울을 들어 얼굴을 쳐다봤다. 퀭한 눈에 다크서클이 한마디는 내려왔다.
 "클라라. 아직 오늘의 할당량이 안 끝났는데."
 저 냉혈한 오메르드는 내 정신이 나날이 비쩍 말라가는데도 신경쓰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한다. 첫날 내게 미안함 가득한 눈빛으로 손을 잡아주던 여자는 죽었다. 내가 마음속에서 백번쯤 죽였다.
 "싫어요! 지쳤어요! 그렇게 급하면 메리 아가씨가 하세요!"
 "미안. 그건 안돼. 조금만 더 하면 성과가 나올 것..."
 "싫어요! 난 프라우로 돌아갈거야!"
 벌떡 일어나 달렸다. 방에서 멀어질수록 숨이 턱턱 막히고 몸이 무거워졌다. 왜지? 내가 힘들기는 했어도 몸은 편안했는데. 바닥에 주저앉아 색색 숨만 쉬었다. 아. 한걸음만 더 걸어가면 바깥인데. 마구간인데. 허리에 앞치마처럼 두른 보자기를 움켜쥐었다. 정말 나한테 뭔가 했어? 그 징그러운 인형들을 들이민 게 내 미적 감각을 프란님의 곁으로 보내는 게 아니고, 뭔가 수작을 부리는 거였어?
 "괜찮아?"
 "괜찮은 것 같아요?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
 "음. 똑같이 베꼈는데... 잠깐만.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여기에 잉크 흘렸어? 어떤 인간이야?"
 보자기를 쥐고 한참 중얼거리던 메리는 "콜린!"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손수 보자기의 얼룩을 지워줬다. 순식간에 숨도 쉬어지고, 몸에 힘도 돌아왔다. 메리가 부른 콜린인지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한참 어린 사람 앞에서 넙죽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영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보아하니 지금 나는 까맣게 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얼른 프라우로 돌아가야지. 이 미친 동네는 더이상 사양이야. 아, 우리 막내 숀. 보고싶다 아가.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 다리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감겼다. 다리를 내려다보니 허리에 감겨있던 보자기가 풀려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거 꼭 해야 하나? 아까 얼룩 하나를 지운 것 하나 때문에 몸이 가뿐해진 걸 보면 꼭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지. 손을 뻗은 순간 불어온 바람에 그대로 날아갔다. 그 순간 발목부터 휘감아 올라온 무언가가 내 목을 졸랐다. 목을 더듬어도 아무것도 없는데 졸려서 버둥거렸다. 점점 힘도 빠지는데 쫓아온 두 인간들은 눈이 휘둥그래져 손가락질이나 해댄다.
 "세상에. 콜린 선배가 성공했어요."
 "메리.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맞다! 보자기, 보자기 어디갔어!"
 눈물이 절로 흘러내리고 있는데 태연한 두사람은 두리번거리고 있다. 결국 포기하고 나한테 쪼르르 달려 목에 묶어놓은 보자기를 돌려 내 목에 둘렀다. 세상에. 그러니까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해졌다.
 "내가 말했잖아. 위험하다고."
 "... 미쳤어? 어떻게 사람한테 이런 짓을 해!"
 "말했잖아.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괜히 도망치지만 않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걸."
 잊고 있었다. 오메르드 이 인간들은 하나에 미치면 나머지는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었지. 그간 마법 관련으로 엮일 일이 없어서 멀쩡한 줄 알았어. 빅토리아 나 너무 무서워. 빨리 돌아가게 해줘...
 "그래서 어떤 기분이였어?"
 "아가씨! 지금 그게 놀란 사람한테 할 말이에요?"
 "엄청 중요해. 우리가 유도한 대로 마법이 걸린게 아니면 못 풀지도 모르니까."
 내 목숨이 무슨 야바위도 아니고... 진짜 내가 다시 오메르드랑 엮이면 사람이 아니다.
 "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내 몸을 타고 올라와서 목을 졸랐어요. 그리고 막 무언가에 빨려들어가는 기분도 들었고..."
 "세상에. 우리 콜린 선배 정말 마법천재네."
 "음... 그냥 학파의 차이가 아닐까."
 이 미친 사람들이 떠들거면 날 안에 데려다주고 떠들면 좋겠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냥 돌아가서 아까 그 의자에 앉아있고 싶어. 몰려온 사람들이 어디서 주웠는지 내 보자기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보자기를 머리위에 뒤집어쓰고 한숨을 푹 쉬고 있으니 어디서 났는지 모를 코코아를 건네준다.
 "콜린 선배가 찾았으니까 이제 우리는 영감님한테 죽을 준비만 하면 되겠네요."
 "그래서 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영혼을 조금..."
 눈도 안 돌리고 태연하게 메리가 대답했다. 아니, 내 영혼을 뭐? 저 귀족이 진짜 미쳤나 어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가 있어? 어떻게 나한테 이래?
 "메리 오메르드!"
 "진짜로 복제한 건 아니고, 그냥 건강한지 검사하는거로 바꿨어. 그쵸, 선배?"
 "아니. 그대로인데... 진짜 위험했어."
 "야, 콜린 마커스!"
태연하던 메리가 창백해져서 빽 소리쳤다. 설마... 너도 몰랐니... 길드 소속 맞아? 혹시 왕따당하고 있니? 차가운 눈길로 메리가 멱살을 쥐고 흔드는 마법사를 쳐다봤다. 콜린 마커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했더니 이번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둘 중에 하나구나. 왜 용의자로 지목됐는지 알겠다. 중간이 없구나, 중간이. 아 혈압 올라. 빅토리아 아가씨. 늘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서 걸핏하면 쓰러졌나요.
 "쟤가 지금 하녀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남부 지방 유지 딸이란 말이예요!"
 쫄딱 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도저히 안팔리고 남은 땅에서 소출이 있어 내가 이정도만 벌어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산다. 내 말을 듣고 마법사들이 화들짝 놀라 마법으로 내 전용 푹신푹신한 의자를 대령해 앉혀줬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평민으로 태어나 이런 호강을 누려도 될 지 걱정될 정도로 편하게 건물 안으로 돌아와 세상에서 제일 비쌀 것 같은 부채질까지 받으며 아르카나 학파 마법사들이 크로노스 학파 하나를 괴롭히는 걸 보고있으니 에스메랄다와 빅토리아가 왜 권력맛을 못 놓는지 기억날 것도 같고... 기억해서 뭐하나. 나는 평민인데.
 "메리 아가씨.  일단 보고부터 해야 하지 않으세요?"
 "아. 그렇지."
 이제는 너무 자주 봐서 반가운 하얀 새가 허공에 뿅 나타났다. 새한테 뭐라고 한참 재잘거리더니 손을 흔들어 배웅까지 해준다. 그리고 다시 마법사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솜방망이를 꺼냈다. 아르카나 학파 마법사들이 전부 순식간에 세걸음씩 물러났다.
 "아르카나에 왔으니, 아르카나 식으로 처벌할거예요."
 "내가 잘못한 건 맞으니까. 방에 돌아가서 자숙할..."
 "아니. 아르카나식 징계는 통돌이 1시간행이다! 가자, 죄수들아!"
 "네, 모범수님!"
 나한테 부채질을 해주던 마법사를 빼고 전부 콜린 마커스를 들쳐매고 우르르 빠져나갔다. 뭐지. 통돌이가 뭐야? 크리스 마법사님은 창백한 얼굴로 두손을 꼭 맞잡고 기도했다.
 "오 세상에. 프란님. 제발 마커스 마법사님이 토하지 않길. 오늘 당번은 나란 말이예요."
 세상에. 비인간적인 벌인가. 프란님. 부디 콜린 마커스가 무사히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음. 마카롱 맛있다.

 클라렌스가 마법사 길드로 떠난 사이, 나는 에스메랄다의 재촉에 못이겨 잠시 프라우를 떠나있기로 했다. 집을 떠난다는데 어째서인지 온 가족이 다 반기는 분위기다.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이 쓰러지기는 했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샐리와 함께 북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클라렌스가 없으니 샐리의 얼굴이 활짝 폈다.
 "아가씨. 북부는 모야트 왕국과 가까워서 색다른 음식이 많대요."
 "그래? 그런데 우리가 가는 곳은 차노트 공작령이여서..."
 "그, 그래도 분명히 모야트 분위기가 나는 곳이 있을거예요!"
 내가 괜히 기대를 망친 것 같네. 모야트는 차노트 공작령 옆에 붙어있는 갈리아 남작령과 마주하고 있는걸. 차노트 대공을 만나러 갈테니 경유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면 분명히 문전박대 당한다. 차노트 공작령은 북부 한게선을 지켜야 하니 그런 여유있는 시설은 공작성 근처에나 있을거다.
 "뭐, 정 궁금하면 대공께 부탁드려볼게."
 "세상에, 아가씨. 경을 치시려고..."
 "괜찮아. 내가 줄리에타와 많이 친해서 대공께서도 귀엽게 봐주신단다."
 그건 그렇고, 에스메랄다가 나를 감시하겠다고 보낸 리스 에들턴이 너무 불편하다. 차마 일면식은 둘째치고 핏줄도 섞인 적 없는 나와 같은 마차를 탈 수가 없어 말을 타고 앞서 가고 있다. 왜 하필이면 에들턴인걸까. 디쳇 후작이면 말귀도 잘 알아듣고 편할텐데. 그래도 에들턴이여서 편하기는 하다. 레오 디쳇이였으면 아마 지금쯤 숨막혀서 도망쳤을지도.
 "황녀 전하께서 에들턴 경을 붙여주셔서 정말 다행이예요. 하필 하틴 기사단이 전부 영지로 돌아갔을 때 이런 명령을 하실 건 뭐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니? 별것 아니고, 그냥 해마다 대공가에 보내는 선물인데 내가 영 답답해하니 핑계를 하나 주신 것 뿐이란다."
 "하긴... 요새 수도에만 계셔서 많이 답답하셨죠?"
 "응. 성에 다녀오고 싶은데..."
 하틴령에 갔다가는 감히 도망친 죄로 도착하자마자 에스메랄다의 명령으로 교수형을 당할지도...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게 보인다. 이 계절에 북부에 먹구름이라니.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겠지. 에들턴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위에 딱히 비를 피할만 한 곳도 없는데. 마부야 마부석의 차양을 전부 치면 된다지만 말을 타고 온 에들턴이 문제다. 창문을 활짝 열자 그가 나를 쳐다봤다.




 "에들턴 경. 날이 갑자기 흐려지네요."
 "네. 아무래도 소나기겠지요."
 "비가 오면 잠시 멈추었다가 그치면 다시 출발해요."
 눈을 깜빡거리던 에들턴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차피 젖는다면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는게 낫습니다."
 "잠시 마차에 들어와서 비를 피하시면 되지요."
 샐리와 단 둘이 타는 마차인데 얼마나 큰 걸 내줬는지, 리클렌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전부 다 타도 넉넉할 정도다.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더니 에들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닫고 벽에 기대니 샐리가 경악해서는 내 팔을 잡고 흔들어댄다.
 "아가씨! 도련님들이 아시면 큰일나요!"
 "너만 입 다물면 돼."
 "마부는요?"
 "마부는 뭐..."
 마부쪽 창문을 벌컥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 할거예요?"
 "무슨 말 하셨습니까?"
 "들었지?"
 "아가씨!"
 "목소리가 크구나. 프라우까지 들리겠다."